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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약史 100년에 신약 25개뿐 … ‘연구비〈영업비’ 구조 탓

중앙선데이 2015.11.22 01:24 454호 8면 지면보기
독일 바이엘사의 아스피린과 한국 제약사 진통제의 차이는 뭘까. 아스피린은 전 세계에서 팔리는 반면 한국 제약사의 진통제는 거의 대부분 내수용이라는 점이다. 한국의 제약산업은 그간 ‘우물 안 개구리’를 벗어나지 못했다. 100년 역사의 제약산업에서 우리가 개발한 신약은 25개에 그쳤다. 비용과 돈이 많이 드는 신약 개발 대신 특허권이 만료된 외국 제약사 약의 성분과 효능을 그대로 따라 만든 카피약(제네릭)을 팔아 성장하는 모델이었다. 그러다 보니 연구개발(R&D)보다는 병원과 의사에게 뒷돈을 주고 약을 파는 리베이트 관행이 있었던 것도 사실이다.



 하지만 분위기는 조금씩 바뀌고 있다. 세계적으로 팔리는 글로벌 신약을 만들 날이 머지않았다는 기대가 커지고 있다. 최근 한미약품은 다국적 제약사인 사노피(프랑스)와 얀센(미국)에 당뇨병 신약 기술에 대해 국내 제약 사상 최고 금액인 7조4000억원에 라이선스 계약을 맺었다. 사노피는 2014년 매출 기준 세계 3위(400억 달러·약 46조원)의 기업이다. 국내 제약사 중 매출이 1조원 넘는 회사가 한 곳뿐이라는 점을 감안하면 엄청난 성과다.


한국 제약산업의 빛과 그늘

 바이오 및 제약 사업은 무한한 가능성이 있는 미래 먹을거리 산업이다. 세계 의약품 시장 규모는 지난해 1200조원이다. 자동차(600조원)와 스마트폰(400조원)을 더한 것보다도 크다. 당연히 신약 개발 국제 전쟁이 치열해지고 있다. 국내 제약사가 살아남으려면 이 전쟁을 이겨내야 한다. 한미약품의 대박 계약에도 불구하고 전문가들은 우리 제약산업의 미래를 예단할 수 없다고 지적한다. 빛과 그늘이 동시에 존재하기 때문이다. 제약사 매출의 35%가 판매관리비“영세한 제약사에는 연구 인력이 거의 없어요. 대부분 영업사원으로 돌아가는 노동집약적 산업 모델이죠. 약만 좋으면 뭐합니까. 병원에서 선택을 안 해주면 그냥 굶어요. 당연히 연구개발보다 영업에 집중할 수밖에 없는 거예요.”



 전직 제약사 영업사원인 박모(39)씨의 이야기다. 판촉 활동에 열을 올리는 동안 연구개발은 뒷전이라는 한국 제약산업의 단면을 보여준다. 한국보건산업진흥원의 ‘신약 개발 파이프라인 분석예측’(2013) 보고서에 따르면 국내 제약사의 평균 판매관리비는 매출액의 34.8% 정도다. 매출의 3분의 1이 넘는 돈을 병원이나 의사를 대상으로 한 영업 비용으로 쓴다는 뜻이다. 일반 제조업의 세 배 수준이다.



 이렇게 국내 영업에 대한 집중은 글로벌 판매망을 외면하는 결과를 낳는다. 세계 제약시장의 40%를 차지하는 북미 시장이나 유럽에서 성공하려면 자체적인 유통 인프라를 갖춰야 한다. 국내 대형 제약사 관계자는 “신약 개발 자체도 어렵지만 신약을 만들어도 해외에서 팔 수 있는 인프라를 갖고 있는 제약사는 사실상 ‘제로’라고 봐야 한다”며 “국내 신약 20여 개도 대부분 시장성이 없거나 유통 능력이 없어 사장되는 신세”라고 말했다. 

한미약품은 지난해 신약 연구개발비로 매출의 20%를 투자했다. [사진 한미약품]



한미약품 연구비, 타사의 3배연구보다 영업에 매진하는 제약사가 많지만 희망도 싹트고 있다. 지난해 국내 상장 제약사의 R&D 비용은 9500억원으로 전년에 비해 7.9% 증가했다. 매출 대비 7.4% 수준으로 아직 더 많은 투자가 필요하다. 한미약품은 매년 매출의 19~20%씩을 꾸준히 R&D에 투자한 결과 개발 착수 13년 만에 대형 계약을 체결할 수 있었다. 이런 성공 사례가 나오면서 다국적 제약사도 한국을 주목하고 있다.



 지난 19일 ‘한국제약산업 공동 콘퍼런스’에서 달라진 우리 제약산업의 위상이 느껴졌다. 이날 행사는 국내외 제약사 주요 인사들은 물론 바이오 벤처업계와 정부의 주요 정책담당자들도 대거 참석했다. 마이클 마크 베링거인겔하임 연구개발사업부 부사장은 “한미약품 같이 새로운 기술에 대한 R&D 의지를 가진 회사와 파트너십을 갖길 원한다”며 “언제든 한국 제약사와 파트너십을 맺을 수 있다”고 말했다.



 기껏 힘들게 신약을 개발하다 기술과 판권을 다국적 제약회사에 넘기는 것은 제약주권을 넘기는 행위라는 비판이 있다. 한미약품의 계약을 놓고도 ‘끝까지 개발했더라면 7조4000억원이 아니라 수십조원을 벌어들였을 것’이라는 지적도 나온다. 이에 대해 전문가들은 한국 제약산업의 부족한 인프라와 판매망을 간과한 것이라고 지적한다. 『바이오 기술계약 총서』의 공동저자인 임재혁 이연제약 신약개발팀장은 “오랜 시간과 비용이 드는 신약 개발에서 최초 아이디어를 끝까지 밀고 나가는 것은 어려운 일”이라며 “다국적 제약사와의 라이선싱 계약은 제약업종에선 일반화된 방식”이라고 말했다. 일관성 있는 신약 개발 컨트롤타워 시급제약업계는 신약 개발을 위한 최우선 순위로 약가 정책의 변화를 요구한다. 매년 실거래가 조사를 통해 약값을 인하하고, 사용량이 많아져 매출이 늘면 약값을 깎는(사용량 연동제) 정책을 바꿔달라는 것이다. 약값 인하가 다국적 제약사들의 한국 시장 투자를 꺼리게 하는 요인으로 작용하고 신약 개발의 의지를 꺾는다는 이유에서다. 지난 20일 정진엽 보건복지부 장관과 만난 제약업체들도 이런 의견을 전달한 것으로 알려졌다. 복지부 관계자는 “약값은 신약 개발 차원으로만 따질 수는 없고 국민 부담도 감안해야 한다”며 “제약업계 제안 중 긍정적으로 검토할 게 있는지 살펴보고 있다”고 했다.



 충북 오송, 대구에 조성된 첨단의료복합단지(첨복단지)에 튼실한 연구 생태계를 조성하기 위한 투자도 필요하다. 이 단지는 2038년까지 8조6000억원을 투입하는 국가 프로젝트다. 바이오 벤처나 영세 제약사가 입주해 연구 인프라를 이용할 수 있고 다양한 세제 혜택을 준다. 2013년 하반기 건물이 완공돼 아직 입주기업이 많지 않고 자리를 잡아 가는 단계다.



 하지만 벌써부터 불협화음이 들린다. 운영비와 인건비를 중앙·지방 정부가 절반씩 나눠 투입하는데, 대구와 충북이 신청한 내년 국비 지원 예산이 기획재정부 심의 과정에서 반 토막 났다.



 첨복단지 관계자는 “한미약품이 이번 계약을 성사시키는 데 연구기간만 13년이 걸렸다”며 “첨복단지가 신약 개발의 연구 생태계를 백업하는 역할을 하려면 약속된 금액을 꾸준히 지원해줘야 한다”고 말했다. 여재천 신약개발조합 전무는 “신약 개발 사업에 복지부·미래창조과학부·산업통상자원부 등 다양한 부처가 혼재돼 있다”며 “어느 한 부처에 주도권을 몰아주는 건 바람직하지 않지만 일관성 있게 계획을 추진할 컨트롤타워는 필요하다”고 했다.



 



 



장주영 기자 jang.jooyoung@joongang.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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