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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박승희의 시시각각] 저무는 3김 정치가 그립다

중앙일보 2015.11.23 00:57 종합 30면 지면보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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박승희
정치부장

이래서 정치가 허업(虛業)일까.

 YS가 세상을 떠났다. 대한민국 3김 정치의 두 축이 무너져 내렸다. 일요일 이른 아침 빈소를 찾은 남은 한 축, JP의 말은 허허로웠다.

 “더 좀 살아계셨으면 좋았는데…. 애석하기 짝이 없어. 신념의 지도자로 국민 가슴에 영원히 기억될 분이야.”

 휠체어를 탄 JP가 돌아오지 않을 YS에게 건넨 말엔 증오도, 한도, 경쟁심도 남지 않았다. 6년 전인 2009년 8월 건강했던 YS가 죽음과 싸우고 있는 DJ를 찾아 신촌 세브란스 병원에 간 장면도 그랬다.

 - 이제 두 분이 화해한 것으로 봐도 됩니까.

 “이제 그럴 때도 됐지 않았나….”

 저무는 3김 시대를 보는 마음은 무겁고 쓸쓸하다. 죽음 자체도 쓸쓸하지만 그것 때문은 아니다. 원래 삶과 죽음은 운명이다. 마음이 무거운 건 더없이 쩨쩨해지고 작아지고 있는 오늘의 정치가 대비돼서다. 한국 정치에서 3김은 청산 대상이었고, 극복 대상이었다. 피가 뜨거운 20, 30대 정치부 기자 시절을 보낸 필자도 ‘포스트 3김 정치’를 현장에서 늘 희구했다. 그러나 오늘날 정치 현장에선 “3김 때가 낫다”란 말이 늘고 있다. 영문이 있다. 여야 의원들이 섞어 앉기를 꺼려 하고, 함께 술잔도 기울이지 않는 협량의 정치로 잘아져서다. 목숨 걸고 싸워야 했던 민주 대 반민주의 투쟁 시대도 아닌데 사생결단으로 싸우는 갈등의 정치라서다.

 3김 정치는 의회주의가 바탕이다. DJ는 국민회의 총재 시절 국회 본회의장 맨 뒷자리에 앉았다. 소속 의원들이 회의장 안을 돌아다니거나 잡담을 하면 뒷자리로 불렀다. “어이 ○의원. 본회의장에 들어왔으면 법안을 살펴봐야지. 국민들은 자기가 뽑아준 의원이 국회 안에서 뭘 하고 있나 늘 지켜보고 있소….” 한때 당을 이끈 이기택 대표가 12·12 불기소 처분 등에 저항해 장외투쟁을 할 때도 “왜 국회라는 투쟁 장소를 두고 국회의원들이 거리로 나가느냐”고 해 당내 반발을 샀을 정도다. 만 26세에 국회의원이 된 YS는 “국민의 대표”라는 말을 입에 달고 살았다. 당 대변인과 원내총무를 지내면서 반독재 투쟁을 독하게 한 장소가 국회였다. 군사정부가 국회를 섬(여의도)으로 멀찌감치 내몰았을 정도다. “닭의 목을 비틀어도 새벽은 온다”는 발언도 의원직을 제명당하며 한 말이다. 반대 진영에 섰지만 JP는 자타가 공인하는 타협의 정치인이다.

 하지만 지금의 정치는 국회 대신 거리를 뒹군다. DJ와 YS는 어쩔 수 없어서 거리로 나갔지만 요즘 정치인들은 어쩔 수 있는데도 거리로 몰려간다. 갈등을 국회 안에서 녹여내지 못한다. 거리의 갈등에 편승하는 종속의 정치를 하고 있다. 대통령이 국회를 가볍게 알수록 정당의 지도자들은 갈등을 국회 안으로 수렴해 내야 한다. 그래야 대통령 중심의 정치를 의회 중심의 정치로 승화시킬 수 있다. 고루한 얘기지만 정치의 힘은 의회에서 나온다.

 정치는 또 사람이다. 대통령 시절 YS는 중요한 사람을 영입할 때면 청와대 관저로 초대했다. 무소속 박찬종 의원을 15대 총선 직전 수도권선대위원장으로 영입한 게 한 예다. 당시 YS는 관저를 찾은 박찬종과 단둘이 오찬을 하면서 젓가락으로 반찬을 집어 그의 밥에 올렸다. YS의 “박 동지” 발언에 마음이 풀어진 박찬종은 청와대 기자실로 직행해 입당 기자회견을 했다. 3김의 경쟁 때문에 정치를 하지 않아도 될 사람, 정치보다 경제·과학계에 필요한 사람들까지 싹쓸이를 한 폐해도 컸다. 하지만 3김은 정치 시장이 원하는 대로 사람을 귀히 여겼고, 가려운 곳을 긁어줄 줄 알았다.

 3김식 정치의 과(過)는 선명하다. 독과점 정치였고, 구악의 정치였고, 무엇보다 지역에 편승한 정치였다. 그래서 “썩어도 준치” “구관이 명관”이란 속담과 함께 “그래도 3김”이라는 말이 나도는 현실은 무겁다. DJ에 이어 YS를 보내는 마음은 우리 정치가 아직 좋은 아버지가 될 준비가 안 됐는데도 천붕(天崩)이 닥친 것처럼 답답하고 무겁다.

박승희 정치부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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