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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스페셜 칼럼 D] 486세대 기자가 쓰는 YS 추모사

중앙일보 2015.11.22 16:1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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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진 중앙포토]


필자는 고(故) 김영삼 전 대통령(YS)과 관련해 특종을 한 차례 한 바 있다. 지난해10월 YS가 서울대 병원에 입원한지 1년반만에 퇴원한다는 사실을 캐치해 중앙일보 일요판인 중앙 SUNDAY에 보도한 것이다. 그 직후 아들 김현철씨가 자신의 페이스북에 "아버지가 며칠뒤 퇴원한다"는 글을 올려 이를 확인했다. 다른 언론들이 앞다퉈 따라오긴 했지만 빅뉴스는 되지 못했다. 하지만 개인적으론 큰 보람을 느꼈다.

YS라는 우리 현대사의 거목이 한때 사경을 헤매다 살아난 순간을 가장 먼저 보도했다는 자부심이었다. 군정을 종식하고 문민정부를 출범시켜 나라의 민주화에 이바지한 그의 공로는 3당합당과 IMF 외환위기 같은 '과(過)'로 덮여질 성질의 것이 아니라고 생각해왔다. 그렇기에 다른 언론들이 관심을 보이지 않았던 YS의 장기입원을 나름 열심히 취재한 끝에 퇴원사실을 처음 보도하게된 것이었다.

반기문 유엔 사무총장이 YS의 병실을 찾아와 "대통령께서 저를 요직에 임명해주신 덕에 유엔의 수장까지 올라갈 수 있었다"고 감사해한 일, 전직 대통령이 장기입원중인데도 청와대에서 찾아오는 이가 드물어 측근들이 서운해한 일, YS가 입원한 서울대 병원 꼭대기의 VIP 병실은 전두환 정권이 1983년 목숨을 건 단식에 들어간 YS를 강제 입원시켰던 바로 그 방이란 사실 등은 취재를 통해 알게된 덤이었다.

만 47세로 486세대 막내격인 필자는 대학교 1학년때 YS를 길거리에서 처음 보았다. 87년6월 어느날. 필자는 을지로를 메운 시민들과 함께 "호헌철폐!독재타도!"를 외치고있었다. 매캐한 최루탄 내음속에 누군가의 외침이 들려왔다. "김영삼이다, 김영삼!" 눈을 돌려보니 돌과 화염병, 최루탄으로 범벅된 대로변 한가운데 검은색 그라나다 차 한대가 멈춰서있고, 머리색 희끗한 남자가 내려 손을 흔드는 모습이 들어왔다.

"와! 김영삼!" 시민들이 일제히 박수를 치며 환호했다. 그는 환하게 웃고있었다. 뭐라고 구호를 외치는 것 같았지만 들리지 않았다. 이어 그는 "우리는 승리합니다,민주주의는 승리합니다" 로 기억되는 말을 남기고 사라졌다. 그뒤에도 시민들의 환호는 오래동안 이어졌다.

당시 내가 다니던 대학의 운동권 선배들은 YS와 김대중 전 대통령(DJ)을 '단계적으로 타도해야할 계량주의자'로 분류했다. YS와 DJ는 학생·노동자·농민·도시빈민이 군사독재와 싸우기 위해 잠시 연합중인 파트너지만, 최종적인 민중해방 단계에선 숙청해야할 보수야당 지도자일 뿐이란 게 그들의 논리였다. 하지만 캠퍼스 아닌 거리에서 만난 YS와, 그에게 환호하는 시민들의 모습은 그런 생각이 얼마나 비현실적인 것인지 깨닫게해줬다. 정치는 마르크시즘 교과서가 아니라 현실이었고, YS는 그런 현실 정치에 굳건히 뿌리박은 대중의 리더였던 것이다.

필자와 YS의 두번째 인연은 6년뒤 대학을 졸업하고 기자가 되면서였다. 93년3월, 수습 딱지를 떼고 사회부에 배치된 필자는 막 대통령이 된 YS가 공직자 재산공개를 전격 실시하며 불붙은 '사정 정국'을 취재하느라 밤낮없이 뛰어야했다. 고위 공직자들의 부적절한 재산축적 과정이 줄줄이 드러나면서 열흘만에 장관 3명이 옷을 벗었다. YS가 임명한 김상철 서울시장도 취임 7일만에 물러나 역대 최단명 시장이란 불명예를 안았다.

끝없이 불거지는 고관대작들의 부패상에 치를 떨면서 "YS가 자리를 맡긴 사람들이 이 정도 밖에 안되나"는 의문이 들었다. 하지만 "그래도 문민 대통령이니 제 살을 깎으면서 개혁을 할 수 있는 것"이란 생각에 내심 YS를 응원했다. 전광석화같은 군 인사로 하나회를 숙청하고, 금융실명제를 기습 시행하는 모습을 보고 그런 마음은 더욱 강해졌다. 국민은 이런 YS에 헌정 사상 전무후무한 90%대 지지율을 안겨줬다.

대한민국도 민주주의 모범국가가 될 수 있다는 자신감이 처음으로 국민의 가슴에 깃든 것도 이때였던 것 같다. 논란이 없지 않았지만 거침없는 '역사 바로 세우기' 행보도 국민들을 후련하게 해줬다. "일본의 버르장머리를 고쳐주겠다"며 총독부 청사를 폭파해버리고, 전두환·노태우를 구속해 12.12 쿠데타와 광주 과잉 진압, 비자금 조성을 단죄한 건 YS 특유의 뚝심이 아니면 불가능했을 것이다.

YS가 '과'도 적지 않았던 것은 모두가 아는 일이다. 주변 관리에 실패해 아들을 감옥에 보내야했고 일관성없는 대북정책으로 안보위기를 자초했다. 특히 글로벌 경제의 구조적 변화에 제대로 대처하지 못해 IMF 외환위기를 초래한 것은 그의 가장 큰 실책으로 꼽힌다. 침통한 표정으로 "아들의 잘못은 곧 애비의 잘못"이라는 대국민 사과문을 낭독한뒤 고개를 숙이는 대통령을 보며 비애를 느끼지않은 국민은 없을 것이다. 필자 역시 마찬가지였다.

필자는 그 6년뒤 YS를 처음으로 면전에서 만나 악수를 했다. 워싱턴 특파원으로 재직중인 2004년11월. YS가 빌 클린턴 전 미국 대통령 도서관 개관식 참석차 미국을 찾으면서다. 당시 워싱턴 조야는 북한 인권 문제를 정면으로 비판하지 못하고 어정쩡한 태도로 일관한 노무현 정부에 대해 비판의 목소리가 높았다. YS는 워싱턴에서 탈북자들의 실상을 다룬 영화 '서울기차'(Seoul train)를 미국 의원들과 함께 관람하며 노무현 비판 대열에 가세했다. 미 상원 청사로 기억된다. 필자를 비롯한 특파원들이 행사를 마치고 나오는 YS를 둘러쌌다. 필자는 YS가 생각하던 것보다는 건강한 모습이어서 마음이 놓였다. 특유의 장난스런 미소를 지으며 "북한 인권에 침묵하는 이는 절대 안되는 기라"를 연발하는 그를 보며 "역시 YS야"라는 생각을 했다.

그 YS가 88세를 일기로 영면했다. YS는 역대 대통령 평가 여론 조사에서 대개 하위권에 머물렀다. 1위는 박정희가 독점하고, 2위는 DJ나 노무현이 차지하는 게 보통이다. 지역과 이념으로 양극화된 우리 사회상과 무관치 않을 것이다. 하지만 YS의 별세는 상식과 순리를 존중하는 대다수 국민들의 뇌리에 그가 어떤 지도자로 각인돼있는지를 드러내준다.

"공과 과가 뚜렷한 분이시라 때로 미워하기도 때로 그리워하기도 하였습니다. 그래도 과거 권력자들과 달리 대통령을 마음껏 욕해볼 수 있는 문화를 열어주시고, 비판하는 이들을 탄압하지 않으셨던, 민주 시대를 연 대통령이셨죠. IMF가 너무 커서 그렇지 다른 업적들 모르는 것 아닙니다. 건전한 민주주의속에 상대진영과 싸우면서도 비판을 들을 줄도 알았던 당신을 존경하고 추모합니다…." 어느 네티즌의 애도사다. 동의하는 국민들이 적지 않을 것이다. 필자도 그중 한명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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