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침묵하는 북한 … 김정은, DJ·노무현 서거 때처럼 조전 보낼까

중앙일보 2015.11.23 02:23 종합 10면 지면보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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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93년 7월 11일 당시 김영삼 대통령이 방한 중이던 빌 클린턴 미국 대통령과 함께 청와대에서 조깅을 하고 있다. 당시 김 대통령은 북·미 회담에 대해 강한 우려를 전달했다. [중앙포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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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95년 일본에서 열린 APEC 회의 당시 김영삼 대통령은 평소 “형제지정(兄弟之情)을 나눈 사이”라고 말하던 장쩌민(江澤民) 중국 국가주석과 만났다. [중앙포토]

북한은 22일 오후 늦도록 김영삼 전 대통령의 서거 소식을 보도하지 않았다. 당연히 조전도 없었다. 북한은 김대중(DJ) 전 대통령과 노무현 전 대통령 서거 당시엔 다음 날 관영매체를 통해 관련 소식을 보도했으며, 김정일 국방위원장 명의의 조전을 유가족들에게 보냈다.

YS 대북정책과 북한 반응
1994년 남북정상회담 추진
보름 전 김일성 숨져 무산


 DJ가 2009년 8월 18일 서거하자 다음 날인 19일 서거 소식을 보도했으며, 서거 사흘 뒤인 21일엔 김기남 노동당 비서와 김양건 통일전선부장 등 북측 대표 6명으로 구성된 고위급 조문 사절단을 서울에 보내왔다. 노 전 대통령이 2009년 5월 23일 서거했을 때도 다음 날인 24일 노동신문 등 관영매체를 통해 관련 소식을 전했으며, 김 위원장 명의로 조전을 보냈다. 정부 관계자는 “북한은 남북관계가 좋았을 때의 정상이 서거했을 경우에 조전을 보내는 경향이 있다”고 말했다.

 YS는 취임 초 남북관계 개선 의지가 강했다. 1993년 2월 취임사에서 “어떤 동맹국도 민족보다 우위에 있을 수 없다”고 말했다. 하지만 북한의 핵확산금지조약(NPT) 탈퇴로 촉발된 1차 북핵위기(93년), “전쟁이 나면 서울은 불바다가 될 것”이란 북측의 위협(94년 3월) 등 악재가 이어지며 대북 강경책으로 바뀌었다.

 그러다 94년 6월 지미 카터 전 미국 대통령이 방북하면서 남북관계에 변화의 계기가 생겼다. 김일성 당시 북한 주석이 카터 전 대통령을 통해 남북 정상회담을 제안하면서다. 그해 6월 20일 남북 간 실무접촉이 시작됐다. 남측에선 이홍구 부총리 겸 통일원 장관이 수석대표로 나섰다. 6월 28일 남북은 7월 25~27일 평양에서 첫 정상회담을 열기로 합의했다. 하지만 정상회담 직전인 7월 8일 김일성이 심장마비로 급서했고, 결국 첫 남북 정상회담의 꿈은 미완으로 남았다. YS는 후일 회고록에 당시 심경을 이렇게 적었다. “김일성 사망 소식에 상당한 충격을 받았다. 만감이 교차했다. 50년간 민족의 비극적 분단과 대립에 결정적인 책임이 있는 독재자의 죽음, 보름 후로 예정된 역사적인 남북 정상회담에 걸려 있던 국민들의 희망과 기대….”

 김영삼 정부는 한·중 관계 발전의 초석을 쌓았다는 평가도 받는다. 양국은 92년 수교한 이후 94년 11월 리펑(李鵬) 총리, 95년 11월 장쩌민(江澤民) 국가주석 등 중국 지도자들이 처음으로 한국을 찾아 정상회담을 했다.

 대일정책에선 강경한 입장을 유지했다. YS는 취임 직후인 93년 일본군 위안부 문제에 대해 더 이상 일본에 금전적 보상을 요구하지 않고, 한국 정부가 직접 지원 조치를 실시하겠다고 밝혔다. 대신 “일본 정부는 실체를 조사하고 책임을 인정하라”고 ‘도덕적 압박’을 했다. 동서대 조세영 일본연구센터 소장은 “이는 고노 요헤이 관방장관이 위안부 동원에 강제성이 있었단 사실을 처음으로 인정하는 ‘고노 담화’를 발표하게 된 배경이 됐다”고 말했다.

전수진·유지혜 기자 chun.sujin@joongang.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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