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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치] DJ "거산 화해합시다"…YS "후광이 사과하시오"

중앙일보 2015.11.22 02:21
김영삼(YS)과 김대중(DJ)은 필생의 라이벌이었다. YS의 정치 역정은 DJ의 존재를 빼놓고선 설명하기 힘들다. 두 사람은 정치 초년병 시절부터 계파가 달랐다. 4.19 직후 집권한 민주당에서 구파(윤보선)와 신파(장면)의 대립이 본격화됐을 때 YS는 구파에, DJ는 신파에 속했다.

야당의 유망주였던 두 사람이 처음으로 맞부딪힌 건 1968년 신민당 원내총무 경선에서다. 당시 유진오 총재가 DJ를 지명했지만 YS가 반발하면서 인준이 부결됐고 결국 YS가 원내총무가 됐다.

하지만 2년뒤 DJ는 드라마틱한 복수에 성공했다. 1970년 9월 신민당의 대통령 후보 경선은 당초 YS의 승리가 예상됐다. 경선 전날 당수였던 유진산이 YS 지지를 공식 발표했기 때문이다. 1차 투표에서 YS는 421표로 DJ(382표)를 눌렀다. 하지만 과반 득표자가 안 나와 2차 투표가 실시됐는데 여기서 DJ는 458표로 YS(410표)를 꺽고 신민당의 대통령 후보가 됐다. 1차 투표에서 무효표(82표)로 몰렸던 이철승계가 DJ쪽으로 돌아선 게 결정적 요인이었다.

이후 두 사람의 라이벌 관계가 본격화 됐지만 유신체제와 5공 신군부에 저항하는 과정에서 오랫동안 공조 체제를 유지했다. 그랬던 둘의 관계가 결정적으로 파탄난 건 1987년 대선때다. 당시 노태우의 6ㆍ29 선언으로 직선제 개헌을 쟁취한 야권은 YS와 DJ의 후보단일화가 최대 과제였다. YS측은 DJ가 대통령이 되면 군부 쿠데타 가능성이 있고 DJ는 노태우측의 지역감정 공세에 취약하며 사회안정ㆍ경제발전을 위해선 YS가 먼저 대통령을 하고 다음에 DJ가 하는게 유리하다는 논리를 폈다. 이에맞서 DJ측은 ‘4자 필승론’을 들고 나왔다. 노태우는 경북, YS는 경남, JP(김종필)는 충청, DJ는 호남을 각각 기반으로 하고 있어 중립 지역인 수도권에서 가장 강세인 DJ가 당선될 수 밖에 없다는 주장이었다.

결국 두 사람은 끝까지 자신이 대통령 후보가 돼야 한다고 우기다가 파경을 맞았다. YS가 그해 10월 대선 출마를 선언하자, DJ는 곧바로 통일민주당을 깨고 나가 평화민주당을 창당해 대선 후보로 추대됐다. 결국 그해 12월 대선에서 노태우는 36.6%의 득표율로 당선됐고, YS는 28.0%, DJ는 27.1%로 2ㆍ3위에 그쳤다. 한국 정치의 고질병인 지역 대결 구도는 1987년 대선을 고비로 본격화됐다.

대선때는 YS가 DJ에 간발로 앞섰지만 이듬해 1988년 총선에서 YS와 DJ의 위치는 역전됐다. YS의 민주당이 59석에 그쳐 3당이 된 반면,DJ의 평민당이 70석을 건져 2당으로 올라섰다. 득표율은 민주당(23.8%)이 평민당(19.3%)보다 우세했지만 평민당이 호남을 싹쓸이 한 덕분에 소선거구제에서 이득을 본 것이다.

1990년 1월 YS가 노태우ㆍJP와 손잡고 3당 합당을 결행하면서 YS와 DJ의 관계는 돌아올 수 없는 다리를 건너게 됐다. 두 사람은 1992년 대선에서 집권 민자당 후보와 제1 야당의 후보로서 마지막 정면 승부를 벌였다. JP의 지원을 받은 YS는 ‘영남+충청’ 연합을 바탕으로 41.4%의 득표율을 거둬 호남 몰표가 최대 무기였던 DJ(33.4%)를 여유있게 따돌렸다. 대선 다음날 DJ가 정계은퇴 선언을 하면서 두 사람의 기나긴 애증 관계도 끝난 듯 했다.

하지만 DJ가 1995년 정계복귀를 선언하고 국민회의를 창당하면서 두 사람의 라이벌전은 ‘시즌2’를 맞는다. 이후 DJ는 집권을 위해 YS를 매몰차게 공격했다. 국민회의는 1996년 총선에서 78석에 그쳐 YS의 집권 신한국당(139석)에 크게 밀렸다. DJ는 큰 위기를 맞았지만 철치부심한 끝에 1997년 대선에서 정권교체를 이룩했다. DJ의 승인은 대선 직전 IMF 사태가 터지면서 민심이 극도로 악화됐고, JP를 끌어들여 ‘호남+충청’ 연대를 이룩했으며, 이인제의 독자출마로 여당 지지층이 쪼개진 덕분이었다.

DJ 집권 초 YS는 한보사태로 구속된 차남 김현철의 사면이 늦어지자 DJ를 향해 ‘배신자’라며 독설을 퍼부었다. 1997년 대선때 DJ의 비자금 의혹에 대해 YS가 수사유보를 결정해 DJ를 도와줬는데도 은혜를 갚지 않았다는 것이다. DJ는 1999년 8월에야 김현철을 사면했다. YS는 DJ가 노벨 평화상을 수상하자 “노벨상 가치가 땅에 떨어졌다”고 깎아내리기도 했다.

2000년 6월 DJ는 전직 대통령들을 초대한 자리에서 YS에게 “거산(巨山:YS의 호), 이제 우리 화해하자”고 손을 내밀었다. YS는 “그러면 IMF에 대해 후광(後廣ㆍDJ의 호)이 먼저 사과하라. 그러면 화해한다”고 대꾸했다. IMF 사태의 책임을 전부 자신에게 떠넘긴 것을 사과하란 요구였다. 하지만 DJ는 끝내 아무 말이 없었다.

두 거목(巨木)의 화해는 DJ 서거 직전에 극적으로 이뤄졌다. 2009년 8월10일 오전 YS는 DJ가 입원중인 신촌 세브란스 병원을 전격 방문했다. YS는 투병 중인 DJ와 직접 대화를 나누진 못했으나 15분가량 DJ의 부인 이희호 여사와 면담하면서 화해의 손길을 내밀었다. YS는 병원을 떠나면서 “두 분이 화해한 것으로 봐도 되느냐”는 기자들의 질문에 “이제 그럴 때가 됐지 않았느냐. 그렇게 봐도 좋다”고 말했다. YS는 “6대 국회 때부터 동지적 관계이자 경쟁관계로 애증이 교차한다”고 말했다. DJ는 8일 뒤 세상을 떴다.

김정하 기자 wormhole@joongang.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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