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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TONG] 마산에 ‘위안부 소녀상’ 대신 주먹 불끈 쥔 ‘다짐비’를 세웠습니다

온라인 중앙일보 2015.11.22 11:59
지난 8월 27일, 경남 창원에도 창원시민들의 성금으로 일본군 위안부 추모조형물인 ‘인권 자주 평화 다짐비’가 세워졌다. 창원지역에 세워진 추모조형물에는 다른 지역에 세워진 ‘위안부 소녀상’과는 달리 ‘다짐비’라는 이름이 붙었다. 당시 일본군 위안부로 끌려간 여성들 모두가 소녀는 아니었으므로 조형물 이름에 ‘소녀’라는 단어가 들어가는 것이 맞지 않다는 생각에 ‘인권 자주 평화 다짐비’로 정한 것이다. 다짐비는 뼈아픈 역사를 절대 잊지 말고 기억하자는 다짐과 미래에는 인권 자주 평화의 새 역사를 함께 만들자는 다짐을 하자는 의미에서 붙여진 이름이다.

하석원·윤귀화·한경희·조란주 등 4인의 창동예술촌 작가가 함께 공동으로 작업하였고 제작 기간은 5개월 가량 소요됐다. 다짐비는 위안부로 참혹한 고통을 겪은 피해자들을 통해 다시는 이런 비극적인 역사를 되풀이해선 안 된다는 결연한 의지를 표현하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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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권·자주·평화 다짐비’는 청동 재질의 소녀상으로, 높이는 약 154cm이다. 두 손을 꽉 쥐고 입을 굳게 다문채 정면을 응시하는 이 다짐비는 타 지역에 건립된 ‘평화의 소녀상’과는 다른 분위기를 풍긴다.


다짐비 건립을 가로막은 부끄러운 시민의식

다짐비가 건립되기까지 2년간 많은 우여곡절이 있었다. 사업을 주도한 일본군위안부 추모조형물건립추진위원회(이하 추진위)는 2014년 세계여성의 날(3월 8일)에 제막식을 개최하는 것을 목표로 모금 운동을 시작했다. 하지만 모금운동은 생각보다 순탄치 않아 건립 시기가 몇 차례 연기된 끝에 천주교계와 창원시의 지원으로 총 1억 1000만 원을 마련할 수 있었다.

그러나 이번에는 조형물 건립 장소가 발목을 잡았다. 시로부터 시유지인 마산합포구 오동동 문화광장 부근에 대한 최종 사용승인을 받아 조형물 제작까지 마쳤으나 일부 상인들이 미관상의 이유를 들어 격렬하게 반발했다. 오동동이 경남 창원시 마산의 대표적인 유흥가라는 점 때문에 인근 상인들은 건립 장소가 적절치 못함을 지적하며 “위안부 소녀상은 전통술집거리가 아닌 넓은 공원 등으로 설치해야 한다”고 주장했다.

이러한 난항을 겪자 경기도 화성시가 추모상을 인수해 해외 자매·우호도시에 이를 건립하겠다고 나서기도 했다. 창원시민들의 모금운동으로 제작된 추모비가 창원시도 아닌 ‘화성시’에 의해 타국에 건립될 뻔 한 것이다.

상인들의 반대에도 다짐비가 오동동에 세워진 이유

상인들의 거센 반발에도 불구하고 다짐비를 마산의 대표 유흥가인 오동동에 건립한 이유는 무엇이일까? 이에 대해 추진위는 “일제강점기 마산은 일본군 위안부 강제 동원을 위한 중심 전진기지이자 중간집결지였다”며 “이 일대에는 일제 강점기 주민운동의 센터였던 마산민의소와 각종 혁신정당 및 사회운동단체가 있었으며, 해방 후에는 3·15의거, 부마항쟁, 6월 민주항쟁 등 현대사의 흐름을 바꾼 사건들이 일어난 곳으로서 창원지역 그 어느 곳보다도 역사성이 깊은 곳이기 때문”이라고 밝혔다.

또한 오동동 문화의 거리는 차 없는 거리로 혼잡하지 않고 사람들의 눈에 쉽게 잘 보이며, 시민문화광장 입구이기에 시민과 늘 함께 할 수 있어 대중접근성이 높은 곳이기도 하다. 건립 장소의 주변에는 3·15의거 발원지, 부마민주항쟁과 6월 민주항쟁이 일어난 불종거리와 육호광장, 3·15의거탑, 김주열 열사 시신 인양지 등 민주화의 상징적 장소와 인접해 있어 근현대사 탐방코스로서의 가치와 교육연계성 또한 좋은 곳이다.

건립 과정에서 많은 난항을 겪은 다짐비. 다짐비의 제작 작가 선정 방식과 제작 과정은 어떠했을까. 제작에 직접 참여한, 마산에서 문화창작공방 마재고개14를 운영 중인 조란주 작가에게 들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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다짐비 제작에 참여한 작가들. 왼쪽부터 하석원·한경희·조란주·윤귀화 [사진제공=조란주 작가]


-다짐비 제작에는 어떻게 참여하게 되었나요?

“경남 위안부 추모비 건립 위원회는 다짐비 공모를 하면서 공모를 희망하는 작가나 단체를 위한 워크숍을 꾸준히 진행해왔습니다. 작가라면 정확한 역사적 사실을 바탕으로 소녀상을 만들어야하기 때문이었죠. 여기 참여한 결과 치열한 경쟁 끝에 저희 마재고개가 제시한 모형과 PPT가 당선됐습니다. 전공이 다른 작가가 참여해 일을 분담했습니다. 하석원 작가는 전반적인 형태 작업을, 저는 기초뼈대 작업과 모델연구를 맡았고, 한경희 작가는 설치를 위한 정보수집을, 윤귀화 작가는 정보수집과 PPT제작을 맡았습니다.”

-다짐비에는 무엇을 담으려 했나요?

“저희는 다짐비를 통해 민주항쟁의 발원지인 마산의 정신을 살려, 비록 나라가 힘이 없어 빼앗겨야만 했지만 그 것들이 결코 부끄러운 일이 아니었음을 알리고 싶었습니다. 그 분들을 지키지 못한 ‘나라’가 더 창피한 것이 사실이죠. 또한 지금의 우리가 제대로 알아야만 하는 것을 다짐비 속에 담아내고자 했습니다. 비록 몸은 빼앗기고 짓밟혔지만 정신만은 결코 내어주지 않겠노라는 할머님들의 다짐을 말입니다. 또한 일본의 반성과 사과가 왜 필요한지, 그리고 앞으로는 또 다시 이러한 비극이 일어나서는 안 된다는 것을 다음 세대에게 알리고자 하는 위안부 할머님들의 의지를 표현하고자 하였습니다. 다짐비가 세워진 장소는 유동인구가 많은 곳입니다. 누구나 와서 볼 수 있고 그 분들에게 목례를 할 수 있는, 어루만질 수 있는 그런 장소이죠. 그래서 단을 올리지 않았습니다. 언제나 함께 그 아픔을 나누고자 했기 때문이죠.”

-인근 상인들의 반발이 다짐비 건립의 발목을 잡았었는데요.

“건립에 반대한 인근 상인이 여러 집이 아니라 한 집이었습니다. 그 집의 친구, 친척, 종업원까지 합세하여 반대의 목소리를 냈습니다. 제막식 날에도 식전까지 시끄러웠죠. 술맛 떨어진다는 것이 가장 큰 이유였습니다. 저희 작가들은 동요하지 않고 차분히 기다렸습니다. 건립에 대해 찬성하는 분들이 훨씬 많았으니까요. 그 점이 저희에게는 큰 힘이 되었습니다. 광복 70주년을 맞아 가게마다 휘날리는 태극기를 보며 그런 생각이 들더군요. 건립에 반대하는 분들은 오동동이 유흥가이기 때문이라고 말씀하시는데, 그럼 유흥가에는 태극기도 달지 말아야 하지 않을까요? 술을 마시고 술을 파는 사람 모두 대한민국 사람임에도 스스로를 부끄러운 일 하는 사람으로 만들어버리는 것이 참으로 이상하게 느껴졌습니다.”

-제작과정은 어땠나요? 의견 충돌은 없었는지요.

“공모에서 당선이 되었지만 제작과정은 아주 까다로웠습니다. 위원회와 많은 부분을 조율해야했죠. 얼굴·머리·동정·한복·길이 등에 대한 위원님들의 의견도 모두 달랐기 때문에 모든 분들을 충족시키기 위해 많은 만남과 제안·수정을 반복했습니다. 물론 작가들끼리는 단합이 잘 되었어요. 날짜에 맞게 제작도 마쳤지만 반대하는 상인들 때문에 설치 날짜를 변경하면서 예상 밖의 비용이 많이 들었습니다. 물론 다짐비 건립은 그 자체만으로도 큰 의미가 있는 일이라 그런 비용들이 아깝지는 않았죠.”

-제막까지 마친 지금, 작가로서의 소감은 어떤가요?

“잊혀지고 소외되고, 스스로 수치심에 세상 밖으로 나오지 못했던 할머님들, 그 분들께 다짐비가 조금이나마 힘이 될 수 있다는 생각에 저희들 모두 뿌듯해 하고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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현재 전국에는 총 24개의 위안부 추모 조형물이 세워져있다. 전국 각지에서 건립 활동이 이어지고 있어 위안부 추모 조형물의 수는 더욱 늘어날 것으로 보인다. 길을 걷다 이 ‘여성’들을 만나게 된다면 잠시 멈춰서 그들의 이야기에 귀 기울여 보는 것은 어떨까? 사회적 편견과 무관심으로 가족들에게도 숨겨야 했던 그들의 이야기를 말이다.

글·사진=오영란(매산여고 2) TONG청소년기자, 청소년사회문제연구소 매산여고지부

‘TONG 우리 역사 바로 알기 캠페인’-문화재청·문화유산국민신탁이 함께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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