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절정에 달하면 입닫는 이야기꾼 잔치판 열리면 나타나는 셀럽

중앙선데이 2015.11.22 00:18 454호 32면 지면보기

저자: 정명섭 출판사: 이데아 가격: 1만5000원



조선을 호령했던 희대의 엔터테이너는 누구였을까. ‘책의 나라’라고 해도 과언이 아닐 만큼 책을 사랑했던 덕분에 사람들을 울고 웃게 하는 것 역시 책이었다.


『조선의 엔터테이너』

그중에서도 글을 모르는 사람들에게 비싼 책에 담긴 이야기를 읽어주는 ‘전기수(傳奇?)’는 단연 큰 사랑을 받았다. 노래하는 것처럼 흥겹던 목소리가 갑자기 서릿발이 깃든 목소리로 변하고, 미친 듯이 웃는 것 같다가도 부모 잃은 사람처럼 울어 제끼는 연기력까지 겸비했으니 어찌 그가 들려주는 이야기에 빠져들지 않을 수 있겠는가. 한참 이야기 보따리를 풀던 전기수가 절정에 이르러 벙어리처럼 입을 꾹 다물어버리면, 다음 이야기를 듣고 싶어 안달난 구경꾼들이 돈을 마구 던졌다니 벌이도 꽤 쏠쏠했을 듯하다.



전기수가 이야기꾼이라면 ‘책쾌(冊?)’는 아예 수요자와 공급자를 연결하는 중개상이었다. 변변한 서점이 있는 것도 아니다 보니 당시에 책이라는 것은 직접 눈으로 살펴보고 살 수 있는 것도 아니요, 돈이 있다고 해도 바로 살 수 있는 것도 아니었다. 그렇기에 책의 내용과 상태는 물론 누가 어떤 책을 어떤 연유로 가지고 있는지를 꿰뚫고 있는 이들의 역할은 중요할 수밖에 없었다. 영조 때 활동했던 조신선은 그중에서도 출중했다고 한다. 장대한 체구와 푸른 눈동자라는 기묘한 생김새로 수백 년 전 일을 어제 일처럼 읊조리며 무슨 책을 원하는지 꿰뚫어보는 모양새라니. 주막에 그가 한 번 떴다 하면 사람들은 고주망태가 된 그의 곁에 모여 책에 얽힌 이야기를 청했다.



후미진 역사의 뒷골목에 관심이 지대한 저자는 이처럼 조선을 주름잡은 구라꾼과 딴따라, 시객과 환쟁이 32명을 소개한다. 그들이 했던 일은 자연스레 그 시대의 상황과 어우러지고 덕분에 역사 속 개인을 읽는 재미가 쏠쏠하다. 이를테면 1801년 순조가 공노비를 혁파하면서 이들을 대체할 임금노동자로 살던 사람이 1814년 대기근을 맞아 산으로 들어가 샘물만 먹고 살다 물의 맛을 감별하는 수선(水仙)이 됐다거나 성균관에서 허드렛일을 하던 수복 정학수가 양반집 자제들에게 과거 입시 전문 강사로 활약했다는 이야기는 그들 역시 우리네 삶과 별로 다르지 않았구나 하는 생각을 들게 한다.



심지어 몇몇은 지금의 연예인들을 연상케 하기도 한다. 저자는 몰락한 양반이지만 구걸할 배짱은 없어 잔치가 열리는 날이면 산꼭대기에 우두커니 앉아있던 홍봉상에게 ‘미친 존재감’이란 별명을 선사했다. 그를 알아본 사람들이 술과 음식을 보내고 그가 나타나지 않으면 섭섭해 하거나 걱정할 지경이 될 만큼 남다른 존재감을 발현했기 때문이다. 권력가 잔치에 초대받아 엽전을 삼킨 손자를 보고 “할아버지는 수만 냥을 삼키고도 멀쩡한데 그깟 엽전 한 닢 삼킨 게 뭐 어때서”라고 일갈한 ‘세상과 불화한 삐딱이’ 정수동을 보면 버럭 하는 개그맨 박명수나 독설가 김구라가 떠오르지 않나. 예나 지금이나 개성이 있어야 살아나는 법인가 보다.



그러고 보면 TV 채널은 늘어나고 즐길 수 있는 콘텐트는 많아졌지만 우리는 그때보다 무료한 삶을 살고 있을런지도 모르겠다. 분명 깔깔거리고 웃고 있으면서도 다음 ‘빅 재미’를 기대하고, 웬만한 자극에는 놀라지도 않고, ‘더 쎈 놈’을 찾는 걸 보면 말이다. 사실 노는 건 옆에서 보는 것보다 직접 끼어들어야 맛이다. 길거리 난장판에서 싸움 구경을 하든 담벼락에 몰래 낙서를 하고 도망가든 간에 현장과 손맛이 중요하기 때문이다. 그렇다면 단편적으로 소개된 이들 중 마음에 드는 사람을 골라 관련 자료를 더 찾아보고 그 취미를 공유해보는 건 어떨까. 재미지게 한 우물을 파다 보면 언젠가 당신이 ‘셀럽’이 될지도 모를 테니. 심심해 죽겠다고 투정하는 대신 밑져야 본전이란 마음으로 해본다면 말이다.



 



 



글 민경원 기자 storymin@joongang.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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