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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회] 수능 첫 도입한 시각장애인단말기

중앙일보 2015.11.23 16:15
앞을 전혀 볼 수 없는 시각장애인은 대학수학능력시험(수능) 수학 문제를 어떻게 풀까.
문제지는 점자로 돼 있다. 답을 적을 때에는 점자를 찍기 위한 틀 역할을 하는 점판에 종이를 끼우고 작은 송곳처럼 생긴 점핀으로 점자를 찍는다. 계산은 거의 암산으로 해결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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비장애인이라면 문제를 읽은 뒤 눈을 감고 필기를 하지 않으면서 수학 문제를 푼다고 생각하면 된다. 간단한 계산 문제는 해결할 수 있을지 모르지만 여러개의 공식을 활용하는 문제는 거의 해결하기가 불가능하다. 시각장애인은 지금까지 수능을 그렇게 치렀다. 하지만 올해 수능은 조금 달랐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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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난 12일 치러진 2016학년도 수능 2교시 수학 시간, 서울 종로구 서울맹학교에 마련된 시각장애인 전용 시험실에는 작년까진 볼 수 없었던 기계가 책상마다 놓여있었다. 올해부터 수능에 처음 도입된 ‘점자정보단말기’였다.

시험이 시작되자 시각장애인 서인호(19)군은 오돌토돌한 점자 문제지를 왼손 검지로 훑었다. ‘적분 문제로구나!’ 머릿 속에 적분 공식이 떠올랐다. 서 군은 가로 25cm, 세로 12.8cm의 단말기에 달린 8개 버튼을 빠르게 눌렀다. 버튼 아래쪽에 한 줄로 패인 부분에 올록볼록한 점자가 올라왔다. 그는 머리로는 계산을 하면서 손으로는 버튼을 계속 누르며 식을 썼다. 계산이 끝나자 지금까지 점자로 써 놓은 계산 과정을 더듬었다. 비장애인이 시험지 여백에 계산식을 쓰면서 문제를 푸는 것과 비슷했다.

서 군은 녹내장으로 8살때 실명한 ‘전맹’(全盲) 시각장애인이다. 대부분 수험생들은 이번 수능이 예상보다 어려웠다지만 그는 “다행스런 수능”이었다고 말한다. 난도는 높았지만 끝까지 문제를 풀 수 있었기 때문이다. 서 군은 “수학은 좋아하는 과목이지만 암산으로 풀다보면 뒤로 갈수록 지쳐요. 일반인보다 시험 시간이 1.7배 길어도 문제를 끝까지 풀기가 어려운데 이번엔 단말기가 있어서 끝까지 풀었어요”라고 했다. 서 군과 마찬가지로 전맹 수험생인 조은산(18)군도 “단말기를 쓸 수 없을 때는 문제지 앞쪽에 나오는 쉬운 문제들만 풀고 절반 이상은 손도 못댔죠. 이번 수능에서는 모든 문제에 도전해볼 수 있었어요”라고 말했다.

시각장애인에게 가장 난감한 문제는 여러 개의 식을 각각 계산해 값을 내야 하는 문제다. 비장애인이라면 각각의 식을 적어놓고 쉽게 계산할 수 있다. 하지만 암산에 거의 의존하는 시각장애인은 여러 개의 식을 계산하다보면 앞에서 계산한 결과를 잊어버리기 일쑤다. 서 군은 “한참 계산을 하다가 앞에 걸 까먹어서 다시 처음으로 돌아가는 일이 부지기수”라고 했다.

점자정보단말기는 대부분 시각장애인에게 익숙한 기계다. 수업자료를 파일로 받아 단말기로 읽거나 수업시간 필기를 하는데 자주 쓴다. 뿐만 아니라 인터넷이나 라디오 등의 기능도 있어 여가 시간에도 활용한다.

단말기는 지난해까지 부정행위에 사용될 소지가 있어 수능에서 허용되지 않았다. 하지만 장애인 단체 등은 단말기를 사용하게 해달라고 계속해서 요구했다. 국내 유일의 단말기 제조 업체인 자원메디칼은 점자로 쓰고 읽는 기능을 제외한 모든 기능을 차단하는 수능용 소프트웨어를 개발하며 힘을 보탰다. 결국 올해 초 교육부와 한국교육과정평가원은 수학 과목에서 쓰고 읽는 기능만 탑재한 단말기 사용을 허용한다고 발표했다. 평가원에 따르면 올해 단말기를 사용한 시각장애인 수험생은 21명이다.

아직까지 국어와 영어 등 다른 과목에서는 단말기를 사용할 수 없다. 조 군은 “다른 학생들은 국어 지문을 보면서 중요한 부분에 밑줄을 긋거나 표시를 해놓고 메모도 하는데 시각장애인은 그럴 수가 없어서 지문을 몇번이나 다시 읽어야해요”라고 했다. 서 군은 “영어듣기를 할 때도 가게에서 산 물건 가격의 총 합을 구하는 문제 같은 경우는 들으면서 빠르게 적어놔야 하는데 그러기가 어려워 불편해요. 단말기가 있으면 필요할 때 메모하기가 쉬울텐데…”라고 했다. 이에 대해 교육부 관계자는 “다른 과목으로 단말기를 확대 적용하는 문제는 아직 결정된바 없다. 논의를 더 해봐야 할 문제”라고 밝혔다.

박중휘 영동대 특수교육학과 교수는 “편리한 기계가 있는데도 활용할 수 없는 것은 안타까운 일이다. 전맹 시각장애인이 소수라고 해도 이들의 권리를 위해 국가가 인력과 자원을 투입할 필요가 있다”고 말했다.

서 군은 정치외교학과에 진학해 소수자의 인권을 위한 정책을 만드는 것이 꿈이다. 조 군은 상담심리를 전공해 장애인들의 아픔을 어루만지는 상담가가 되려고 한다. “시각장애인도 비장애인 수험생처럼 수능에서 자기가 가진 실력을 최대한 발휘할 수 있었으면 좋겠어요. 실력이 있는데도 장애 때문에 못 푸는 일은 없어야 하지 않을까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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남윤서 기자 nam.yoonseo1@joongang.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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