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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소문 포럼] 반기문은 대권주자의 자격이 있는가

중앙일보 2015.11.23 01:11 종합 28면 지면보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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강찬호
논설위원

가나·이집트·미얀마·페루. 유엔 사무총장을 배출한 나라들이다. 하지만 국제사회에서 존경받는 나라들은 못된다. 유엔의 수장을 냈다는 사실만으로 선진국이 될 수 없다는 건 이 4개국을 보면 자명해진다. 유엔 사무총장이 우리나라 사람이란 건 기분 좋은 일이지만 한국이 위의 네 나라보다 높은 국격을 인정받으려면 그것만으론 부족하다. 총장 본인의 남다른 노력과 함께 한국인들의 조력이 절대적으로 필요하다.

 우리가 외국인에게 “유엔 사무총장이 한국 사람”이라 자랑한다면 그는 “축하한다. 그런데 그분이 총장으로서 무슨 일을 했느냐”고 물을 것이다. 이 질문에 자신 있게 대답할 수 있는 한국인은 많지 않을 것이다. 당장 당신은 반 총장이 지난 9년간 무슨 일을 해왔는지 아는가? 답을 말해주자면 그는 많은 일을 했다.

 코트디부아르 등지의 분쟁을 종식하는 등 전통적인 총장의 역할에도 충실했지만 반 총장의 트레이드 마크는 단연 기후변화 대책이다. 그는 전 세계를 돌며 온실가스를 줄이고, 친환경 에너지로 대체해야 지구가 살 수 있다고 호소해왔다. 그런 반 총장의 조국인 한국은 온실가스를 전 세계에서 일곱째로 많이 배출하는 나라다. 그러나 온실가스 감축엔 지극히 인색하다. 지금 같은 추세가 계속되면 2020년에는 한국이 3위로 올라선다는 전망도 있다. 반 총장이 공개적으로 “창피하다”고 말했을 정도다.

 비난을 의식한 정부는 2030년까지 온실가스 5억3587만t을 줄이기로 결정했다. 그나마 전 세계 배출 전망치의 37%에 불과하다. 이 경우 재계는 7조~13조원을 써야 한다. 유엔 사무총장을 배출한 나라로서 져야 할 부담이다. 하지만 이를 지킬 기업이 얼마나 될까. 차일피일 미루다 이 정부가 끝나면 없었던 일로 넘어갈 공산이 크다. 10년 가까운 반 총장 재임 기간 내내 별로 늘지 않은 국제원조기금도 마찬가지다. 유엔의 수장을 냈다고 자랑만 했지 세계 10위권 경제강국답지 않게 국제사회에 대한 기여도는 눈에 띄게 낮은 나라가 한국이다. 더 창피한 건 유엔 사무총장이 무슨 일을 하는지 알지도 못하고 돕지도 않는 나라에서 그를 차기 대권주자로 띄워 올리는 데 정신이 없다는 것이다.

 자녀가 하버드대에 들어갔다고 자랑만 할 뿐 그가 대학에서 어떤 공부와 활동을 했는지는 전혀 관심을 두지 않다가 자녀가 귀국하면 “하버드 나왔으니 무조건 최고의 직장에 들어가야 한다”고 고집하는 부모나 다름없다. 내용 아닌 겉껍질을 갖고 호가호위하는 우리 특유의 천박한 의식이 반 총장 대권론의 기저에 똬리를 틀고 있다. 정치권이 여야를 가리지 않고 이런 풍조를 부채질하는 점에서 특히 가증스럽다. 게다가 반 총장 본인도 이런 흐름을 은근히 즐기는 모양새다. 그는 입만 열면 “내 이름을 차기 대선주자 여론조사에서 빼 달라”고 한다. “대선 안 나간다”는 한마디만 하면 저절로 그렇게 된다. 한데 반 총장은 이 말만은 절대 하지 않으니 대권 도전설이 증폭될 수밖에 없다.

 임기가 1년 남은 반 총장이 마지막으로 남길 수 있는 레거시는 북한이다. 하지만 그의 방북은 “김정은에게만 좋은 일” “대선용 정치쇼” 같은 논란을 불붙일 우려가 적지 않다. 냉전이 한창이던 1954년 베이징을 방문하는 용단을 내린 다그 함마르셸드 전 유엔 사무총장의 혜안을 반 총장이 숙고해야 할 이유다. 당시 서방은 유엔총회가 중국 규탄 결의를 낸 점을 지적하며 “유엔의 적에 유엔 수장이 무릎 꿇은 격”이라고 비판했다. 하지만 함마르셸드는 “나는 유엔총회 대변인이 아니라 평화 유지가 최우선 임무인 유엔 사무총장으로 방중한 것”이라고 받아쳤다. 이런 의연하고 창의적인 논리에 비난은 수그러들었고 함마르셸드는 중국이 억류해온 미군 조종사 15명의 귀환을 끌어내는 데 성공한다.

 반 총장도 함마르셸드처럼 될 수 있다. 일체의 정치적 계산 없이 세계 평화라는 유엔의 대의만을 가슴에 담고 평양을 찾는다면 말이다. 그래서 누가 봐도 “잘했다”고 할 성과를 거두고 돌아온다면 유엔의 수장이어서가 아니라 한반도 평화에 기여한 인물로서 진정한 대권주자의 자격을 얻을 수 있을 것이다.

강찬호 논설위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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