본문 바로가기

‘줄 앤 짐’ (1961)

중앙선데이 2015.11.22 00:36 454호 24면 지면보기

1 영화 포스터

[영화 속에서]?두 남자와 한 여자의 기묘한 동거?20세기 초 유럽 압축한 역사 드라마



 

4 카트린과 처음 만난 두 남자.


강신주·이상용의 영화 속 철학 산책

두 남자와 한 여자의 지독한 삼각관계. ‘줄 앤 짐’을 정리하는 한 문장이다. 영화는 1910년대 ‘벨 에포크(belle epoque)’라고 불렸던 파리(유럽)의 황금시절로부터 시작한다. 줄과 짐은 친구가 된다. 그들은 서로에게 시를 읽어주고 번역을 하며 우정을 다진다. 두 사람은 모든 것을 공유한다. 거리에서 만난 무정부주의자의 연인 테레즈가 이들과 함께 했을 때, 두 남자는 그녀를 공유한다. 벨 에포크 시대의 삶이자 청춘의 시대는 무정부주의와 닮아 있다. 그러나 조각상을 빼닮은 여인 ‘카트린’이 등장하면서 공유의 시절은 사라진다. 줄은 말한다. “이 여자는 아냐, 짐.”



‘줄 앤 짐’은 멜로 드라마인 동시에 20세기 초반의 유럽을 압축하는 역사적 드라마이기도 하다. 풍요로움을 누렸던 유럽은 1차 세계대전으로 인해 갈라진다. 오스트리아인이었던 줄은 카트린과 함께 자국으로 돌아가고, 프랑스인이었던 짐 역시 전쟁에 참가한다. 두 남자는 서로를 죽이지 않을지 걱정한다.



 

2 ‘줄 앤 짐’ 하면 누구나 떠올리는 대표적인 장면. 카트린의 자유분방함이 잘 드러난다.

5 카트린은 줄과 먼저 교제를 시작한다.



자유·사랑에 대한 욕망의 풍화 과정파국은 전쟁 후에 찾아온다. 줄과 카트린이 머무는 라인 강변의 마을을 찾아간 짐은 두 사람 사이에 태어난 어여쁜 딸을 본다. 그러나 둘 사이는 서먹하기만 하다. 줄은 카트린이 자신을 떠나는 것보다 짐과 사랑에 빠지는 것이 나은 일이라고 생각한다. 짐은 줄의 생각을 받아들인다. 한 집안에 두 남자와 한 여자의 기묘한 동거가 시작된다. 이는 전쟁 이전, 즉 벨에포크 시대로 회귀하는 선택이다.



세 사람이 미처 깨닫지 못했던 것은 지나간 삶을 되돌릴 수 없다는 사실이다. 이들의 동거는 삶을 코미디로 만들어버린다. 파리로 돌아온 짐은 자신을 기다리는 연인 질베르트와의 관계를 쉽사리 정리하지 못하고, 세 사람의 이야기는 네 사람의 이야기로 변하며 삶의 복잡함을 드러낸다. 청춘의 시절에는 모든 것이 쿨하고 명백했지만, 전쟁과 세월의 풍화를 겪은 삶 속에는 남겨진 것들이 있게 마련이다. 30년의 시간을 압축해 전달하는 ‘줄 앤 짐’은 두 사람의 우정에서 출발해 세 사람의 러브스토리로, 그리고 끝내 네 사람의 비극으로 끝난다.



돌이켜보면 오래전에 서로의 다름을 확인한 바 있다. 파리의 어느 저녁 ‘스웨덴’ 공연을 본 후(카트린의 말로 미루어볼 때 스트린드베리의 ‘미스 줄리’로 짐작된다) 논쟁을 펼치던 밤거리에서 카트린은 돌연 파리의 센강으로 몸을 던졌다. 그것은 두 남자의 입장에 동의하지 않는다는 결연하면서도 돌발적인 행동이었다. 그것은 세 사람 사이에 존재하는 반복되는 불일치다. 이는 영화의 마지막 순간에 다시 한 번 되풀이된다. 짐을 차에 태운 카트린은 강물로 뛰어든다. 그 역시 청춘의 모습을 반복하는 행위다.



 

3 프랑수아 트뤼포 감독.



멀리서 보면 우습고 가까이서 보면 슬픈‘줄 앤 짐’은 청춘의 시대를 살다가 끝내 청춘의 이름으로 질주하는 자들의 이야기다. 프랑수아 트뤼포 감독은 1961년에 이 영화를 만들었다. 2차 세계대전이 끝나고 새로운 세대들이 영화계와 프랑스 문화를 점령하기 시작하던 무렵이었다. 누벨바그의 기수로 활동하던 트뤼포 감독은 청춘의 시절을 뜨겁게 먼저 살다간 사람들의 이야기를 통해 자신이 속한 시대정신을 대변했다. 트뤼포는 이 영화를 두고 다음과 같이 말했다. “나는 우스꽝스러운 영화가 될 것이라고 믿으며 영화를 시작했다. 그리고 영화를 만드는 동안 슬픔만이 이 영화를 구해낼 수 있음을 깨달았다.”



어쩔 수 없이 비극으로 끝나는 청춘의 종말. 그것은 후대의 청춘이 선대의 청춘을 바라보며 얻은 결론이었다. 영화는 두 가지 관념을 오가는 것이다. “청춘은 질주한다”는 젊은 날의 관점과 “언젠가는 추락한다”는 젊은 날을 통과한 이들의 관점. 이것이야말로 ‘줄 앤 짐’의 시작과 끝을 정리하는 두 개의 장면이다. 그래도 많은 관객은 ‘줄 앤 짐’을 젊은 날의 관점으로 기억하지 않을까. 누구나 줄 혹은 짐이거나 카트린이기를 소망하기에 말이다.



 



이상용영화평론가



 

[영화 밖으로]?왜 새로운 사랑이 등장하면?과거의 사랑과 원수가 돼야 할까



 

1912년 파리에 온 오스트리아 청년 줄은 프랑스 청년 짐을 만나 우정을 쌓아간다. 어느 날 두 청년은 카트린이라는 여자를 만나 동시에 사랑에 빠진다. 하지만 1차 세계대전이 터지면서 줄과 짐은 본국의 군에 입대해 참전한다. 종전 후 줄과 카트린은 딸을 낳아 기르며 함께 살게 되고, 오랜만에 그들을 찾아간 짐은 둘 사이가 좋지 않음을 직감한다. 카트린과 짐 사이에 새로운 사랑이 싹트고 셋은 한 집에 살게 된다. 세 남녀의 아슬아슬한 동거 생활은 짐이 정리하지 못한 다른 여인의 존재로 흔들리기 시작한다.



짜장면을 아주 맛있게 먹는 당신에게 누군가 “당신은 짜장면을 좋아하는군요. 그러니 파스타는 먹지 않는 게 좋겠어요”라고 말한다면 어떨까. 또는 모네의 세계에 매료된 당신에게 “사랑하는 화풍이 생겼으니 앞으로 클레의 그림을 보아서는 안 된다”고 한다면. 설악산 정상에서 땀을 닦고 있는데 최고봉에 올라봤으니 지리산에는 오르지 않는 편이 낫겠다고 한다면.



말도 안 되는 정신 나간 소리라 할 것이다. 짜장면이 지겨워지면 파스타도 짬뽕도 해물 칼국수도 먹을 수 있다. 모네를 알고 나면 클레가 궁금해질 수 있다. 설악산의 날카로움이 버거워지는 순간 푸근한 지리산의 품에 안기고 싶어지는 게 당연지사. 그런데 사랑은 어떨까.



 



“그 사람이야, 나야?” 거친 이분법 버려야거의 대부분의 사람들이 예외 없이, 한 치의 의심 없이 맹신하는 사랑에 관한 철칙이 있다. ‘새로운 사랑은 과거의 사랑을 완전히 끝내야만 비로소 시작할 수 있다’는 전제다. 말하자면 짜장면을 포기하고 파스타를 택할 수는 있지만 다시 짜장면으로 돌아올 수는 없다는 것. 클레에 빠졌다면 인상파 모네에게 다시 애정을 가져서는 안 된다. 지리산에 안겼다면 설악산에 대한 기억은 깡그리 잊자는 논리. 그래서 비극이 벌어진다. 애인이나 법적 배우자 이외에 다른 이성에게 사랑을 느끼는 순간 우리는 그 감정을 잔인하게 교살한다. 더 이상 호감이 느껴지지 않는 상대방에게 감정을 느껴보려고 무던히도 애를 쓴다. 그러나 사랑이나 이성을 향한 호감을 의지로 유지시킬 수 있을까.



의지로 유지하는 사랑은 허위, 한 마디로 가짜 사랑, 알맹이 없이 쭉정이만 남은 사랑일 뿐이다. 차라리 지금은 당신을 사랑하지 않는다고 말하는 편이 더 정직하고, 나아가 더 바람직하다. 당장 사랑하지 않는다고 해도 그 사람은 우정의 대상일 수 있다. 반대로 우정의 대상은 언제고 사랑의 대상이 될 수 있다. 우정과 사랑이 구별되는 지점이 여기다. 우정은 제 3자를 용인한다. 자주 만나지 않는다고 우정이 깨지지도 않는다. “그 사람이야, 아니면 나야?” 이런 거친 이분법이 자연스럽지 않고 인위적인 관습일 뿐이라고 생각했던 감독 트뤼포는 ‘줄 앤 짐’에서 카트린을 통해 강력하게 묻는다. “요리·그림·등산·우정 등 일상의 수많은 선택에서 통용되는 동시다발적 애정 관계가 왜 사랑에서는 불가능할까?”



주인공 카트린은 줄과 짐 사이에서 교묘한 동거를 하며 사랑에서도 이 동거가 자연스럽다는 것을 관철시키려고 노력하는 캐릭터다. 카트린이 꿈꾸던 사랑과 삶은 이렇게 요약할 수 있다. 줄을 사랑한다면, 짐은 친구로 존중받을 것이다. 반대로 짐을 사랑한다면, 줄은 친구로 존중받을 것이다. 그런데 카트린의 이 실험이 성공하려면 줄과 짐이라는 두 남자도 독점욕과 질투를 버리고 “나야, 아니면 짐(또는 줄)이야?”라는 이분법을 카트린에게 강요하지 않아야만 한다.



 

6 카트린을 기다리는 짐. [사진 마티]



감정을 두려워하는 겁쟁이가 되지 말아야영화에서 가장 인상적인 대목은 남장을 한 카트린, 그리고 그녀를 따르는 두 남자 줄과 짐이 거리를 나서는 장면이다. 세 남자는 달리기 경주를 한다. 남장을 한 카트린이 경주의 승자가 된다. 줄과 짐을 이끄는 인물이 카트린임을 넌지시 보여주는 장면으로 해석된다. 동시에 불길한 예감이 뒤따른다. 카트린은 즐겁게 남장 여자가 되었지만, 줄과 짐은 과연 여장을 할 용기가 있었던 사람들일까. 두 남자는 카트린의 남장이 지닌 의미를 간파했을까. 두 남자에게 카트린은 그저 여자였을 뿐이다. 그러니 카트린이 두 남자를 훈육할밖에. 과연 그녀는 자신의 꿈에 두 남자를 가두어둘 수 있을까.



사랑이 식어도 친구가 될 수 있고, 또 이런 식으로 친구가 되었다면 언제든지 다시 애인이 될 수 있다. 이것이 가능하다면 아마도 사랑은 인위와 허위에 지배되지 않고 가장 자연스런 감정에 따르게 될 것이다. 왜 새로운 사랑이 등장하면 과거의 사랑과 원수가 되어야 할까? 왜 애인이나 배우자가 있다는 이유로 새롭게 찾아오는 사랑의 감정을 우리는 극구 부정해야만 할까? 왜 우리는 사랑하는 사람이 친구가 되고, 친구가 사랑하는 사람이 되는 자연스러운 과정을 두려워할까?



‘줄 앤 짐’은 우리에게 묻는다. 개봉 이래 50년이나 지났음에도 카트린이 무서운 거냐고. 아직도 질투와 독점욕으로 점철되는 막장 드라마에 감정을 맡기고 있다면 당신은 여전히 카트린의 웃음 뒤에 숨어 사는 겁쟁이일지 모른다.



 



강신주대중철학자

구독신청

공유하기
광고 닫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