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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스페셜 칼럼 D] 잊혀져 가는 민주화의 새벽 … 타고난 승부사 YS를 추억하다

중앙일보 2015.11.22 18:00
“나를 감금할 수는 있어도 내가 걸으려는 민주화의 길, 내의 양심과 마음은 전두환이 뺐을 수 없다.”

YS, 기막힌 승부수로 민주화 역사를 만들다
“닭의 목은 비틀어도 새벽은 온다.”

자신을 국회에서 제명한 박정희 대통령의 유신정권과 가택 연금한 전두환의 군부통치에 맞서면서 했던 김영삼 대통령의 발언이다. 민주화 투사 김영삼에 대한 기억은 이 두 마디로 요약할 수 있다. 그에 대한 강렬한 기억이다. 김영삼은 민주화 운동을 통해 대한민국에서 군부통치를 종식하고 문민시대를 열었다.

1993년 2월 제14대 대통령에 오른 뒤 98년 2월까지 재임하면서 이 나라의 모습을 확 바꿨다.
그의 집권기는 전광석화 같은 몇 가지 정책으로 기억된다. 하나는 군인정치와 쿠데타 위협의 싹을 잘라버린 일이다. 1212 군사정변을 일으켰던 전두환, 노태우라는 두 전직 대통령을 ‘역사바로세우기’라는 이름으로 감옥에 보내고, 군대 내 사조직인 하나회를 해체해 대한민국 역사에서 쿠데타 위협을 걷어냈다. “오늘부터 모든 금융거래는 실명으로 이뤄진다”라는 김 대통령의 발언으로 요약되는 전격적인 금융실명제와 공직자 재산등록도 그의 통치기에 이뤄졌다. 대한민국의 보다 맑아지게 된 계기였다. 그렇게 짧은 시기에 그렇게 전격적으로 할 수 있으리라고는 아무도 기대하지 않았던 일을 해치웠다.

물론 그에 대한 평가는 엇갈린다. 3당 합당 이후 나왔던 ‘목적을 위해서는 수단을 가지지 않는다는’라는 평가와 외환위기 당시 나왔던 ‘경제에는 무능하다’는 평가는 부정적인 평가를 대표한다. 하지만, 긍정적인 평가도 상당하다. ‘목숨을 걸고 군사정권에 저항했던 민주화 투사’라는 평가와 ‘타고난 정치사’라는 평가를 빼놓을 수 없다. 지도자를 객관적으로 평가하려면 공과 과를 모두 기억해야 한다. 특히 타고난 승부사라는 평가는 정치의 방식이나 용도가 확연히 달리진 지금에 와서는 빛이 바래고 있는 것도 사실이다. 하지만, 그런 승부사 기질이 없었다면 민주화를 이루기 힘들었거나 시간이 더 걸렸을 것이라는 생각을 하는 사람이 적지 않다. 선 굵은 행동이 민주화를 앞당겼다는 평가다. 세상을 떠난 김영삼 전 대통령을 기억하며 1980년대의 추억을 기록으로 남긴다.

단식과 민추협…5·18 3·4주년에 행동으로 나섰던 YS

나는 YS의 승부사적 기질을 여러 차례에 걸쳐 목격했다. 5공화국 때인 1985년 2월 12일 치러졌던 12대 총선과 6공화국 때인 1988년 4월 26일 열렸던 제13대 총선이었다. 각각 대학생 때와 중앙일보사에 들어오기 전 첫 직장에서 일할 때였다. 1985년의 12대 총선은 여전히 쌀쌀한 분위기에서 열렸다. 1980년 5월 광주의 피비린내가 미처 사라지지 않았던 1981년 3월25일 11대 총선 이후 처음 열린 선거였기 때문이다.

우선 11대 총선은 군부에 절대 유리한 조건을 인위적으로 만든 상태에서 치러졌다. 첫째 군부는 1980년 정치풍토쇄신특별조치법을 만들어 야권 정치인 567명의 정치활동을 금지했다.
한 마디로 손발을 묶어놓고 선거를 치렀다. 둘째, 군부는 정치 구도를 1개의 강력한 여당과 여러 개의 힘없는 야당으로 구성한다는 목표 아래 야당의 창당, 대표 등 인선작업은 물론 공천 등 정당운영까지 깊숙이 관여했다. 한마디로 야당을 군부가 만들어 정당정치까지 장악한 상태였던 것이다. 셋째, 언론통폐합을 통해 군부 마음에 들지 않는 언론은 문을 닫게 한 뒤, 살아남은 언론에도 문화공보부가 보도지침을 내려 간섭하던 시기였다. 넷째, 선거를 중선거구제로 치렀다. 전국 92개 선거구에서 각 2명씩 184명의 지역구 의원을 뽑고, 정당별 득표율 및 지역구 의석수에 따라 전국구 의원 92명을 각 정당에 배분했다. 이런 상황에서는 집권당인 민정당은 선거구에서 1등이 아니면 2등이라도 해서 한 자리씩 당선해 지역구 의원의 절반을 차지하고, 여기에 제1당에 유리한 지역구 배분제도까지 보태 국회 과반수 의석을 거뜬하게 차지할 수 있었다.

"나를 시체로 만들어 해외로 부쳐라"…주먹 불끈 쥐고 일어선 YS

이렇게 살벌한 분위기에서 치렀던 제11대 국회의원선거 이후 처음 열리는 12대 선거는 11대와 마찬가지로 중선거구제였다. 다만, 야권 정치인 일부를 정체규제에서 풀었을 뿐이다. 이 정치 규제 해제도 김영삼의 작품이나 다름없었다. 서슬 퍼랬던 5공은 광주민주화운동 3주년을 맞은 1983년 5월18일 김영삼에 의해 균열이 시작됐기 때문이다. 당시 가택연금 중이던 김영삼이 바로 이날 민주화를 위한 전제조건 5개항을 요구 조건으로 내걸고 단식농성에 들어갔다. 다섯 항목은 1)언론 통제의 전면 해제 2)정치범 석방 3)해직 인사들의 복직 4)정치활동 규제의 해제 5)대통령 직선제를 통한 개헌이었다. 민주화를 위한 핵심이었다.

기력이 쇠약해진 김영삼은 5월25일 군부정권에 의해 서울대병원에 강제로 입원하게 되지만 단식은 6월 9일까지 계속됐다. 당시 5월27일과 28일에 이어 29일 세 번째로 서울대 병원의 병상을 찾아와 단식중단과 해외출국을 종용했던 민정당의 권익현 사무총장에게 YS는 “나를 해외로 보낼 수 없는 것은 아니다. 나를 시체로 만든 뒤에 해외로 부치면 된다”라는 말을 했다. 죽음을 각오하며 항거한 셈이다.

국내 언론의 보도는 막았지만 외신 보도까지 막을 수 없었다. 국민은 알음알음으로 김영삼의 단식 소식을 들었다. 당시 대학생이던 나는 실험실에서 미생물을 배양하던 중 ‘국내 언론사의 외신부 기자를 친척을 둔 사람에게 이 이야기를 들었다는 사람에게 전해 들었다는 조교’에게 이 소식을 처음으로 들었다. 아무리 민주화에 대해 보안을 유지하려고 해도 불과 너덧 단계면 전달이 되는 게 세상이 아닌가. 부산 등지에선 바다를 건너 전해오는 일본 방송을 통해 이 소식을 들은 사람이 많았다. 이 사건은 국민의 가슴 속에서 “네 머리도 너를 잊은 지 오래, 내 발길도 너를 잊은 지 너무도 오래”인 민주화에 대한 열망이 다시 꿈틀거리는 계기가 됐다.

이렇게 군부에 타격을 준 김영삼은 이듬해 다시 결정적인 한방을 가했다. 광주민주화운동 4주년과 단식 1주년을 맞은 1984년 5월18일 민주화운동협의회를 창립한 것이다. 민추협으로 줄여 부르던 이 단체는 김영삼계와 김대중계 정치인이 모인 단체로 민주화운동의 구심점 역할을 했다. 김영삼 등 민주화 세력의 노력으로 균열이 가기 시작한 군부 세력은 마침내 1984년 12월 일부 정치인에 대한 규제를 풀 수밖에 없게 됐다. 1983년과 1984년 두 번의 5·18기념일에 행동에 나선 김영삼의 힘이었다.


YS, 29일 만에 만든 선명야당, 창당 25일 만에 제1야당으로

그러면서 처음 맞은 정치 행사가 12대 총선이었다. YS는 이 기회를 적극적으로 이용했다. 본인은 출마하지 못했지만 민주화 동지 이민우를 앞세워 1985년 1월18일 신한민주당을 창당했다. 선명성이 있는 정통 야당을 되살려 관제야당과 군부 정권을 견제해야 한다는 목소리 속에서 정치규제가 해제된 해금 인사들이 민한당을 탈당한 인사들과 손잡고 새로운 야당 신한민주당을 만든 것이다. 신한당이 인기를 모으자 군부는 3월로 잡아도 되는 선거 일자를 엄동설한인 2월12일로 정하면서까지 야당 견제에 나설 정도였다. 선거 결과는 야당 돌풍으로 요약할 수 있다. 집권 민주정의당은 득표율 35.2%로 148석(지역구 87, 전국국 61)을, 신한민주당은 득표율 29.3%로 67석(지역구 50, 전국구 17)을, 민주한국당이 득표율 19.7%로 35석(지역구 26, 전국구 9)을, 한국국민당이 득표율 9.2%로 20석(지역구 15, 전국구 5)을 각각 차지했다. 민정당이 의석 수에선 앞섰지만 지역의원 정수의 52.7%에 해당하는 97석을 야당이 치자했다. 사실상 야당이 승리한 선거인 것이다. 선거 직후 민한당 소속 의원들이 여럿 탈당해 신한민주당에 참여했다. 이로써 신한민주당은 103석의 의석을 가진 거대야당이 됐다. 민정당과 함께 실질적인 양당 구도를 형성하게 됐다. 김영삼의 승부수가 적중한 것이다. 마침 1985년 2월 8일에 있었던 김대중의 귀국도 절묘했다. 양김이 함께 만든 대한민국 민주화의 역사다.

1984년 12월 20일 창당발기인대회를 열고 1985년 1월 18일 창당대회를 열었으니 불과 29일 만에 당을 만든 셈이다. 그런 당을 창당 25일 만에 열린 총선에서 제 1야당으로 만들었으니 민주화 기네스북이 있으면 충분히 오를 만하다.

“김영삼” 연호하며 민정당 후보를 떨어뜨린 부산 유권자들

1979년 김영삼 총재 국회의원 제적 사건 직후 부마사태가 벌어졌던 부산에선 1985년 2월12일의 12대 총선에서 극적인 드라마가 연출됐다. 부산 중구동구영도구에서 신한민주당의 김정길 후보와 신한민주당의 박찬종 후보가 나란히 당선한 것이다. 이는 민주정의당 후보가 이 지역에서 낙선했음을 의미한다. 민정당 후보는 중선거구라는 제도 덕분에 전 지역구에서 1위 아니면 2위라도 당선할 줄 알았지만 부산과 대구에서 한 명씩 낙선한 것이다. 유세 당시 김정길 후보는 “엄마는 나를 찍고, 아빠는 박찬종 후보를 찍자. 민정당에는 한 표도 주지 말자”고 외치며 표 분산을 막은 결과 이 지역에서 민정당 막강한 후보를 떨어뜨릴 수 있었다. 주민들은 “민정당을 떨어뜨린 부산 중구동구영도구”라며 기염을 토했다.

당시 유세는 한 편의 블랙코미디였다. 방학 때라 친한 선배와 함께 매일 같이 합동유세장을 찾아 다녔다. 민정당에선 중앙정부보와 국가안전기획부에 근무하다 민정당 창당에 관여했던 윤석순 후보가 나섰다가 고배를 마셨다. 전두환과 일시 사돈이 됐던 인물이다. 당시 합동유세에서 연설 순서는 당일 제비뽑기로 했는데 웬일인지 매번 김정길 후보와 박찬종 후보가 윤석순 후보보다 먼저 하게 됐다.웬일인지 민주국민당의 노차태 후보도 뒤로 뽑혔다. 그러자 당시 유세장인 운동장을 가득 메웠던 지역 유권자들은 두 야당 후보의 연설이 끝나면 약속이라도 한 듯이 우르르 학교를 빠져나갔다. 당시 남일국민학교에서 열렸던 연설회가 그렇게 끝나더니 이어 보수국민학교와 봉래초등학교, 동광초등학교 등에서 열린 연설회에서도 그런 일이 반복됐다. 한마디로 국부독재에 대한 반감의 표출이자 하나의 저항이었다. 운동장을 빠져나가는 사람들의 표정이 그렇게 밝을 수가 없었다. 운동장을 빠져나가면서 아무도 시키지 않았는데도 “김영삼”을 연호하기도 했다. 당시는 이런 연호를 하기에 눈치가 보이던 시절이었다. 유세장 곳곳에 경찰이 보였기 때문이다. 아는 사찰 담당 경찰을 만나 인사를 나누기도 했다. 대학 도서관 열람실에 학생이 뛰어 들어와 유인물을 뿌리고 “학우 여러분, 전두환 정권은 광주에서”라고 말을 시작하면 내 옆 자리에서 자고 있던 사람이 순식간에 달려 나가 “학살”이란 말이 나오기도 전에 손으로 학생의 입을 막고 끌고가는 걸 본 지 불과 몇 년이 지나지 않았을 때였다. 내 옆자리에서 엎드려 자고 있던 사람은 학생이 아니고 학원에 상주하던 사찰 경찰이었던 것이다.

그런 좋지 않은 기억을 반추하면서, 유세장 밖에서 운동장 안을 잠시 들여다보자 희한한 광경에 눈에 들어왔다. 나중에 연단에 오른 민정당의 윤 후보는 “여러분의 인기를 한 몸에 받고 있는 윤석순입니다”라며 연설을 시작했지만 그의 앞에는 동원된 것을 표시하는, 똑같은 햇빛가리래 모자를 쓴 아주머니 평생동지(당시 민정당에서는 당원을 그렇게 불렀다) 수십 명이 쓸쓸하게 앉아 “윤석순”을 연호할 뿐이었다. 웃음이 터져 나오지 않을 수가 없었다. 선거 결과는 100% 예측됐다. 사태가 급박해지자 부산 발전을 온갖 공약이 쏟아졌고, 그럴 때마다 김정길과 박찬종 후보는 “윤석순씨는 (당시 임명직이던) 부산 시장을 시키고 국회에는 우리 두 사람을 보내라”며 응수했다. 막판에 전두환까지 나서서 응원했지만 소용없었다. 유권자들은 그렇게 민정당을 떨어뜨렸다. 김영삼 단식사건 때부터 기다렸던 순간이었다. 민주화는 풀뿌리에서 움트고 있었다. 김영삼의 승부수를 받혀준 힘이다.

YS, '정치인 노무현'을 세상에 내놓다

승부사 김영삼은 제6공화국 때인 1988년 4월 26일 13대 총선에서 노무현을 정치인으로 발탁했다. 노무현은 당시 부산 재야의 대부 김광일 변호사(1939~2010, 당시 엠네스티 부산지부장으로 활동했으며 13대 의원과 김영삼 대통령 비서실장을 지냄)와 함께 일하던 인권변호사였다. 부림사건이나 이애 대한 변론은 나중에 알려진 것이고, 당시로선 부산을 대표하던 인권 변호사 김광일 변호사와 함께 움직이는 인권변호사, 민주인사 정도로 알려졌다. 1987년 6월항쟁 당시 매일 부산역 광장에 모인 시위인파 앞에서 확성기를 잡았던 인물 중의 하나였다. 노무현 변호사는 당시 법원이 있던 서구 토성동에서 문재인 변호사와 법률사무소를 함께 운영하면서 서면에 부산노동상담소를 열고 있었다. 이 상담소는 그해 7~8월의 노동자 대투쟁 당시 지역 노조 결성 작업 등을 도우면서 구심점이 됐다. 노무현 변호사의 부산상고 후배인 이재영 등 활동가들이 밤낮으로 뛰며 노조를 설립하려는 사람에게 실무 작업을 지원했다.
노조를 만들려면 규약 등 여러 가지 문서 작성이 필요했는데 이런 실무를 도와준 것이다. 이 사무소는 지역 운동권 학생들이 머물던 사랑방이기도 했다. 나중에 유명해진 여러 사람이 여기에 머물렀다.

그런 노무현은 13대 총선에서 아파트 밀집지로 중산층 거주지역인 부산 남구(이후 남구와 수영구로 분리)에 출마를 희망했다. 하지만, 노무현의 '강단'을 눈여겨봤던 YS는 부산 동구에 그를 출마시키는 승부수를 던졌다. 동구에는 부산고 출신으로 5공 출범 당시 이른바 세허씨(육사17기의 허삼수 대령과 허화평 대령, 그리고 조선일보 기자 출신의 허문도)의 하나였던 허삼수 후보와 맞붙으라는 것이었다. 동구는 오랫동안 산동네로 유명한 서민 주택 밀집지였다. 이 지역은 원해 이승만 시절부터 유명한 야당 지역이었다. 이승만 대통령이 부산에 와서는 동구 산동네 쪽으로 고개도 돌리지 않았다는 이야기가 회자했을 정도였다. 하지만, 당시로서는 민정당 지지지역으로 통했다. 가난한 동네이니 돈 선거가 일부 통할 수 있었기 때문이다. 가루빨랫비누인 하이타이나 사각형 빨래 비누가 박스째로 돌아다녔다. 게다가 허삼수는 당시 5공의 창업공신이자 실세였다. 동구는 그가 졸업한 부산고가 위치한 지역이었다. 동구에서 노무현의 승리를 기대하던 사람은 많지 않았다. 허삼수가 워낙 거물이었기 때문이다.

하지만 ‘사람 사는 세상’이라는 구호와 함께 점퍼 차림으로 허름한 산동네를 배경으로 위쪽을 보면서 찍은 노무현의 선거 벽보 사진은 강렬했다. 정치인 노무현의 이미지를 분명히 보여줬다. 낮은 곳에서 산동네 사람들과 함께하겠다는 의지로 읽혔다. 국회의원 출마를 넘어 더 먼 곳을 보는 사람의 사진 같아 보였다. 일부에선 YS가 너무 강자인 허삼수에게 이길 만한 야당 후보가 없으므로 신인인 노무현을 맞붙이기로 한 게 아닌가 짐작하기도 했다. 김영삼도 대단한 승부사였지만 노무현도 민주화에 대한 의지와 신념의 화신이었다. 노 후보는 당시 유권자들에게 ‘리틀 김영삼’이라는 소리를 들으면서 독하게 선거운동을 뛰었다.

나중에 1988년 여름, 여의도 한 아파트에 있던 초선의 노 의원 댁에 당시 친하게 지내던 이성도 대우정밀 노조위원장 등과 함께 찾아간 적이 있다. 아들용으로 마련했다는 영어회화 공부전용 테이프 꽂이 책상을 보며 인간적인 면을 확인할 수 있었다. 노 의원은 당시 새로 뽑았다는 강원도와 연세대 출신과 충남과 고려대 출신의 비서관과 함께 술을 마시던 중 심장에 남는 말을 한마디 했다. 자신도 국회에 진출하고 싶다는 이 위원장에게 “내가 얼마나 용을 쓰고, 얼마나 돈을 쓰고, 얼마나 독하게 해서 국회의원 된 줄 모르고…” 그 말을 듣는 순간 나는 정말 YS가 사람 볼 줄 안다고 생각했다. 노 의원에겐 정치를 향한 강력한 의지와 동기가 있었던 것이다. 단순히 국회의원 한 자리 하려고 여의도에 입성한 사람이 아니었다. 그렇게 지독하게 선거운동을 한 결과, 내 기억으로는 당시 부산에서는 서구의 김영삼이나 중구의 김광일 후보보다 더 인기가 있었다. 이름 있는 두 사람의 승리는 확실했지만 무명의 노 후보는 희박한 확률을 향해 도전하고 있었기 때문이었을 것이다. 그런 도전은 이후로도 계속돼 대한민국 역사의 한 장을 만들었음은 모두 잘 아는 사실이다.

13대 총선 유세에서도 연설 순서는 당일에 추첨으로 결정됐다. 유세가 벌어지면 유권자들은 학교 운동장에 모였다가 노무현의 연설이 끝나면 민정당의 허삼수가 등장하기도 전에 운동장을 썰물처럼 빠져나갔다. 12대의 재현이었다. 부산진 시장 근처의 성남 초등학교에서 열린 연설회에 참석했다가 우르르 빠져나가면서 그렇게 통쾌할 수가 없었다. 민정당과 노태우 정권에 대한 반발의식을 그렇게 표현했다. 나가면서 “김영삼”을 연호하기도 했다. 87년 대선 때 많이 외쳤던 구호였다. 당시 동구에서 직장 생활을 하던 나는 매일 같이 점심시간이면 유세장을 다녔다. 노 후보의 열변을 듣느라 점심을 걸러도 행복하던 시절이었다. 유세장에 모이는 사람이 갈수록 늘었다.

당시 노무현은 아직 무명의 정치인이었다. 한국 현대사에 그렇게 굵은 족적을 남길 줄은 아직 몰랐을 때였다. 그는 그런 시련을 거쳐 국회에 들어갔다. 무명의 정치인 노무현이 5공 실세 허삼수를 무너뜨린 사건이었다. 그 이후 정치인 노무현이 간 길은 잘 알려진 대로다. 3당 합당에 반대해 YS를 등졌다. 하지만, 그런 정치인 노무현을 발탁해 대한민국 역사를 쓰게 한 것도 YS였음을 잊어서는 안 된다. 승부사 YS는 충성스러운 참모나 후계자만 발탁한 게 아니라 이 나라 정치를 끌고 갈 지도자까지 발굴한 것이다. 대한민국 민주화의 역사를 만든 YS의 명복을 빈다. 하늘나라에서 김대중 대통령과 노무현 대통령을 모두 만나 회포를 풀기를 기원한다. 서로 하실 말씀이 많을 것 같다.

채인택 논설위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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