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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수영 모더니즘, 그 뿌리엔 공자의 정신이 흐른다

중앙선데이 2015.11.22 00:24 454호 28면 지면보기

일러스트 강일구 ilgook@hanmail.net



15년 전쯤 『김수영론(論)』을 펴낸 적이 있는데, 독자들이 진지하게 읽어주고 자주 인용해주어 요즘도 많은 보람을 느낀다. 가끔 나의 저서에만 초점을 맞춘 글도 눈에 띄는데, 그런 글을 읽을 때는 모종의 채무의식에 빠져들기도 한다. 과분한 찬사를 받아 본 사람이라면 쉽게 공감할 수 있는 심정일 것이다. 젊은 시절의 치기가 채 가시지 않은 글에 그토록 많은 관심이 쏠리고 있으니 저절로 부족했던 부분이 눈앞에 맴돈다.


유교적 모더니즘의 실험

그러다 어느 날 그 어떤 호평에도 부끄럽지 않을 당당한 ‘김수영론’을 써보아야겠다는 결심이 들었다. 이런 결심을 실행에 옮기기 위해 얼마 전부터 김수영(1921~68)을 다시 붙잡고 있다. 과연 예전에는 보이지 않던 면모들이 조금씩 나타나기 시작해서 점점 재미가 붙어가고 있다. 게다가 전혀 예상치 못했던 모습을 발견하고 오랫동안 몸서리를 친 적도 있다. 그것은 김수영이 선비의 차림으로 나타날 때였다.



 



양복보다 선비 도포가 어울리는 김수영사실 김수영은 모더니즘 계열의 시인으로 분류된다. 그의 시 정신은 자유라는 한 단어로 압축되곤 한다. 이때 자유는 근대성의 정수를 담는 개념이며 내면적 자율성과 전위적 실험, 그리고 진보적 참여라는 세 가지 구심점을 지닌다. 김수영의 시학은 심미적 창조와 정치적 비판을 통합하여 존재론적 극한으로까지 수렴시켜간다. 근대성의 첨단에 서서 당대의 문화적 낙후성과 정치적 후진성을 소리 높여 질타했던 김수영이었다.



그런 김수영을 계속 읽어갈수록 양복을 차려 입고 나와도 시원치 않을 그의 모습은 자꾸 갓을 쓴 선비로 바뀌어 갔다. 그의 작품 세계 전체가 초지일관 유교 전통의 유산에 물을 대고 있다는 사실이 점점 더 분명해졌기 때문이다. 가령 김수영의 데뷔작은 ‘묘정의 노래’와 ‘공자의 생활난’(1945)이고, 마지막 작품은 ‘풀’(1968)이다. 그리고 그 중간에 ‘폭포’(1957)나 ‘거대한 뿌리’(1964) 같은 시가 있다.



최초의 두 시가 표제어로 내건 묘정(廟庭·사당의 앞뜰)과 공자는 유가 전통의 심장부에 속한다. 공자는 유교의 창시자이고, 묘정이 상징하는 제례(祭禮)는 유교 문화의 근간이다. 김수영은 시인으로서 첫걸음을 내디디면서 자신을 공자의 친구로, 혹은 옛 사당의 복원자로 그리고 있다. 시인으로서 걸어가야 할 길을 군자의 길과 동일시하고, 시인의 역할을 전통을 창신하는 화공(畵工)에 비유하고 있다.



그러므로 20년 후에 발표된 ‘거대한 뿌리’에서 “전통은 아무리 더러운 전통이라도 좋다 … 제3인도교의 물속에 박은 철근기둥도 내가 내 땅에 박는 거대한 뿌리에 비하면 좀벌레의 솜털”과 같은 문장이 괜히 튀어나오는 것이 아니다. 김수영은 나이가 들어서야 불현듯 역사의 중요성을 깨달았던 것이 아니라 청년 시절부터 이미 전통의 중요성을 의식하고 있었다.



 



논어를 패러디한 듯한 마지막 작품 ‘풀’이런 관점에서 읽는다면, 김수영의 마지막 작품인 ‘풀’은 『논어』의 한 대목(12:19)을 현대적으로 패러디한 것이 틀림없다. “군자의 덕은 바람과 같고 소인의 덕은 풀과 같다. 풀 위로 바람이 불면 풀은 반드시 눕기 마련이다(君子之德風, 小人之德草, 草上之風, 必偃)” 이런 원래의 문장이 김수영에게 와서는 “바람보다 늦게 누워도/ 바람보다 먼저 일어나고/ 바람보다 늦게 울어도/ 바람보다 먼저 웃는다”는 전복의 노래로 바뀐다. ‘공자의 생활난’에 나오는 “동무여 이제 나는 바로 보마/…사물의 우매와 명석성을/ 그리고 나는 죽을 것이다”도 마찬가지다. 이것도 역시 『논어』(4:8)에서 자주 인용되는 “아침에 도를 깨치면 저녁에 죽어도 좋다(朝聞道, 夕死可矣)”는 문장을 배경으로 하고 있다.



‘풀’보다 대략 10년 앞서 발표된 ‘폭포’는 단도직입적인 반역의 용기를 그려내고 있기 때문에 현대적 자유의 이념을 표현한다고 평가된다. “폭포는 곧은 절벽을 무서운 기색도 없이 떨어진다/…곧은 소리는 곧은 소리이다/ 곧은 소리는 곧은/ 소리를 부른다/ …나태와 안정을 뒤집어놓은 듯이/ 높이도 폭도 없이/ 떨어진다.” 이런 대목은 앞에서 인용된 시들과 마찬가지로 죽음충동이 숨 쉬는 모더니즘의 정신을 대변하기에 부족함이 없다. 그러나 내가 강조하고 싶은 것은 이런 시들을 모더니즘 계열의 작품으로 간주하는 것만으로는 충분치 못하다는 점이다.



사실 곧음이란 무엇인가. 그것은 선비정신의 핵심 아닌가. 『논어』(6:19)에는 “사람의 삶을 지탱하는 것은 곧음(直)이다(人之生也直)”라는 말이 있다. 성리학의 창시자인 주희는 이 구절을 근거로 곧음을 생명의 원리로 끌어올렸다. 이후 조선의 선비들은 곧음을 공적 실천의 최고 이념으로 발전시켰다. 가령 조선 후기의 사대부 송시열은 세자 책봉의 문제로 숙종의 노여움을 사 정읍에서 사약을 받게 되자 이렇게 일갈했다. “천지가 만물을 낳는 원리와 성인이 만물에 대응하는 원리는 오로지 곧음에 있을 뿐이다(天地之所以生萬物, 聖人之所以應萬物, 直而已)”. 자신이 바른 소리를 했기 때문에 죽임을 당한다는 이야기이기도 하고, 목에 칼이 들어와도 대쪽 같은 선비정신의 절개는 꺾을 수 없다는 이야기이기도 할 것이다.



 



선비정신의 역사 안에서 읽어야 해석 가능김수영의 ‘폭포’는 모더니즘의 역사만이 아니라 이런 선비정신의 역사 안에서 읽어야 한다. “곧은 소리는 곧은 소리를 부른다.” 이런 구절을 통해 모더니즘의 죽음충동은 선비정신의 죽음 충동과 하나로 뒤엉켜 식별 불가능한 것이 된다. 더 정확히 말하자면, 동서의 죽음 충동이 마주 보는 가운데 서로 풍자하고 있다. 이런 장면은 김수영의 다른 작품에서도 종종 나타난다. 가령 ‘공자의 생활난’에서는 국수와 마카로니가, ‘백지에서부터’에서는 쇠라의 점묘화와 선비의 수묵화가 마주 서 있다. 이렇게 시선을 동서로 이중화시켜 상호 풍자의 장면을 연출하는 기법을 염두에 두지 않는다면, 김수영의 시들은 반쪽밖에 읽을 수 없거나 아예 읽을 수 없는 난해 시로 전락한다.



가령 ‘격문’(1961) 같은 것이 좋은 사례다. “편편하고 시원하고”라는 술어가 하늘·땅·물·도시·버스 등 온갖 주어에 반복적으로 결합하면서 길게 이어지는 이 시는 “진짜 시인이 될 수 있으니 시원하고/ … 이 시원함은 진짜이고/ 자유다”로 끝난다. 그런데 왜 이런 시에 격문이라는 제목이 붙은 것인가? 그것은 무엇을 선언하는 격문인가? 이는 『논어』(7:37)에 나오는 “군자의 마음은 평탄하고 물로 쓸어내린 듯 시원하다(君子坦蕩蕩)”는 구절에 기대지않는다면 이해할 수 없다. 시인의 길과 군자의 길을 구별하지 않는 김수영은 불혹의 나이에 이르러 일정한 경지에 들어섰음을 선언하고 있는 것이다.



 



제 3의 상상력의 길 열려고 노력김수영의 작품 중에는 이렇게 유교 전통으로 돌아갈 때야 제대로 읽을 수 있는 것들이 많다. 이런 시들에서 읽어야 하는 것은 무엇보다 시인의 의도와 방법이다. 그 의도는 서양의 모더니즘과 당대의 낙후한 한국적 현실 사이의 거리로 향한다. 그 아득한 거리를 시적 주체로서 살아내고 이겨내기 위한 방법은 유교 전통의 상상력을 현대적 상상력과 마주 세우는 데 있다. 김수영은 두 전통의 상상력을 상호 풍자적인 관계 속에 배치하는 가운데 한국의 문화적 조건에 부합하는 제3의 상상력의 길을 열고자했다.



이런 의도와 방법을 통해 김수영이 우리에게 던지는 궁극의 문제는 유교적 모더니즘의 가능성에 있다. 과연 서양 문화의 첨단인 모더니즘과 동아시아 문화의 근간인 유교 전통은 서로 만날 수 있는가? 서로 자극하고 변용하면서 미래의 역사적 현실에 부합하는 새로운 사유의 패러다임을 정초하는 데까지 나아갈 수 있는가?



 



미래의 선도자 역할 해야 할 동아시아21세기의 동아시아는 서구 진영과 쌍벽을 이루는 정치경제학적 위상을 획득해가고 있다. 이와 더불어 기존의 성취를 설명하고 미래의 선도자로서 인류 전체의 이상적 진로를 가늠하는 이념적 시야를 구축할 필요성까지 내다보게 되었다. 과거에는 유교적 자본주의니 유교적 민주주의니 하는 것이 거론될 때는 그 배후가 의심스러운 경우가 많았다. 아시아의 독재자들이 자신의 정치적 정당성을 급조해내기 위한 방편이기 십상이었다. 그러나 이런 문제가 지구촌의 음지에서나 거론되던 시대는 이미 지나갔다. 21세기의 역사는 동아시아에 위대한 기회를 선물하는 동시에 무거운 책임을 맡기고 있다.



동아시아는 이제까지의 성공을 자화자찬하는 수준에서 벗어나 과연 저성장, 양극화, 생태위기 같은 기존의 정치경제학적 체제가 부딪힌 한계를 극복하고 지구촌 전체의 화해와 희망을 약속할 수 있는 새로운 역사·문화적 비전을 일으켜 세울 수 있는가? 이것은 결코 쉬운 문제도, 단기간 내에 해결될 수 있는 문제도 아니다. 그만큼 수많은 시행착오와 논쟁의 고비를 통과해야 할 것이다. 이런 점을 생각할 때 김수영이 걸었던 여정은 동서 문화의 창조적 횡단을 꿈꾸는 이들에게 오래도록 아름다운 선례로 남을 것이다.



 



김상환 서울대 철학과 교수의 ‘공자의 길, 김수영의 길’이 오늘부터 연재됩니다. 동서양 철학에 정통한 김 교수는 대표적인 모더니즘 시인인 김수영에 대해 깊이 있는 연구를 해왔습니다.



김 교수는 김수영 시인의 모더니즘에서 유교사상과의 접점을 확인하고, 이를 통해 ‘동아시아 시대’를 살아가는 우리가 과연 어떤 방향으로 진로를 잡아야 할지 성찰할 예정입니다.



 



김상환서울대 철학과 교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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