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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스페셜 칼럼 D] 전두환·노태우가 못한 금융실명제, YS만 해냈다

중앙일보 2015.11.22 18:56
1993년 8월 12일 저녁 7시45분. 갑작스런 대통령 특별담화문이 발표됐다. 김영삼(YS) 당시 대통령이 TV에 등장해 "친애하는 국민여러분. 드디어 우리는 금융실명제를 실시합니다. 이 시간 이후 모든 금융거래는 실명으로만 이루어집니다"로 시작되는 연설문을 읽어내려갔다. 83년 이후 11년 간 미뤄져오던 실명제 도입이 대통령 긴급 재정경제명령 16호로 현실화하는 순간이었다.

금융실명제는 예금이나 대출, 채권투자 같은 모든 금융거래를 반드시 본인이름으로 하게 하는 제도를 말한다. 지금은 은행이나 증권사 창구에서 신분증을 내미는 걸 당연하게 여기지만 20여년 전까지만 해도 그렇지 않았다. 대부분의 국민들은 자기 이름으로 거래를 했지만 기업이나 사채업자 등 이른바 '큰 손'들은 가명이나 차명으로 거래하는 경우가 많았다. 이를 막은 게 바로 YS가 실행한 금융실명제다.

실명제는 YS의 대선공약이었다. 그는 평소 실명제가 정경유착과 부정부패의 온상이라는 인식을 강하게 갖고 있었다. 담화에서도 "실명제가 실시되지 않고는 이 땅의 부정부패를 원천적으로 봉쇄할 수 없습니다. 금융실명제는 '신한국 건설'을 위해 가장 중요한 '개혁 중의 개혁'이며, 개혁의 중추이자 핵심"이라고 강조했다. 그는 대통령이 된 뒤에도 청와대 모임 등에서 만난 사람들과 개혁 얘기를 하면서 실명제에 대한 의견을 물었다.

최종 결심은 1993년 6월 29일 이경식 부총리와의 정례 독대 자리에서 이뤄졌다. 독대가 끝나갈 무렵 실명제 실시가 지론인 이 부총리가 불쑥 물었다. "각하, 실명제는 어떻게 처리하실 생각입니까?" YS의 반응은 이랬다. "글쎄 말이야. 누구하고 터놓고 의논하지도 못하겠고, 하기는 해야겠는데 큰 고민이야." 대통령의 의중을 파악한 이 부총리가 결심을 촉구하자 YS는 경제에 미치는 영향을 물은 뒤 "조기에 모든 것을 한꺼번에 실시하자"는 결론을 내렸다.

준비와 발표는 철통 보안 속에서 이뤄졌다. 실명제 초안은 부총리 자문관 양수길 박사와 한국개발연구원(KDI) 남상우 박사가 만들었다. 양 박사가 매일 보고를 했고, 이 부총리의 집에서 셋이 모여 보고를 받기도 했다. 7월 8일 이 부총리가 YS에게 실명제 초안을 보고했고, YS는 거의 원안대로 추진하되 보안을 지키라는 엄명을 내렸다. 이 부총리는 홍재형 재무장관과 의논해 김용진 세제실장, 김진표 국장, 진동수 과장 등으로 재무부 실무팀을 구성했다. 여기에 소속된 20명은 과천 주공아파트 한채를 두달간 빌려 같이 먹고 자며 작업했다. ‘현관문을 나설 수 없다’, ‘창문가에서 서성대지 않는다’ 등이 당시 수칙이었다. 작업은 '남북 통일 작전’으로 명명됐다. YS는 이후 회고록에 “기득권의 저항을 피하기 위해선 국회에서 법으로 만들기보다 대통령 긴급 명령이란 형식이 바람직하다”고 판단했다고 썼다.

여기엔 앞선 두 대통령이 실명제를 하려다 실패한 경험이 크게 작용했다. 첫 실명제 도입 시도는 82년 이철희·장영자 사건이 터진 직후 이루어졌다. 이 사건은 사채시장의 큰손이던 장씨가 대기업에 돈을 빌려주는 대신 2조2000억원의 어음을 발행케해 7000억원이 넘는 피해를 입힌 사건이다. 당시 굴지의 대기업이던 공영토건과 일신제강 등이 이 여파로 무너졌다. 장 씨 부부는 차명거래가 보편화된 금융시장의 맹점을 이용해 새 어음으로 옛 어음을 갚는 돌려막기 수법을 썼다. 이 씨가 전두환 당시 대통령의 먼 친척이었기에 정치적 파장이 정권을 뒤흔들 정도였다.

놀란 정부는 그해 7월 3일 토요일 아침 '사채양성화와 관련된 실명거래제 실시와 종합소득세의 개편방안'을 전격 발표했다. 1년 뒤인 83년 7월 1일부터 은행·단자·증권회사의 모든 금융거래에서 실명거래만 허용하고 15%로 분리 과세되는 이자 및 배당 등 모든 금융소득을 종합과세하겠다는 내용이었다. 강경식 전 부총리와 김재익 전 경제수석이 이를 주도했다.

시장은 놀라 자빠졌다. 큰손들의 매물이 쏟아져 종합주가지수가 폭락했다. 주가가 액면가 이하로 떨어진 종목이 340여개에 달했다. 무기명 거래가 대부분이던 단자사 자금은 하루 사이에 400여 억원이 빠져나갔다. 사채 거래가 아예 끊기고 암달러 가격이 폭등했다. 금융기관에서 빠져나간 돈이 부동산으로 몰리면서 강남의 7000만원짜리 아파트가 1억원으로 폭등했다. 실명제를 반대한 야당은 물론 여당까지 반대하면서 실명제법이 제정됐지만 시행시기가 명시되지 않아 곧바로 사문화돼버렸다.

뒤를 이은 노태우 대통령도 실명제 실시를 공약으로 내걸었다. 올림픽이 끝난 1988년 10월 당시 나웅배 부총리는 '경제성장과 선진화합경제 추진대책'을 발표하며 1991년부터 실명제 및 금융소득종합과세를 실시하겠다는 의지를 표명했다. 개각으로 바뀐 조순 부총리와 문희갑 경제수석이 배턴을 이어받았다. 하지만 1989년 후반 경제지표가 악화하면서 전경련을 앞세운 재계의 반대가 커졌다. 청와대와 정부, 민자당 등 집권세력 상층부에서도 연기론이 제기됐다. 노 대통령 본인도 실명제에 그리 적극적이지 않았다. 1989~1990년 이른바 '총체적 위기론'이 제기되면서 결국 실명제는 1년 반에 걸친 논란만 남긴 채 공식 연기됐다.

이렇듯 곡절 많은 사안을 밀어붙인 YS의 실명제는 큰 파장을 불러왔다. 사채를 중심으로 자금시장이 얼어붙으면서 특히 중소기업 사이에서 불만이 터져나왔다. YS 임기 말 외환위기가 밀어닥치면서 "무리한 실명제로 자금시장이 위축돼 기업이 잇따라 도산한 게 원인"이라는 지적까지 나왔다. YS의 실명제 발표 11년 전 전두환 전 대통령이 처음 실명제를 추진했을 때 실무자였던 강만수 전 기획재정부 장관도 긴급명령이라는 방식에 비판적이다. 그는 "1982년 실명제를 처음 추진할 때나 지금이나, 실명제는 법으로 강제할 것이 아니라는 생각에 변함이 없다. 원래부터 실명을 쓰는 99% 정도의 사람들까지 주민등록증을 제시하게 하고, 법으로 다스릴 필요는 없다. 범죄를 수사하기 위해서는 거액의 현찰거래나 외환거래에 대한 자금세탁방지법으로 충분하다. 관행은 관행으로 고쳐야 하고 금융단 협정으로 충분하다. 더구나 신용사회가 되면 신용의 축적을 위해 자발적으로 실명을 사용한다. 긴급명령까지 왜 필요했을까"라고 의문을 제기했다.

하지만 성과도 작지 않다. 무엇보다 "YS의 저돌적 추진력이 아니었다면 실명제 도입 자체가 쉽지 않았을 것"이란 의견이 많다. 성과를 나타내는 수치도 있다. 1997년 3월까지 금융기관의 실명확인율은 99.3%에 달했다. 실명전환 대상금액 총 405조5000억원 가운데 402조7000억원이 실명 확인됐다. 가명 또는 무기명예금의 실명전환율도 98.8%에 달했다. 제도적으로 금융기관을 경유하는 모든 금융거래에서 실명사용을 의무화함으로써 각종 불법·음성 거래를 위축시키는 데 기여한 것은 틀림없다. YS 재임시절 터진 '전두환·노태우 비자금 사건' 역시 실명제가 아니었더라면 세상에 드러나지 않았을 가능성이 크다. 1982년 실명제 도입에 실패했던 강경식 전 부총리는 실명제 발표 뒤 한 언론인터뷰에서 "1982년 첫 실명제 도입 시도를 대통령 긴급조치로 했으면 성공했을 텐데' 라고 후회를 많이 했다. 그 때는 경제에 엄청난 충격을 주는 조치는 많이 토론할수록 좋다고 생각했다. 그런데 그 길을 밟았다가, 두 번의 실명제 추진이 다 실패했다. 이번에도 국회에서 입법절차를 밟았더라면 심의과정에서 엄청난 반발이 일어나고, 결과적으로 실패했을 것이다. 긴급명령으로 실명제를 실시한 것은 잘한 일이다"라고 말했다.

나현철 논설위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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