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본드의 위기, 그럼에도 다음 편을 기대하는 이유

중앙일보 2015.11.23 10:59
[기획] 본드의 위기, 그럼에도 다음 편을 기대하는 이유
숙제만 남긴 ‘007 스펙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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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최근 30년간 ‘007’ 영화 중 최악이다.” 미국 저명 언론 ‘포브스’가 ‘007 스펙터’(원제 Spectre, 11월 11일 개봉, 이하 ‘스펙터’)에 내린 혹평이다. ‘스펙터’는 시리즈 사상 가장 흥행한 전작 ‘007 스카이폴’(2012, 이하 ‘스카이폴’)의 샘 멘데스 감독이 야심차게 다시 메가폰을 잡은 스물네 번째 ‘007’ 영화(1962~)다. 전작이 지나치게 훌륭했던 탓일까. 첫 공개 후 ‘스펙터’는 기대만 못하다는 실망스러운 반응 일색이다. 50년 넘게 사랑받은 장수 시리즈의 절체절명의 위기에서 쇄신의 가능성을 살폈다.


‘스펙터’도 시작은 창대했다. 멕시코시티의 ‘죽음의 날’ 축제 현장. 광장을 메운 수만 명의 가장행렬 가운데 해골 가면을 쓴 신사가 라틴 미녀와 호텔방에 들어선다. 달아오른 미녀가 침대로 뛰어든 순간 본색을 드러내는 남자. 그는 바로 본드(대니얼 크레이그), 제임스 본드다. 굉음과 함께 순식간에 정체불명의 폭발이 일어나고 인파 가득한 광장 위 창공에서 숨 돌릴 틈 없는 곡예 액션이 펼쳐진다. 당장 추락할 듯 요동치는 헬기를 박력 넘치게 제압하는 본드. 대니얼 크레이그표 ‘근육질 본드’의 진가가 발휘되는 순간이다.


- ‘007 스카이폴’이라는 ‘넘사벽’

9년 전, 크레이그를 6대 제임스 본드로 발탁한 ‘007 카지노 로얄’(마틴 캠벨 감독) 때만 해도 ‘본드답지 않다’는 원성이 자자했다. 하지만 그 불만은 쑥 들어간 지 오래다. 유들유들한 바람기 대신 우직한 책임감을 장착한 역대 유일한 금발의 근육질 본드는 새로운 돌파구가 필요했던 ‘007’ 시리즈의 액션에 활력을 불어넣었다. 그리고 멘데스 감독의 ‘스카이폴’은 크레이그가 써 내려간 새로운 역사의 정점이 됐다. 시리즈 탄생 50주년을 맞은 ‘스카이폴’에서, ‘007’의 뿌리로 돌아가 가장 영국적인 액션을 빚어낸 감독의 전략은 적중했다. 런던의 상징인 지하철이 땅속 구멍으로 떨어져 내리고, 스코틀랜드 교외의 유서 깊은 저택에서 총격전이 벌어지는 ‘스카이폴’의 짜릿한 현실감은 ‘007’의 정통성을 현대의 영국에 완벽하게 부활시켰을 뿐 아니라, 본드여서 가능한 액션을 탄탄한 각본으로 유려하게 엮어 나갔다. ‘스카이폴’이 전 세계 흥행 수입 11억856만 달러(약 1조2925억원)라는, 시리즈 사상 유례없는 메가 히트를 기록한 저력이다.

‘스펙터’가 시리즈 역대 최다인 3929개 개봉관을 확보해 북미 개봉 첫 주말 박스오피스 1위를 거머쥘 수 있었던 데에는 전작의 아성도 한몫했다. 그러나 ‘스펙터’가 전작으로부터 물려받은 건 딱 여기까지다. ‘스카이폴’에 전심전력을 다한 탓일까. 멘데스 감독의 비상한 연출력은 ‘스펙터’에선 오프닝신 이상의 문턱을 넘지 못한다. ‘스카이폴’에서 모국 영국 전역을 치밀하게 활보하던 멘데스 감독의 비상한 액션 연출력은 본드의 활동 무대를 멕시코, 모로코, 이탈리아, 호주 등지로 넓힌 ‘스펙터’에서 섬세함을 놓치고 방황한다. 풍광은 화려하나 세계 어디라도 상관없을 듯한 특색 없는 자동차 추격신, 건물 폭발신이 요란하게만 펼쳐진다.

고전적이라고 해석할 수도 있겠지만, 무엇 하나 새로울 게 없다는 건 53년차 시리즈에게는 그리 좋은 신호가 아니다. 단조로운 액션 시퀀스는 제작비 2억4500만 달러

(약 2871억원)라는 역대 최고의 물량 공세마저 김빠지게 만들었다. 그 어느 때보다 팬들의 ‘덕심’을 저격한 애스턴 마틴의 한정판 본드 카, 레아 세이두와 모니카 벨루치라는 초호화 본드 걸 캐스팅의 콩깍지가 벗겨지는 것 또한 한순간이다. 너무 뛰어난 비교 대상을 ‘넘사벽(넘을 수 없는 4차원의 벽의 준말)’이라 하던가. ‘스카이폴’에서 90% 남짓했던 로튼토마토(미국 영화 비평 전문 사이트) 관객 만족도는 100% 만점에 60%대에 그쳤다. ‘스카이폴’이 한껏 높인 관객의 눈높이는 ‘스펙터’에 고스란히 실망감으로 돌아왔다.


- 후발 첩보영화의 맹추격과 자기 복제의 늪

그러고 보면 ‘스펙터’가 시달린 혹평은 대부분 상대 평가다. ‘미션 임파서블’ 시리즈(1996~), ‘본’ 시리즈(2002~) 와 ‘킹스맨:시크릿 에이전트’(2월 11일 개봉, 매튜 본 감독) 등 후발 첩보영화들의 선전이 위협적인 상황. 이들 영화와의 상대 평가에서 ‘스펙터’가 완패하는 지점은 한결같다. 바로 ‘식상하다’는 것이다. 전작만큼 자주 비교되는 작품은 하필 비슷한 설정으로 먼저 개봉한 ‘미션 임파서블:로그네이션’(7월 30일 개봉, 크리스토퍼 맥쿼리 감독, 이하 ‘로그네이션’)이다. 첩보 조직의 해체 위기에서 파고들수록 위험해지는 악당에 관한 모종의 단서까지 닮은 구석이 한둘이 아니다. ‘로그네이션’ 쪽이 ‘스펙터’와 경쟁을 피해 개봉을 한참 앞당겼다는 이야기도 들려온다.

냉전 종식 후 소재 고갈에 시달리는 첩보 장르의 불가피한 자기 복제라고 눈감아 준다 해도 실망감은 가시지 않는다. 스토리의 밀도에서도 ‘스펙터’는 크게 밀린다. 본드는 MI6가 영국 정부에 의해 해체될 위기에 처한 뒤 사상 최악의 조직 스펙터의 존재를 파고든다. ‘007 퀀텀 오브 솔러스’(2008, 마크 포스터 감독)에서 비밀 조직 ‘퀀텀’을 추적한 지 불과 2편 만이다. ‘스펙터’의 오프닝신은 ‘죽음의 날’ 축제를 의미심장하게 그려내며 “죽은 자들은 살아 있다”고 암시하지만, 정작 살아 돌아온 죽은 자의 충격은 대단치 않다. 그의 전사를 아무리 거창하게 읊어 봤자 몰입이 쉽지 않다. 너무 빨리 본색을 드러낸 악당의 정체도 싱겁기는 마찬가지다. 한 서린 복수심을 섬뜩한 외모에까지 세공한 ‘스카이폴’의 실바(하비에르 바르뎀)나, 낯선 배우의 신선한 카리스마가 돋보인 ‘로그네이션’의 악당 레인(숀 해리스)에 비해 ‘스펙터’에서 효력 없는 악당의 위악은 허황되게만 느껴진다.

정체된 첩보 장르에 혜성처럼 나타난 ‘킹스맨:시크릿 에이전트’의 스타일리시한 액션과 ‘미션 임파서블’ 시리즈의 일사분란한 팀워크에 비하면 ‘스펙터’에서 본드는 철저히 고독하다. 최첨단 장비를 지원하는 천재 요원 Q(벤 위쇼)를 제외하면 제 몫을 해내는 동료가 거의 없다. 본드의 발목을 잡는 캐릭터는 미모가 전부인 본드 걸 스완(레아 세이두)으로 충분하다. ‘스펙터’로 멘데스 감독이 얻은 칭찬은 사실상 크레이그가 연기한 지난 4편의 ‘007’ 시리즈를 감성적으로 돌아봤다는 미덕 하나다.

그러나 50년 넘게 사랑받은 장수 시리즈에게 위기는 곧 쇄신의 기회이기도 하다. 아마도 크레이그의 마지막 본드를 보게 될 차기작 ‘본드 25’(가제, 2017년 개봉) 이후 완전히 새로운 본드가 거론되는 건 그런 이유다. 7대 본드의 인종과 성별이 무엇이건 기억해야 할 것은 첩보영화의 기본이다. 치밀한 첩보전과 허를 찌르는 액션 그리고 스파이 못지않게 강렬한 악당. ‘스펙터’가 남긴 교훈이다.


<제임스 본드 vs 에단 헌트>

‘미션 임파서블’ 시리즈의 주인공 에단 헌트(톰 크루즈)는 영국의 제임스 본드를 롤모델로 탄생한 미국의 스파이다. ‘007’ 시리즈의 정통성을 넘볼 수 없는 신생 첩보 시리즈가 선택한 전략은 불가능의 한계에 도전하는 액션 스타일. 맨몸으로 날아오르는 비행기에 매달린 5편 ‘로그네이션’까지 제작자이자 주연 배우 톰 크루즈의 무모한 도전은 20년째 계속되며 명백한 전통을 만들어냈다. 방향을 잃은 ‘007’ 시리즈가 고민할 지점도 다르지 않다. 어쩌면 ‘007’ 시리즈의 위기는 그간 뚜렷한 전략 없이 시리즈의 쇄신을 꾀했다는 데 있다. 100주년까지 남은 50년을 위해서라도 후발 주자들 못지않은 견고한 스타일을 고민해야 한다. 새로운 강수를 둬야 할 때다.


글=나원정 기자 na.wonjeong@joongang.co.kr, 사진=UPI 코리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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