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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나회척결과 금융실명제,또 문민화 YS의 업적들

중앙일보 2015.11.22 11:16
IMF 외환위기와 국가부도 사태라는 큰 그늘에 가려져 있긴 하지만 김영삼 정부도 임기 초반의 개혁 드라이브를 통해 많은 일들을 했다.

문민 정부를 표방하고 집권한 김 전 대통령은 본인이 설정한 첫 과제는 “군사독재가 남긴 악폐를 말끔히 쓸어내 이 땅에서 군사 쿠데타의 망령을 영원히 지워버려야 한다”는 것이었다. 이른바 문민화였다. 그는 취임 첫날 청와대 앞길과 인왕산 등산로를 개방했다. 등산로 개방은 1968년 김신조 등 무장공비 습격사건이후 25년만이었다. 청와대 본관 대통령 집무실의 초대형 금고도 해체했고, 청와대 정원인 녹지원의 골프 연습장도 철거했다. 그는 이어 청와대에 입성한 지 열흘만인 1993년 3월5일 궁정동과 청운동 삼청동 등의 안전가옥을 철거했다. ‘밀실정치와 공작정치의 상징’을 먼저 허물고 사회를 문민화하겠다는 취지에서였다.

◇하나회 척결=그 이후 전격적으로 이뤄진 것이 하나회 척결이다. 그는 회고록에서 하나회를 ‘우리군 내부에 엄존하는 현실적 쿠데타 위협세력’으로 규정하며 하나회 해체에 대해 “길게는 5ㆍ16이후 32년, 짧게는 1980년 신군부 등장이후 10여년간 육군의 골격을 뒤집는 혁명적 인사”라고 자평했다. 취임한 뒤 열흘 남짓 지난 3월8일 권영해 국방장관을 청와대로 불렀다. 몇시간 동안의 극비 작업끝에 하나회 소속인 김진영 육군참모총장과 서완수 기무사령관을 경질한 것이 하나회 척결의 시작이었다. 그리고 그 다음달엔 하나회 출신 수도방위사령관과 특전사령관를 비 하나회 출신으로 교체했다.

이후 ‘5ㆍ24 숙군’이라고 불리는 군 고위직 인사를 통해 하나회 회원들중 3성 장군 이상 전원과 소장급 일부가 군복을 벗었고,소장 이하도 한직으로 밀려났다. 사실상 하나회의 완전 해체였다. YS는 “정치군인과 동거하거나 군을 마음대로 통수하지 못할 것이라면 차라리 대통령을 그만두는 게 낫다”는 게 당시의 다짐이었다고 회고했다.

◇재산 공개와 "돈 안받겠다"선언=그는 취임 3일째인 2월 27일 주재한 첫 국무회의에서 '고위 공직자 재산 공개'를 선언했다. 하지만 이 조치는 곧바로 부메랑이 됐다. 서울 시장과 법무·건설·보사부 장관의 재산이 논란을 낳았고, 결국 3월초 이들을 곧바로 교체해야 했다. 이후 논란은 국회로 번져 김재순·박준규 의원에게로 불통이 튀었다. 김재순이 '토사구팽'이라는 말을 남긴 뒤 의원직을 던졌고,박준규는 민자당을 탈당했다.

이후 공직자 윤리법 개정안이 1993년 5월 국회를 통과하면서 정무직 및 1급 이상의 공직자는 본인과 배우자 직계 존비속의 재산을 관보에 공개하게 됐다. 그는 취임직후 첫 청와대 출입기자들과의 오찬 간담회에서 “정치자금은 받지도 주지도 않겠다. “5년동안 어떠한 사람에게든 돈을 받지 않겠다. 떡값이 아니라 찻값이라도 받지 않겠다”고 약속했다. 훗날 그는 회고록에 "재임중 한 푼도 받지 않았고, 국회의원을 포함해 누구에게도 돈을 준 적도 없다”고 썼다. 정치개혁분야에선 선거공영제를 확대시켰다. 대선과 국회의원 선거 비용을 각각 200억원과 5300만원이라는 법정제한액으로 묶고, 직계 존비속과 회계 책임자에겐 불법 연대 책임을 묻고 합동연설회의 횟수를 제한하는 등의 통합 선거법을 처리했다.

그는 임기내내 청렴한 이미지를 쌓는데 공을 들였다. 'YS 칼국수'로도 불린 '청와대 칼국수'가 그 상징이었다. 고위공직자 재산공개가 발표된 첫 국무회의 직후 각료들과의 오찬 메뉴가 칼국수였다. YS가 이날 “청와대에서 점심하자고 불러 대단한 줄 알고 오셨겠지만, 오늘 메뉴는 칼국수 입니다. 오늘뿐 아니라 앞으로도 칼국수 아니면 설렁탕일 테니 그렇게들 아십시오”라고 하자 참석자 전원이 놀랐다.이후 칼국수는 청와대 오찬 메뉴로 굳어졌다. 밀 재배 농가와 장기 구입 계약을 맺었고, "청와대 식사비가 5분의 1로 줄었다"는 이야기도 나왔다.

"우리 밀로 만든 칼국수는 끈기가 없어 국수 가락이 뚝뚝 끊어져 숟가락으로 먹는 게 나을 정도였다. 그래서 고수들의 비법을 전수받아 콩가루를 넣은 ‘청와대 칼국수’가 나왔다"고 YS는 설명하곤 했다.

◇금융실명제=금융실명제는 취임 첫해였던 1993년 8월12일 저녁 7시45분 특별담화문 ‘금융실명제 및 비밀보장에 관한 긴급재정경제명령’ 으로 전격 발표됐다. 당시 신문들의 제목은 ‘목요일 저녁의 충격’이었다.

청와대를 비롯한 권력의 핵심부에서도 극소수만이 사전에 알았던 철통보안속에 준비가 진행됐다. “기득권의 저항을 피하기 위해선 국회에서 법으로 만들기보다 대통령 긴급 명령이란 형식이 바람직하다”는 판단이었다고 그는 훗날 회고록에 썼다. 또 "당시 1993년 8월말 가명이나 차명 계좌 의 자금은 33조원으로 금융자산 330조의 10%,총통화 1백조원의 약 33%였다"며 고 했다.이경식 경제부총리와 홍재형 재무장관이 총지휘했다.

20명의 실무팀은 과천 주공아파트 한채를 두달간 빌려 합숙을 하며 관련 내용을 준비했다. ‘현관문을 나설 수 없다’,‘창문가에서 서성대지 않는다’등의 철저한 수칙속에서 생활한 실무팀 공무원들은 ‘금융 실명제’작업명을 ‘남북 통일 작전’이라고 명명했다. 전격적으로 발표된 내용은 ‘모든 금융 거래를 실명으로 해야 하고, 비실명으로 거래한 금융자산의 소유자는 2개월내에 실명으로 전환해야 하고, 5천만원까지는 자금 출처 조사가 면제된다’는 내용이었다.

◇역사바로세우기와 법정에 선 전두환 노태우='역사바로 세우기'는 YS가 공을 들인 화두였다. 먼저 '4·19의거'를 '4·19 혁명'으로 격상했고, 강북구 수유동의 4·19 묘지가 국립묘지로 승격됐다. 광화문의 조선총독부 건물을 철거하고 경복궁을 복원했다. 12·12에 대해선 "하극상에 의한 군사 쿠데타적 사건"으로 규정했다. 취임 3년째인 1995년 10월19일 민주당 박계동 의원이 "신한은행 서소문 지점에 3백억원이 3개의 차명계좌에 1백억원씩 나뉘어 예치돼 있다"고 폭로하며 '노태우 비자금 사건'이 터졌다. '성공한 쿠데타도 처벌된다'며 12·12와 5·18 주모자들의 처벌근거를 담은 5·18 특별법이 제정되면서 전두환 전 대통령도 구속됐다.

◇부패와의 전쟁=취임초 동화은행 비자금 사건과 슬로머신 사건을 계기로 '부패와의 전쟁'에 돌입했다. 또 취임 2년차말 정부조직 개편에선 경제기획원과 재무부가 재정경제원으로 통합됐고, 체신부가 정보통신부로 바뀌었다.또 환경청을 환경부로 격상시켰다. 1995년 지방자치 선거를 무난히 치러내면서 지방자치제를 34년만에 부활시켰다. 또 1년간의 유예를 두고 명의신탁 부동산을 실명으로 전환케 하는 부동산 실명제도 그의 임기때 이뤄졌다. 한국을 선진국들의 모임인 OECD(경제협력개발기구)에 가입시켰고, 일본에 비해 뒤늦게 뛰어든 월드컵 유치 경쟁속에서 결국 2002년 한일 공동 월드컵 개최가 성사되도록 막후 지원을 했다.

또 97년 2월 황장엽 노동당 국제담당 비서의 망명때 주한 중국대사를 청와대로 불러 설득하고,장쩌민 국가주석에게 친서를 보내 망명 67일만에 황 비서가 필리핀을 거쳐 안전하게 한국으로 망명하도록 외교적 노력을 폈다.

그의 재임시인 96년 4월 치러진 15대 총선은 지금까지도 '참신한 개혁 공천'의 모범사례로 꼽힌다. 이명박·정의화·김문수·홍준표·이재오 등을 정계로 진출시킨 이 공천과 관련, YS는 회고록에서 "강삼재 신한국당 총장과 청와대 이원종 정무수석이 공천의 실무 작업을 맡았고, 나는 강 총장과 1주일에 한번 이상 직접 만나고 하루에도 몇번씩 전화로 보고받았다. 한사람 한사람씩 놓고 최종결정을 해 갔다"고 술회했다. 그는 "개혁지향적인 참신한 젊은 인재들이 국회에 들어가 새로운 바람을 일으켜 주기를 기대했다"고 했다. 신한국당은 이 선거에서 수도권 대승을 기반으로 139석을 얻어 제1당이 됐다.

서승욱 기자 sswook@joongang.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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