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훈족과 게르만족의 도미노효과, 중세 유럽을 만들다

중앙선데이 2015.11.22 01:51 454호 20면 지면보기

그림 1 조셉-노엘 실베스트르, '야만족에 의한 로마의 함락, 410년', 1890년. 벌거벗은 서고트족 병사가 서로마를 침략하는 모습을 그렸다.



그림 1은 프랑스의 화가 조셉-노엘 실베스트르(Joseph-Noel Sylvestre)가 그린 ‘야만족에 의한 로마의 함락, 410년’이다. 19세기 말에 유행한 대형 ‘공식화’인데, 이런 그림을 ‘아르 퐁피에르(L’art pompier)‘라고 부른다. ‘소방관 미술’이라는 뜻인데, 당시 소방관의 헬멧이 그리스 시대의 헬멧과 비슷하게 생겨서 붙여진 이름이라고 한다. 부르주아 계층의 기호에 맞춰 제작된, 지나칠 정도로 힘이 들어간 대형 역사화를 비꼬듯이 부르는 명칭이다.


세계화는 어떻게 진화했나-34- 훈족과 게르만족의 대이동

훈족 피해 로마제국 공격한 게르만족이 그림은 410년 서로마가 서고트족의 침략을 받는 모습을 묘사한다. 로마제국의 국경 바깥으로는 로마인들이 ‘야만인’이라고 부른 여러 인구집단들이 살고 있었다. 제국 북쪽에 거주하는 이들을 총칭해 게르만족이라고 부르는데, 역사가들은 이것이 혈연적이거나 인종적인 집단을 의미하지는 않고 문화적, 언어적 혹은 정치적인 유사성에 기초한 ‘느슨한’ 분류라고 말한다. 서고트족은 이런 게르만족 가운데 하나로, 주로 다뉴브강과 흑해 주변을 근거지로 삼아 살았다. 로마인들이 이들을 제국의 질서 밖에 존재하는 야만인으로 인식했던 역사는 1500년이 흐른 뒤에도 계속돼 그림 1에 자취를 남겼다.



화가는 로마제국이 쌓아올린 ‘문명’과 침략자들의 ‘야만’을 극명하게 대조시켰다. 무려 800년 만에 적군의 손아귀에 떨어지고 만 로마. 이 대도시를 점령한 서고트족은 벌거벗은 차림에다 싸움에만 능할 뿐 우아한 건축물과 조각품은 안중에 없던 문명파괴자로 그려졌다.



게르만족이 로마제국을 괴롭힌 것은 이번이 처음이 아니었다. 4세기부터 제국은 흔들리기 시작했다. 378년 로마의 허락을 받고 제국 내부에 거주하던 서고트족이 반란을 일으키고 대규모 로마군을 괴멸했다. 쇠약해진 로마제국은 395년 서로마와 동로마로 나뉘게 되었다. 406년에는 반달족, 수에비족, 알란족이 얼어붙은 라인 강을 건너 서진해서 갈리아를 초토화시켰다. 이들 중 일부는 이어서 이베리아반도와 아프리카 북단으로 진출하고 독립된 왕국들을 세웠다. 부르군트족과 프랑크족도 갈리아를 침략하고 자신들의 왕국을 건설했다. 이렇듯 4~5세기에 걸쳐 유럽 전역에서 게르만족의 대이동이 일어났고, 결국 서로마는 476년 게르만족 용병대장 오도아케르에 의해 멸망했다.



그렇다면 게르만족은 왜 로마제국을 공격하게 되었을까? 중앙아시아 스텝지대로부터 훈족이 세력을 확장함에 따라 압박을 받았기 때문이다. 훈족이 동아시아 역사에 등장하는 흉노족과 동일한 집단인가에 대해서는 역사가들의 의견이 일치하지 않는다. 그러나 훈족이 초원생활에 익숙하고 전투능력이 뛰어난 기병을 거느렸다는 점은 모두가 인정한다. 4세기 중반 훈족은 근거지였던 볼가강 동부를 벗어나 서쪽으로 약탈과 정복을 시작했다. 제일 먼저 알란족을 격파했고 이어서 슬라브족과 동고트족을 희생시켰다. 서고트족을 포함한 여러 게르만족은 가공할 전투력을 과시한 훈족을 피해서 남쪽과 서쪽으로 이동하기로 결심했다. 감염병과 반란과 경제후퇴로 이미 쇠약해지고 있던 로마제국은 이들의 침투를 막아내기 어려웠다.



훈족의 전성기는 강력한 지도자 아틸라가 활약한 5세기 전반이었다. 그는 지금의 루마니아에서 시작해서 동쪽으로 카스피해, 서쪽으로 라인강에 이르는 광대한 제국을 건설했다. 초기에 훈족은 게르만족을 떠밀어 이주시키는 역할만을 했지만, 아틸라가 이끄는 훈족은 직접 동서 로마제국을 공격했다. 그들은 동로마를 공격하여 여러 도시를 함락시키고 공납을 강요했고, 서로마를 치기 위해 갈리아의 오를레앙까지 진격했다. 아틸라의 갑작스런 죽음으로 훈족의 전성시대는 끝을 맺었지만, ‘야만인’ 아틸라가 가했던 무시무시한 위협은 서유럽 인들의 뇌리에 깊이 각인되었다.



 

그림 2 외젠 들라크루아, '이탈리아와 예술품들을 유린하는 아틸라 부대', 부분, 1838-47년.



그림 2는 낭만주의를 대표하는 화가 외젠 들라크루아(Eugene Delacroix)가 그린 아틸라의 모습이다. 늑대 가죽을 뒤집어쓰고 말 위에서 철퇴를 휘두르는 거친 전사의 모습이 강렬한 색깔로 묘사되어 있다. 이 그림에서 야만성은 경멸과 두려움의 대상이 아니라 매력을 내뿜는 요소로 다가온다. 자세한 기록이 남아있지 않은 역사적 인물을 뛰어난 상상력과 표현력으로 부활시킨 화가의 재주가 참으로 놀랍다.



훈족과 게르만족이 만들어낸 도미노효과는 유럽을 어떻게 변모시켰을까? 동로마제국은 쇠망의 위기를 벗어나 천년이나 역사를 더 끌어가게 되었지만, 서로마제국은 회복이 불가능한 상태를 맞았다. 그리고 서로마제국이 사라진 자리에 새로운 중세적 질서가 형성되어 갔다. 새 질서의 핵심은 ‘제국 없는 통치’였다. 모든 제국은 영토 전역으로부터 조세를 수취하여 재정기반을 마련하고 이를 바탕으로 군대와 관료를 파견하여 통치하는 구조를 가진다. 그런데 서로마제국이 붕괴하여 체계적 조세수취가 불가능해지자 국방과 치안을 확보할 길이 막막해졌다. 유력자들이 안전을 도모하기 위해서 취할 수 있는 선택은 개인적으로 무력을 갖추는 방법뿐이었다. 그래서 탄생한 것이 봉건제였다.



봉건제는 주군(상급 영주)과 가신(하급 영주)이 맺는 쌍무적 관계를 의미했다. 외부 세력과 물리적 충돌이 우려되는 상황이 발생하면 주군은 가신에게 기사로서 출병할 것을 요청할 권리를 가지며 이런 충성의 대가로 봉토를 가신에게 제공하는 형태였다.



 



20세기까지 이어진 훈족 공포안전이라는 공공재를 제공할 국가가 존재하지 않는 환경에서 민간 부문이 스스로 무력을 확보하는 수단으로 발전시킨 제도가 봉건제였던 것이다. 주군은 여러 명의 가신을 두었고, 가신은 다시 더 작은 영주들의 주군 역할을 했다. 그리고 이 모든 영주들의 토지를 예속적 존재인 농노가 경작했다. 이리하여 최상위 주군에게서부터 최하위 농노에 이르는 피라미드형 사회구조가 짜였다.



유럽을 둘러싼 군사적 위협은 쉽게 사라지지 않았다. 오히려 8~10세기에 압박의 강도가 높아졌다. 남쪽에서 이슬람 세력이 치고 올라왔고, 북쪽으로부터 바이킹족의 공세가 이어졌으며, 동쪽에서는 마자르족이 침략하면서 공납을 요구했다. 봉건제가 유럽사회의 기본적 질서로 자리를 잡을 수밖에 없는 여건이었다. 훗날 화약무기가 도입되어 기사의 군사적 가치가 떨어질 때까지 봉건제는 계속되었다.



 

그림3 헨리 롤리, '훈족 아니면 홈?', 1918년.



훈족이 남긴 인상이 깊어서였는지 훈족에 대한 언급은 20세기까지도 이어졌다. 1900년 중국에서 의화단 봉기가 일어나자 독일 황제 빌헬름 2세는 “천 년 전 아틸라가 이끈 훈족의 명성이 전설이 되었던 것처럼 중국인들을 가차없이 혼쭐내라.”라고 군대에 명했다. 1차 세계대전이 발발하자 영국은 독일과 선전전을 뜨겁게 벌였는데, 이때 빌헬름 2세의 언급을 이용해 독일인을 훈족에 비유하자는 아이디어가 등장했다. 그림 3은 헨리 롤리(Henry P. Raleigh)가 제작한 작품으로, 전시공채 판매를 독려하기 위한 포스터다. 시커먼 형상의 괴물이 어린 아기를 안은 여인을 위협하고 있다. 남편으로 보이는 인물은 이미 희생되어 괴물의 발아래 놓여있다. 괴물은 정수리에 꼬챙이가 달린 피켈하우베(pickelhaube)라는 투구를 쓰고 있다. 당시 독일군이 착용한 이 투구는 옛날 훈족이 썼던 투구와 비슷한 형태였기 때문에 비유의 대상으로 삼기에 적당했다. 독일이 곧 야만을 의미한다는 이미지화 작업은 이렇게 완성되었다. 정치적 프로파겐더(정치 선전) 만들기에 역사적 실체는 중요하지 않았다.



 



송병건 성균관대 경제학과 교수bks21@skku.edu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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