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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YS일대기] 부유한 선주의 아들, 27세 최연소 의원

중앙일보 2015.11.22 22:56

‘미래의 대통령 김영삼’

김영삼 전 대통령(YS)이 경남중 3학년 때 하숙집 책상머리에 손수 써서 붙여 놓은 붓글씨다. 소년 YS의 꿈은 그로부터 꼭 46년 만인 1992년 현실이 됐다.

◇부유한 선주의 아들, 27세 최연소 의원=YS의 아호는 거산(巨山)이다. 거제도의 ‘거’와 부산의 ‘산’을 땄다. 거제 앞바다가 유년시절 그의 포부를 키웠다면 부산은 그에게 정치적 뿌리가 됐다. YS는 아버지 김홍조씨(2008년 작고)와 어머니 박부연씨(60년 간첩에게 피살)의 3남 5녀 중 장남으로 태어나 유복한 학창시절을 보냈다. 1927년 12월 20일(호적상) 경남 거제군 장목면 외포리 대계마을에서 태어난 그는 54년 제3대 국회의원 선거에서 거제에 출마, 최연소(27세) 로 당선된 이후 9선을 지냈다. 그가 훗날 정치인으로서 검은 돈으로부터 자유로울 수 있었던 것은 든든한 후원자였던 아버지 덕분이었다. 아버지가 명절 때마다 어장에서 잡은 멸치를 선물용으로 보내 당시 정가에선 ‘김영삼 멸치’를 맛보지 않은 사람이 없었다고 한다. 어렸을 땐 장목국민학교까지 8㎞를 걸어서 통학했다. 걷고 달리는데 이력이 붙은 그는 스포츠에 재능을 보여 경남중 시절 학교 수영선수로도 뽑혔다.

◇40대 기수론 제창, 47세 최연소 야당 총재=정계 입문 후 YS는 야당 정치인으로서 민주화 투쟁을 하면서 성장해나갔다. 71년엔 ‘40대 기수론’을 내세워 44세의 나이에 신민당 대통령 후보 지명전에 뛰어 들었다. 당시 유진산 총재는 ‘40대 기수론’을 내세운 그를 ‘구상유취(口尙乳臭ㆍ입에서 아직 젖냄새가 난다)’라며 얕잡아 봤으나 막판엔 적극 지지했다. 하지만 평생의 라이벌인 김대중 후보에게 밀려 고배를 마셨다. 74년 유진산 총재가 암으로 사망한 후 ‘선명노선’을 내세운 그는 47세에 야당 당수에 올랐다.

79년 8월 ‘YH 여공 신민당사 농성’ 사건 후 그는 미국 일간지 뉴욕타임스(NYT)와의 인터뷰에서 미국의 박정희 정권 지지철회를 주장하는 발언을 했다. 당시 여당인 민주공화당과 유신정우회는 “반국가적 언동”이라며 의원직 제명안을 통과시켰다. 이때 그가 남긴 말이 “닭의 모가지를 비틀어도 새벽은 온다”였다.

◇23일간의 단식과 수영만 집회=그의 정치 인생에서 가장 큰 전환점이 된 두 장면을 꼽으라면 ‘23일간의 단식’과 ‘수영만 집회’를 빼놓을 수 없다. 5공시절인 83년 5월 18일 그는 광주민주화운동 3주기를 맞아 야당 인사 석방 등을 요구하며 단식에 돌입했다. 이때 그는 민정당 권익현 사무총장이 전두환 당시 대통령을 대신해 단식 중단 후 해외출국을 요구하자 “나를 해외로 보낼 수 없는 것은 아니다. 나를 시체로 만든 뒤 해외로 부치면 된다”고 말한 뒤 돌려보냈다. 단식은 23일간 이어졌고, 이를 계기로 지리멸렬하던 민주화 세력이 결집했다. 그는 이듬해 5월 18일엔 민주화추진협의회(민추협)을 발족, 김대중 전 대통령과 함께 신한민주당을 창당했다. 85년 2ㆍ12총선(12대)에선 신민당 돌풍의 원동력이 됐고, 이는 87년 직선제 개헌으로 이어졌다. 하지만 양김(兩金)은 후보 단일화엔 실패했다.

그해 10월 10일 대통령 후보 출마를 공식 선언하고 17일 부산 수영만에서 대규모 집회를 열었다. 그는 회고록에서 “대회에 참석한 군중 수를 일본의 아사히 신문은 170만 명, 월스트리트 저널은 100만 명 이상이라고 보도했다. 사람들은 240만 명 이상이 모였다고 했다”고 적었다. 당시 부산 인구가 350만 명이었으니 3분의 2 가량이 수영만에 모였다는 얘기다.

◇3당 합당 후 집권=그는 종종 “나무에 집착하면 숲이 안보인다”고 말하곤 했다. 상황이 바뀌면 명분을 만들어 새로운 활로를 찾는 정치 스타일을 잘 드러내는 말이다. 그는 90년 “구국의 결단”이라며 3당 합당을 추진했다. 당시 상황에 대해 회고록에서 “89년 12월 31일 전두환의 국회 증언이 이뤄졌다. 5공 청산의 최대 걸림돌이 제거된 셈이었다. 5공 청산이 일단락된 시점에서 모든 것을 원점에서 다시 생각하기 시작했다”고 썼다.

이 때문에 그는 “대통령병 환자” 취급을 받기도 하고, 야권으로부터 “변절자”란 비판을 받았다. 3당 합당 배경에 대해 민주계의 한 의원은 “당시 제3당으로서 평민당에 밀려 여론의 관심에서 멀어지는 것을 참지 못했던 것도 큰 이유”라고 설명했다. 하지만 그는 3당 합당을 통해 결국 소년 시절 책상머리에 써놓았던 ‘미래 대통령 김영삼’의 꿈을 이뤘다.

이가영 기자 ideal@joongang.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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