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단아하게 따스하게… 하프의 ‘마력’ 증폭

중앙선데이 2015.11.22 00:30 454호 27면 지면보기

러시아 출신 하프 연주자 올가 세베르비치가 연주하는 모습.

글린카



아름답고 단아하다는 말이 절로 나온다. 연주자가 들려주는 음악, 그의 자세, 착용한 검은 색과 은빛의 상하 의상, 그리고 배음을 엮어내는 왼손의 율동 등이 서로 완벽하게 조화를 이루어 감상자의 눈과 귀를 한 순간도 놓아주지 않는다. 하프라는 악기는 기원 전 그리스나 수메르 문명의 벽화에나 등장하는 역사 속 유물 정도로 인식했는데 상트 페테르부르크 마린스키 극장 소속의 젊은 하피스트 올가 세베르비치(Olga Shevelevich·46)는 내 인식을 완전히 바꿔놓았다. 그가 들려준의 ‘모차르트 주제에 의한 변주곡’을 통해 이 고색창연한 악기가 현대에도 생생하게 살아남아 다른 어떤 악기와도 비견할 수 없는, 조금은 신비감마저 느끼게 해주는 품질 높은 음악을 들려주고 있는 걸 실감했다. 연주도 좋지만 이 여성 하피스트는 무대연출 능력이 탁월하다. 그는 벽화에서 방금 튀어 나와 음악을 들려주는 여신이 아닐까. 단아한 연주자 모습을 보면서 엉뚱한 상상도 했다.


[음악, 나의 동경 나의 위안] 하프연주자 올가 세베르비치

글린카의 이 곡은 본시 그의 많은 피아노 소품 가운데 하나인데 하프 곡이 워낙 드물다 보니 피아노 곡이 자주 전용된다. 이 곡을 피아노로 듣는 것도 좋지만 하프로 듣는 편이 훨씬 감칠맛이 난다. 이 악기 특유의 잔잔한 공명, 사람 손이 직접 닿아 생기는 마찰음의 온기로 음악이 가슴 속에 저절로 스며드는 것만 같다. 올가의 탄탄한 기량, 무희의 절제된 동작을 연상시키는 연주 동작 등으로 아름다운 곡의 매력이 배가된다.



미하일는 두 번째 오페라인 ‘루스란과 루드밀라’로 많이 알려져 있지만 그에게 쇼팽과도 견줄만 한 다양한 피아노 곡들, 특히 소품들이 있다는 것은 별로 알려지지 않은 것 같다. 그의 피아노 곡들을 다시 찾아 듣고 나는 두 번 크게 놀랐다. 먼저 곡들이 하나같이 너무나 아름답고 세련미 가득한 곡들이란 점이다. 다음은 연대가 비슷한 쇼팽과 작품 형식이나 내용, 화법까지 믿어지지 않을만큼 서로 유사하다는 점이다.의 마주르카는 이름만 가리면 쇼팽으로 오해할만큼 선율의 가락과 색채가 유사하다. 왈츠도 녹턴도 그렇다. 푸가는 바흐 곡과 유사하다는 점이 색다른 점이다.



그러나 자세히 들어 보면 색채와 가락이 조금씩 다르고 비교 대상보다 훨씬 밝고 활력에 넘치는 곡들이다. 유사하다는 점 만으로 폄하할 수 없을만큼의 모든 곡들이 아름답고 깊은 서정을 담은 매력적인 음악이다. 쇼팽과의 유사성은 그가 오랜 서구 체재기간 중 녹턴의 창안자인 존 필드에게 작곡법을 배운 것으로 어느 정도 수긍이 간다.발라키레프가 피아노곡으로 만들어 유명해진 노래 ‘종달새’에서 보듯는 러시아 민족정서를 누구보다 잘 그려내는 작곡가로 알려져 있는데 그의 피아노 소품들은 그런 지역정서와는 관련이 없다. 그가 서구 체재기간에 주로 이 작품들이 작곡된 이유도 있겠지만 지역정서에 머물지 않고 음악 보편의 감각을 지닌, 시야가 넓은 큰 작곡가임을 피아노곡들은 보여 준다.



변주곡에는 명편이 많다. 가운데 베토벤의 ‘에로이카 변주곡’, 모차르트의 ‘뒤포르 변주곡’이 먼저 떠오른다. 사실 이 두 작품이 변주곡을 독자영역으로 각인시키는 데 기여했을 것이다. 에로이카는 마리아 유디나 연주가 특별하며 거기 버금갈만한 연주로 리히터의 거장의 이름값을 하는 웅휘한 연주가 있을 정도. 뒤포르는 역시 마리아 유디나 연주를 뛰어넘는 것을 찾기 어렵다. 여기에 올가가 하프로 들려주는 글링카의 ‘모차르트 주제에 의한 변주곡’을 나란히 세워놓고 싶다. 올가 세베르비치의 하프 연주로 서정성 짙은 이 아름다운 곡을 듣는 것은 사치스런 행운일 것이다.



하프 연주자로 웨일스 출신 캐트린 핀치의 활발한 연주 활동이 눈에 띤다. 다소 요란한 무대 제스쳐가 맘에 들지 않지만 바흐의 ‘이탈리안 협주곡’, 파가니니의 ‘베니스 카니발’, 가브리엘 포레의 ‘하프를 위한 즉흥곡’에서 보여주는 뛰어난 연주기량은 하프의 기대주로 손색이 없다. 이 악기가 피아노와 다른 현악기의 영역을 넘나드는 것도 이채롭다. 핀치는 포레의 ‘즉흥곡’ 연주로 다른 악기가 미치지 못하는 하프의 섬세한 세밀화적 묘사력을 뽐낸다. 마치 짙은 안개 속 환영을 그려보는 것 같은 포레의 ‘즉흥곡’을 듣고 드뷔시가 대표작 ‘바다’와 ‘목신의 오후에의 전주곡’에서 왜 시종 하프로 하여금 배경 악기 역할을 하게 했는지 이해가 되었다. 드뷔시는 하프를 위한 곡으로 협주곡 ‘신성한 무곡과 세속의 무곡’, 실내악곡 ‘플루트, 비올라와 하프를 위한 소나타’ 등을 별도로 작곡한 바도 있다.



올가 세베르비치가 보여주는 또 한 편의 변주곡 명연이 있다. 1995년, 그가 갓 음악원을 나온 26세 신예이던 시기, 미국의 하프 경연무대에서 그는 독일 작곡가 슈포르의 ‘변주곡’을 연주하는데 아직 첫 걸음을 떼는 신예지만 무대 연출은 완벽하다. 로맨틱한 곡을 통해 올가는 그의 탄탄한 기량과 함께 하프가 지닌 여러 가지 매력을 골고루 보여주고 있다. 아름답고 단아하다. 그의 연주를 듣고 보는 동안 다른 할 말이 없다.



 



송영 작가sy4003@chol.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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