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반상의 자유는 무한 … 주원장·도요토미도 즐긴 흉내바둑

중앙선데이 2015.11.22 00:33 454호 26면 지면보기

1980년 12월 제15기 왕위전 도전기에서 서봉수(오른쪽)는 조훈현을 상대로 흉내바둑을 세 판 시도했고 모두 이겼다. 결국 서봉수가 타이틀을 획득했다. [사진 한국기원]



1965년 제4기 명인전 본선 리그에서다. 린하이펑(林海峰) 7단은 후지사와 구라노스케(藤澤庫之助) 9단과의 대국을 며칠 앞두고 스승 우칭위안(吳淸源)을 찾아갔다. 대화는 흉내바둑으로 흘렀다. “아마도 흉내바둑으로 나올지 모른다.” “저도 그리 생각하고 있습니다.” 사제는 57년 후지사와가 우칭위안에게 시도했던 흉내바둑을 검토했다.


[반상(盤上)의 향기] 프로와 흉내바둑

 

1957년 후지사와(오른쪽)가 우칭위안에게 흉내바둑을 두었다. 65년 린하이펑과의 대국에서도 후지사와는 이 바둑에서처럼 73수까지 똑같이 흉내를 냈다.



과연 그대로였다. 실전에서 백을 잡은 후지사와는 린 7단에게 흉내바둑을 시도했고, 73수까지 한 수도 틀림이 없이 57년의 바둑을 반복했다. 운명에 대한 예감이란 게 있는가 싶다. 린 7단은 후지사와를 이기고 도전자가 되었다. 그리고 사카타 에이오(坂田榮男) 9단마저 꺾고 명인에 올랐다.



흉내바둑은 흑이 첫수로 천원(天元-제일 가운데 점)을 둔 다음 상대의 착점을 따라 두는 바둑이다. 반상은 천원을 중심으로 대칭이기 때문에 흉내가 가능하다. 18급도 프로를 따라 둘 수 있기에 흉내바둑에 대해서는 오해도 많고 비난도 있다. 흉내바둑을 두면 흑이 1집 이긴다는 이해는 오해에 속하고, 흉내는 비겁하다거나 바둑의 적이라는 얘기는 비난의 대표적인 예다. 따라 두면 흑이 1집 이긴다는 것은 틀린 말이다. 반상은 착수교대의 원칙이 지배하기에 반상의 대칭적 성격만 갖고는 결과에 영향을 일방적으로 미칠 수 없다.



아마추어와 달리 프로들은 대부분 흉내바둑을 긍정적으로 본다. 이길 기회를 찾을 수만 있다면 누구든 흉내를 마다하지 않는다. 승리가 미덕이기 때문만은 아니다. 흉내바둑이 바둑의 본질을 침해한다고 보지 않기 때문이다. 반상은 너와 나의 자유로운 지적(知的) 경쟁의 장(場). 규칙만 지킨다면 무엇이든 허용된다.



 우칭위안, 29년 기타니와 대결서 첫 시도일본에서는 흉내바둑(眞似碁)을 다이코고(太閤碁)라고 부른다. 다이코(太閤)라는 자리에 앉았던 도요토미 히데요시(豊臣秀吉)가 고수와 대국할 때면 첫 점을 천원에 두고 다음 수부터 흉내내기를 좋아했다는 전설에서 유래됐다.



중국에선 명나라 태조 주원장(朱元璋)이 흉내를 즐겨 흉내바둑의 원조로 알려졌다. 하지만 중국은 흉내바둑을 동파바둑(東坡棋)이라고 부르는데, 연원은 알려지지 않았다. 송나라 문인 소동파가 워낙 다재다능하고 의외의 발상에 뛰어나서 그리 붙인 것인가. 도요토미든 주원장이든, 사람은 나고 볼 일이다. 바둑에도 이리 이름을 남기다니.



자, 이건 그냥 재미고 이제는 현실이다. 1861년 일본에서 막부가 무너지고 사회가 혼란스러웠지만 메이지유신은 성공했다. 경제는 성장했고 사회는 발전했다. 문화는 다시 활달해졌다. 바둑계도 부진을 털어내기 시작했다. 1924년 일본기원으로 대통합을 이뤄낸 뒤 바둑계는 시야를 넓혀 28년 우칭위안을 중국에서 데려오는 등 활력을 얻고 있었다. 희망과 활력은 권위의 몰락에서도 왔다. 일본 제일의 바둑 가문 혼인보(本因坊)가 일본기원에 합류하자 봉건적 관념과 권위는 힘을 크게 상실했다. 일본기원 속의 혼인보가 되었기 때문이다.



 

기보 1 천원의 가치가 살아 있는 국면이다. 흑이 우칭위안, 백이 기타니. 흉내와는 별개로 백22, 흑 23이 대단히 좋은 대세점이다.



시대가 활기차다면, 그리고 시야가 넓어진다면, 그 어느 분야든 실험적인 정신은 빛을 본다. 29년 우칭위안 3단은 시사신보(時事新報) 주최 대국에서 기타니 미노루(木谷實) 4단에게 공식 시합에서는 역사상 처음으로 흉내바둑을 시도했다. 기보1이 그것이다.



시합 당일 우연히 둔 것이 아니었다. 대국 며칠 전 우칭위안은 사형(師兄) 하시모토 우타로(橋本宇太郞)와 만난 자리에서 흉내바둑의 아이디어를 이야기했다. 하시모토는 적극적으로 격려했다. “그거 흥미롭군. 꼭 한번 해보게!” 반상의 조건만을 생각하면 누구나 착상할 수 있는 것이 흉내바둑. 문제는 시도.



훗날 우칭위안은 회고했다. “기타니가 몇 차례 방을 나가는 등 불만이 가득했는데 아마도 흉내의 전략을 이해 못한 듯했다. 63수까지 둔 다음 흉내를 멈추었는데 예상했던 것처럼 형세는 흑이 아주 좋았다.” 당시는 흑이 백에게 부담해야 하는 덤 제도가 정착되지 않았던 시절. 흑이 따라 두면 유리할 것은 불문가지다.



흉내와 별개로 중앙의 천원 자리에 첫수를 두는 이유는 역사적으로 두 가지였다. 하나는 천원을 태극(太極)으로 보는 태극설이고, 다른 하나는 천원을 북극성으로 보는 천문학의 이해였다. 그 어느 것이나 반상 밖의 사실 또는 철학을 반상에 투사하는 태도였다.



우칭위안은 달랐다. 우칭위안은 반상에 대해 아무런 선입견이 없었고 반상 밖의 권위에 대한 두려움도 없었다. 단지 반상의 논리만으로 반상을 바라봤다. 덤이 없으니 흑은 백을 가만히 따라 두는 것만으로도 불리할 이유가 없다. 좌우 대칭이니 결국엔 천원 흑 한 점이 힘을 발휘할 것이고 그만큼 유리할 것이다.



 “바둑 질서 무너뜨린다” 애기가들은 반대1939년 혼인보전이 창설되면서 기전에서 처음으로 4집의 덤을 채택했다. 먼저 두는 흑에게 선착의 이점이 있는 만큼 그 이점을 백에게 4집 되돌려주어 공평하게 하자는 아이디어가 덤이다.



덤은 흑에게 부담을 주었다. 과연 천원에 첫수를 두어 흉내바둑을 두면 덤을 부담할 수 있을까. 거의 불가능하다. 천원 한 점의 가치가 덤의 크기를 상쇄할 정도는 되지 않는다는 것이 연구의 결과였다. 그랬다. 덤이 등장하자 흑의 흉내바둑은 곧 자취를 감추는 듯했다.



하지만 흉내바둑은 발전했다. 아니, 덤이 있기에 흉내바둑의 아이디어는 더욱 진보했다. 1950년대 후지사와 구라노스케 9단은 백으로 흉내바둑을 시도하기 시작했다. 아이디어는 이렇다. 백이 흑을 따라 두면 시간이 지날수록 흑은 덤 내기가 힘들다. 따라서 흑은 빠른 시간 안에 천원에 한 점을 놓아서 백의 흉내를 중단시켜야 한다. 그럴 때 과연 덤을 낼 형세가 이루어질까?



어려운 연구과제가 바둑에 던져졌다. 흑은 흉내를 당할 때 어떤 방법으로 대응해야 할까. 아이디어가 속출했다. 흉내를 당한 흑은 대형정석을 유도하려 했고 축머리를 이용할 수 있는 정석을 택하기도 했다.



프로들은 연구에 연구를 거듭했다. 반상 밖 애기가들의 반대는 대단했다. 바둑의 질서를 무너뜨린다는 비판은 그나마 나은 것이었다. 그래도 후지사와 9단은 “만인이 반대해도 나는 한다”는 태도로 흉내바둑을 실전에서 실험했다. 실로 소신 있는 태도요, 바둑의 지평을 넓히는 연구였다.



애기가들의 이해와는 달리 흉내는 쉬운 게 아니다. 대단히 어렵다. 일반적으로 흉내를 내는 쪽이 시간을 많이 쓰는 것도 그 때문이다. 언제 중단할 것인지의 판단이 어렵다. 이론적으로 초점은 천원의 가치를 다루는 데 있다.



후지사와만 흉내를 시도했을까. 한국에서도 흉내는 가끔 시도되었고 최근에도 없지 않다. 유명한 것이 80년 11월 제15기 왕위전에서의 흉내다. 도전자 서봉수 7단은 조훈현 8단에게 도전 2국, 4국, 5국을 연속해서 흉내를 시도했다. 그것도 모두 백으로 시도했고 또 세 판 모두 이겼다. 3대2로 타이틀을 획득했다. 당시 상금 1위 기전이 왕위전이었다.



국후 서봉수는 말했다. “조훈현은 발이 빠르다. 흉내바둑을 두면 상대가 걷는 만큼 나도 걷는다. 뛰면 나도 뛰고. 흉내는 상대의 발을 붙잡는 방법이었다.” 서봉수는 싸움이 강하지만 날렵한 행마에서는 조훈현을 따르지 못했다.



그 직후엔 강훈 6단이 서봉수를 상대로 흉내바둑을 시도했다. 백으로 두 판을 두어 1승1패를 기록했다. 누군가 새로운 시도를 보이면 다들 흥미를 느껴 연구하고 또 두어보고 싶은 법이다.



흉내는 작전의 하나다. 2005년 서울서 열린 제4회 CSK배에서 린하이펑(林海峰) 9단이 이창호 9단을 만났을 때 흉내바둑을 들고 나왔다. 대선배가 아들 뻘 되는 소년에게 말이다. 하지만 프로들은 아무도 이상하다 생각지 않았다. 그 해 7월엔 박승철 7단이 바둑리그에서 백홍석 9단에게 흉내바둑을 펼쳤다. 국후 박승철은 “상대의 성적이 워낙 좋아 변칙작전으로 흔들었다”고 털어놓았다.



 

기보 2 좌상귀가 문제이고 우하귀는 해결책의 하나. 우상귀와 좌하귀는 먼저 따내는 쪽이 손해라는 것을 보여준다.



흉내와 표절은 다르지만 반감 강해권위가 강한 곳에서는 흉내는 쉽지 않다. 일본의 권위 하나 보자. 1839년 혼인보 슈와(秀和)와 산치(算知)의 대국에서 문제가 나왔다. 기보2의 좌상귀가 바로 그 문제. 흑도 백도 A를 두면 상대가 A 두는 것에 비해서 손해다. 우상귀와 좌하귀가 바로 그것. 복잡하다. 우하귀 백3도 있다. 이후 백은 흑B 백C 흑1까지 패로 버틸 수 있다. 제자들이 해결책을 묻자 슈와가 답했다. “따지 않고 (백의) 3집.” 그 이후 그 형태가 나오면 ‘따지 않고 3집’이 통용되었다.



일본은 백년도 넘게 권위에 의존해 그 형태가 나오면 ‘따지 않고 3집’을 적용했다. 그러다가 1989년에 와서야 실전에서 해결하도록 규칙을 고쳤다. 권위에 대한 의존도가 그 정도였다.



흉내는 표절과는 다른 것이지만 그래도 흉내바둑에 대한 반감이 적지는 않다. 바둑에 대해서 우리가 뭔가 기대하기 때문일까. 흉내바둑에 대해 천박함을 느끼는 이유는 사실 우리가 고고해서가 아니라, 흉내에 대한 주위의 비판을 두려워하기 때문일 수도 있다.



흉내는 건전하다. 인간이 성장할 때 필요한 것은 통과의례. 어떻게 하는가. 어린아이는 형을 따라 하고 청소년들은 영웅을 모방한다. 대중들의 스타 따라하기는 또 어떤가. 패션이 없다면 사회는 질서를 유지할 수 있을 것인가. 문화는 지속될 수 있을 것인가. 바둑과 다른가. 바둑에서 추천되는 공부 방법 하나는 명인의 수법을 따라하는 것이다.



 



문용직 객원기자·전 프로기사moonro@joongang.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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