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역사의 시계 거꾸로 돌린 명분 없는 쿠데타

중앙선데이 2015.11.22 00:03 454호 1면 지면보기

명제: 태종우(太宗雨), 규격: 95x64cm, 그림: 우승우(한국화가)



【총평】


-19- 악역을 자청한 임금 임금 ① ? 태종

14세기 말 동아시아는 많은 변화를 겪었으며, 이러한 동아시아 정세 속에서 조선 건국의 움직임이 일어났다. 원 제국에서 쿠빌라이가 죽은 후 지배층이 분열되고 재정이 어려워지면서 농민들이 경제적인 어려움을 겪게 되었다. 몽골이 약해진 틈을 타서 그동안 차별을 받았던 한족이 거세게 반발했다. 특히 홍건적은 몽골과 치열한 싸움을 펼치다가 한때 몽골군에게 밀려 고려를 침략했다. 이 때 공민왕은 홍건적을 피해 복주(안동)까지 내려가기도 했으나 결국 이성계 등이 홍건적을 격파했다. 일본에서는 미나모토 요리토모가 주사 집안의 주도권을 차지한 뒤 가마쿠라 막부를 설치하고 천황으로부터 쇼군에 임명되었다(1192). 가마쿠라 막부는 13세기 몽골과의 전쟁 이후 무사들의 생활이 어려어지면서 무로마치 막부로 교체되었다. 이때 생활의 어려움을 겪던 서남 해안 지역의 어민과 무사, 상인들이 왜구가 되어 한반도와 중국 해안을 약탈했다. 이에 고려의 최영, 최무선, 이성계 등의 활약하여 왜구를 격퇴하였다. 고려는 홍건적과 왜구의 침입으로 정치적인 불안이 가중되었고, 경제적 위기를 겪었지만, 외적을 물리치는 과정에서 큰 전과를 세운 최영, 이성계 등 신흥 무인 세력이 백성의 신망을 얻으며 성장하게 되었다. 홍건적을 이끌던 주원장(홍무제)는 명을 건국했고, 몽골은 만리장성 북쪽으로 쫓겨나게 되었다(1368). 고려는 원과 명이 교체되는 대외 정세의 변화 속에서 친원 세력과 친명 세력으로 갈라져 정치적인 갈등을 겪었다. 만주를 장악한 명이 함경도와 강원도 경계에 있는 철령 이북 땅이 원래 원에 속하였다는 이유로 이 땅을 관할하는 철령위를 설치하려 했다. 이에 당시 집권자였던 최영은 요동 정벌을 계획하고 이성계에게 요동을 정벌하도록 지시했다. 이성계는 네 가지 이유를 들어 요동 출병에 반대했다(4불가론). 4불가론(四不可論)의 내용은 다음과 같다. “첫째, 작은 나라가 큰 나라를 거역하는 것 (以小逆大), 둘째, (농번기인) 여름에 출병하는 것 (夏月發兵), 셋째, 원정군이 나가면 왜구가 그 빈틈을 노릴 염려가 있는 것 (擧國遠征, 倭乘其虛), 넷째, 장마철에는 활이 제 기능을 발휘하지 못하고 전염병 발생의 우려가 있는 것 (時方暑雨, 弓弩膠解, 大軍疾疫)” 이다. 이성계는 4불가론을 내세워 요동 출병에 반대했으나 받아들여지지 않았다. 그러자 이성계는 명으로 들어가는 길목인 압록강 위화도에서 회군하여 개경으로 진격했다(위화도 회군). 이성계는 최영을 귀양 보내 죽이고, 우왕을 폐위한 후 창왕을 왕위에 세웠다. 대부분 향리 출신의 중소 지주인 신진사대부는 주로 과거를 통해 관직에 올랐다. 공민왕의 개혁을 계기로 정치적으로 성장한 신진 사대부는 홍건적과 왜구를 물리치는 과정에서 성장한 신흥 무인 세력과 함께 권문 세족에 대항하여 사회를 개혁하려 했다. 조준 등 신진 사대부는 권문세족의 대토지 소유로 국가 재정이 어려워지자 이를 해결하기 위해 과전법을 단행했다. 과전법은 국가 재정을 확보함으로써 새 왕조 개창에 이바지하는 한편, 신진 사대부의 경제적 기반을 다져 조선이 양반 관료 사회를 형성하는 데 기여했다. 신진 사대부는 원과 교류하는 과정에서 성리학을 받아들였는데, 성리학은 당시 부조리한 사회를 개혁할 수 있는 사상적 기반이 되었다. 신진사대부는 당시의 현실 인식 및 개혁 방안의 차이에 따라 급진 개혁파와 온건 개혁파로 갈라졌다. 정도전, 조준 등을 중심으로 한 급진 개혁파는 부패한 고려 왕조 안에서는 사회 개혁을 달성할 수 없으므로 새 왕조를 세워야 한다고 주장했다. 이색, 정몽주를 중심으로 한 온건 개혁파는 성리학적 명분이 맞지 않다는 이유로 새 왕조 건설에 반대했다. 결국, 급진 개혁파는 우왕과 창왕을 잇따라 폐위하고 공양왕을 세우면서 정치적 실권을 장악했다. 이들은 새 왕조 건설에 반대한 정몽주 등 온건 개혁파를 제거하고, 이성계를 왕으로 추대하여 조선 왕조를 건국했다(1392). 한편, 정계에서 물러난 온건 개혁파는 향촌으로 돌아가 성리학 연구와 제자 육성에 전념했다. 태조 이성계는 즉위한 뒤 단군 조선을 계승한다는 의미로 나라 이름을 조선이라 하고 한양으로 수도를 옮겼다. 정도전이 수립한 도성 축조 계획에 따라 한양의 건축에는 유교 사상을 반영하려는 의지가 구현되었다. 궁궐 왼편에는 조상의 위패를 받드는 종묘, 오른편에는 토지신과 곡식신에게 제사 지내는 사직단을 두었다. 종묘사직은 나라와 왕실을 통틀어 이르는 말이 되었다. 한양을 드나드는 백성들이 ‘인의예지신(仁義禮智信)’의 유교 덕목을 존중하며 지키기를 바라는 마음으로 동대문은 흥인지문, 서대문은 돈의문, 남대분은 숭례문, 북대문은 숙정문이라 하고, 중앙에 있는 종루는 보신각이라 했다. 국정을 주도한 정도전은 민본 사상을 강조하고 “조선경국전”을 편찬하여 조선 왕조의 통치 규범을 종합적으로 제시했다. 그리고 의정부를 국정 운영의 중심으로 하는 재상 중심의 관료 체제를 갖추었다. 또한 정도전은 “불씨잡변”을 저술하여 불교의 폐단을 비판하고, 성리학을 통치 이념으로 확립시켰다. 조선은 성리학을 건국 이념으로 삼았으므로 불교는 크게 위축되었다. 두 차례의 왕자의 난을 통해 왕위에 오른 태종은 국왕 중심의 통치 체제를 정비했다. 태종은 6조 직계제를 시행하여 6조에서 의정부를 거치지 않고 곧바로 왕에게 재가를 받도록 함으로써 의정부의 힘을 약화시켰다. 또 언론 기관인 사간원을 독립시켜 대신들을 견제했으며, 사병을 없애고 국왕의 친위 군사를 늘렸다. 태종은 세금과 군역을 확보하기 위해 양전 사업과 호구 파악에 노력했고, 호패법을 시행했다. 호패란, 16세 이상의 남자가 지니고 다니던 신분 증명 패이다. 또 사원이 소유한 막대한 토지를 몰수하고 사원에 억울하게 소속된 노비를 조사하여 해방함으로써 사원의 경제적 기반을 축소했다. 조선의 중앙 정치 체제는 경국대전으로 법제화되었다. 관리에는 문반과 무반의 양반이 있었고, 관직은 중앙 관직인 경관직과 지방 관직인 외관직으로 나누었다. 경관직은 국정을 총괄하는 의정부와 그 아래에 왕의 명령을 집행하는 6조를 중심으로 편성되었다. 6조 아래에는 여러 관청이 소속되어 업무를 나누어 맡음으로써 행정의 전문성과 효율성을 높일 수 있었다. 사헌부, 사간원, 홍문관의 3사는 언론 기능을 담당했다. 사헌부는 관리의 비리를 감찰했고, 사간원은 왕이 잘못을 저질렀을 때 이를 비판하는 일을 했다. 홍문관은 왕의 자문 기관으로서 학문을 연구하면서 언론 기능을 담당했다. 3사의 말과 글은 고관은 물론이고 왕도 함부로 막을 수 없었다. 왕의 비서 기관인 승정원은 왕명의 출납을 맡았고, 한성부는 수도의 행정과 치안을 담당했다. 춘추관에서는 역사서 편찬과 보관을 담당했고, 예문관에서는 임금의 교지를 작성했다.사법기관으로는 반역 등 중대 사건을 다루는 의금부, 상민의 범죄를 처리하는 포도청, 관리를 감찰하는 사헌부, 노비 문서의 관리와 노비 소송을 맡아보던 장례원이 있었다. 지방에서는 관찰사와 수령이 관할 구역 내의 사법권을 가졌다. 형법에 관한 사항은 “경국대전”의 형전을 기본으로 하고 명의 기본 법전인 “대명률”을 따랐는데, 죄의 경중에 따라 태, 장, 도, 유, 사 5종의 형벌이 시행되었다. 범죄 가운데 반역죄와 강상죄가 가장 무겁게 처벌되었고, 연좌제가 적용되어 범인은 물론이고 부모, 형제, 처자까지도 함께 처벌했다. 조선은 전국을 8도로 나누고, 그 밑에 약 330여 개의 군현을 두었다. 고려 시대까지 특수 행정 구역이었던 향, 부곡, 소도 일반 군현으로 승격하여 중앙 집권적 통치 체제를 갖추었다. 모든 군현에는 수령을 파견하여 국가가 직접 지배했다. 군현 아래에는 말단 행정 조직으로 면, 리, 통을 두었다. 중앙 정부에서는 8도에 관찰사를 파견하여 수령의 비리를 견제했다. 관찰사는 감찰권, 행정건, 사법권은 물론이고 병마절도사를 겸하여 지방 병권까지 장악했다. 군현에는 부사, 목사, 군수, 현령 등의 수령을 파견했다. 수령은 왕의 대리인으로서 지방의 행정권, 사법권, 군사권을 가지고 있었다. 수령을 파견할 때는 부정부패를 막기 위해 그 지역 출신을 임명하지 않았다(상피제). 고려의 향리가 지역의 자치를 담당하였던 것과는 달리 조선의 향리는 수령의 행정 실무를 보좌했다. 조선은 건국 후 고려 왕조와는 달리 양천 제도를 법제화하여 모든 백성을 양인과 천인으로 나누고, 가능하면 특권층과 천민을 줄이고자 했다. 양인은 조세, 공납, 역의 의무 부담하였고, 과거 응시 자격이 있어 관직에 진출하는 데 법적 제한이 없었다. 천인은 국역의 의무는 없지만 국가나 개인에게 소속되어 각종 천역을 담당했다. 조선은 건국 초부터 군역 제도를 정비했다. 태종 이후에는 사병이 모두 폐지되었고, 16세 이상 60세 이하의 모든 양인 남자는 군역의 의무를 지게 하는 양인개병제를 시행했다. 조선의 관리는 과거, 취재, 음서, 천거 등을 통해 선발되었다. 과거에는 문관을 뽑는 문과와 무관을 뽑는 무과, 기술관을 뽑는 잡과가 있었다. 문과에는 3년마다 정기적으로 시행하는 식년시와 부정기 시험인 증광시, 알성시 등이 있었다. 식년시는 초시에서 각 도의 인구 비례로 뽑고, 2차 시험인 복시에서 33명을 선발한 후, 왕 앞에서 시행하는 전시에서 최종 순위를 결정했다. 문과에 응시하기 위해서는 소과에 합격하여 생원이나 진사가 되어야 하였으나 나중에는 별다른 제한을 두지 않았다. 소과 합격자는 성균관에 입학하거나 문과에 응시할 수 있었고, 하급 관리가 될 수도 있었다. 무과도 문과와 같은 절차를 거쳐 치러졌다. 무과에서는 무예와 병서뿐 아니라 유교 경전도 시험 과목에 포함되었다. 역과, 율과, 의과, 음양과 등 잡과도 3년마다 치러졌는데 초시, 복시만 있고 분야별로 정원이 있었다. 재주가 부족하건 나이가 많아 과거 응시가 어려운 사람들은 취재라는 특별 채용 시험을 거쳐 하급 실무직에 임명되기도 하였다. 과거에 응시할 수 있는 자격은 천인을 제외하고는 특별한 제한이 없었다. 그러나 일반 백성은 경제적 여건이나 사회적 처지 때문에 과거에 응시하는 것이 쉽지 않았다. 권력의 집중과 부정을 막기 위해 상피제를 두어 가까운 친?인척끼리는 같은 관서에 근무하지 않도록 하였고, 출신 지역의 지방관으로도 임명하지 않았다. 친족이 과거에 응시할 때는 고시관이 될 수 없도록 하여 권력의 집중과 부정을 막았다. 5품 이하의 관리를 등용할 때는 사헌부와 사간원의 대간이 심사하여 동의하는 서경의 절차를 거쳐야 임용될 수 있었다. 조선은 고려의 교육 제도를 이어 받아 한성에 최고 교육 기관인 성균관을 두었다. 성균관의 입학 자격은 생원과 진사를 원칙으로 하였는데, 성적이 우수한 학생은 문과의 초시를 면제해 주었다. 중등 교육 기관으로는 중앙의 4학과 지방의 향교가 있었다. 4학은 중학, 동학, 남학, 서학을 말하는데, 정원은 각각 100명이었다. 향교는 성현에 대한 제사와 유생 교육, 지방민의 교화를 위해 부, 목, 군, 현에 각각 하나씩 설립했다. 양반은 물론이고 평민도 입학할 수 있었다. 한편, 잡학은 해당 기술 관청에서 직접 교육을 담당했다. 외국어는 사역원에서, 의학은 전의감과 혜민서에서, 천문.지리.점복은 관상감에서, 도교는 소격서에서, 그림은 도화서에서 각각 가르쳤다. 잡학은 평민 자제들이 주로 배웠으나 의학과 역학은 양반 자제들이 배우기도 했다. 사립 교육 기관으로는 서당과 서원이 있었다. 초등 교육을 담당한 서당에서는 4학이나 향교에 입학하지 못한 선비와 평민의 자제가 교육을 받았다. 서원의 시초는 풍기 군수 주세붕이 안향을 추모하기 위해 세운 백운동 서원이었다. 뒷날 이 서원은 이황의 건의에 따라 소수 서원이라는 현판을 국왕에게 하사 받았다. 이후 국가에서는 현판을 하사받은 서원에 토지, 노비, 서적 등을 지급하고 면세의 특권까지 주었다. 서원에서는 봄, 가을로 향약을 읽고 잔치를 벌이는 향음주례를 지냈고, 인재를 모아 학문도 가르쳤다. 서원이 향촌 사회의 교화에 이바지하였으므로 국가에서는 서원의 설립을 장려했다. 서원은 학문과 교육의 발전에 이바지했고, 당파의 결속을 강화하여 붕당의 토대가 되기도 했다.







【핵심 키워드】



☞ 홍건적과 왜구를 물리치는 과정에서 [신흥 무인 세력]이 성장하게 되었다. 이성계는 최영의 요동 정벌을 계획에 [4불가론(四不可論)]을 내세워 반대하였으나, 받아들여지지 않자 이성계는 위화도에서 회군하여 개경으로 진격했다([위화도 회군]) 공민왕의 개혁을 계기로 정치적으로 성장한 [신진 사대부]는 신흥 무인 세력과 함께 권문 세족에 대항하여 사회를 개혁하려 했다. 신진 사대부는 [과전법] 단행으로 국가 재정을 확보하고, 신진 사대부의 경제적 기반을 다져 조선이 양반 관료 사회를 형성하는 데 기여했다. 신진 사대부는 원과 교류하는 과정에서 [성리학]을 받아들였는데, 성리학은 당시 부조리한 사회를 개혁할 수 있는 사상적 기반이 되었다. [급진 개혁파]는 [온건 개혁파]를 제거하고 정치적 실권을 장악했으며, [이성계]를 왕으로 추대하여 [조선]을 건국했다(1392). 태조 이성계는 [단군 조선]을 계승한다는 의미로 나라 이름을 조선이라 하고 [한양]으로 수도를 옮겼다. 조선의 중앙 정치 체제는 [경국대전]으로 법제화되었다. 관리에는 [문반]과 [무반]의 [양반]이 있었고, 관직은 중앙 관직인 [경관직]과 지방 관직인 [외관직]으로 나누었다. 경관직은 국정을 총괄하는 [의정부]와 그 아래에 왕의 명령을 집행하는 [6조]를 중심으로 편성되었다. [사헌부, 사간원, 홍문관의 3사]는 언론 기능을 담당했다. 왕의 비서 기관인 [승정원]은 왕명의 출납을 맡았고, [한성부]는 수도의 행정과 치안을 담당했다. [춘추관]에서는 역사서 편찬과 보관을 담당했고, [예문관]에서는 임금의 교지를 작성했다. 조선은 전국을 [8도]로 나누고, 그 밑에 약 330여 개의 군현을 두었다. 모든 군현에는 수령을 파견하여 국가가 직접 지배했다. 수령을 파견할 때는 부정부패를 막기 위해 그 지역 출신을 임명하지 않았다([상피제]). 조선은 건국 후 고려 왕조와는 달리 [양천 제도]를 법제화하여 모든 백성을 양인과 천인으로 나누고, 가능하면 특권층과 천민을 줄이고자 했다. 태종은 국왕 중심의 통치 체제를 정비했다. 태종은 [6조 직계제]를 시행했으며, 세금과 군역을 확보하기 위해 양전 사업과 호구 파악에 노력했고, [호패법]을 시행했다. 태종 이후에는 사병이 모두 폐지되었고, 16세 이상 60세 이하의 모든 양인 남자는 군역의 의무를 지게 하는 [양인개병제를] 시행했다. 조선의 관리는 [과거], 취재, 음서, 천거 등을 통해 선발되었다. 과거에는 문관을 뽑는 [문과]와 무관을 뽑는 [무과], 기술관을 뽑는 [잡과]가 있었다. 조선은 최고 교육 기관인 [성균관]을 두었다. 중등 교육 기관으로는 중앙의 [4학(중학, 동학, 남학, 서학)]과 지방의 [향교]가 있었다. 사립 교육 기관으로는 [서당]과 [서원]이 있었다. ☜



 



【예상 문제】



1. (가) 기구에 대한 설명으로 옳은 것은?



태조가 고려의 법을 따라 (가)을/를 설치하여 대사헌을 비롯한 20명의 관리를 두었다. … (중략) … 재상이나 대신이 허물이 있으면 법으로 규탄하고, 종친과 외척 중에 교만하고 사나운 자가 있으면 탄핵한다. 곧은 자를 천거하고 굽은 자를 버리며, 흐린 것을 배격하고 맑은 것을 찬양한다. 정색하고 조정에 서면 모든 관료가 떨고 두려워 한다. 그 책임이 어찌 중차대하지 않겠는가. ? ? ? ? ? ? ? ? ? ? ? ? ? ? ? ? ? ? ? ? ? ? ? ? ? ? ? ? ? ? ? ? ? ? ? ? ? ? ? ? ? ? ? ? ? ? ??-『연려실기술』-



① 6조를 관할하며 국정을 총괄하였다. ② 화폐와 곡식의 출납에 대한 회계를 맡았다. ③ 중서문하성과 중추원의 고관으로 구성되었다. ④ 권력의 독점과 부정을 방지하는 기능을 하였다. ⑤ 국왕의 비서 기관으로 왕명 출납을 담당하였다.

*2013년 10월 학력평가 11번



 



2.?(가)에 대한 설명으로 옳지 않은 것은?

우리나라의 가르치는 방법은 중국의 제도를 따라 중앙에는 성균관과 사학(四學)을 두고 지방에는 향교를 두었으니 좋다할 만합니다. 그러나 유독 (가) 이/가 설치되었다는 말은 들은 바가 없었으니, 이는 우리 동방의 큰 결점이었습니다. 그러던 중 주세붕이 이를 세울 뜻을 가다듬어 전례에 없던 장한 일을 단행하였습니다. 이는 하늘이 우리로 하여금 중국과 같게 하도록 하는 것입니다.?

① 선현에 대한 제사와 교육을 담당하였다.② 사림의 정치적 여론을 형성하는 근거지였다.③ 수령 보좌를 목적으로 설치된 자문 기관이었다.④ 성리학 연구와 지방 문화 발전에 이바지하였다.⑤ 영조 때 붕당의 기반이라는 이유로 대폭 정리되었다.

* 2014학년도 6월 모의평가 2번



 



3.?(가) 인물에 대한 설명으로 옳은 것은?

큰일을 이루신 후, 저희를 재상의 높은 자리에 앉게 하시고, 개국 공신의 첫째로 이름을 올려 주셨습니다. 신은 (가) 등과 세운 공도 같았고, 처음에는 뜻으로 함께 하였습니다. 그러나 (가)이/가 중국의 천자에게 죄를 얻으면서부터, 남은과 결탁하여 요동을 치자고 꾀해서 한 몸의 화를 면하려 하였습니다. 신이 병을 무릅쓰고 기운을 내어 전하를 뵙고 전하의 뜻을 돌이키니, 간사한 계책이 드디어 저지되었습니다.

① 경제육전을 편찬하였다.② 재상 중심의 정치를 주장하였다.③ 전면적인 토지 제도 개혁에 반대하였다.④ 위화도 회군을 계기로 정계에서 제거되었다.⑤ 재야에서 후진을 양성하여 사림 형성에 영향을 주었다.

* 2013학년도 수능 12번



 



4.?(가), (나) 교육 기관에 대한 설명으로 옳은 것은?

? (가)에는 양인 이상의 신분이면 누구나 입학할 수 있었으며, 생원.진사시를 준비하는 교육을 받았다. 동학, 서학, 남학, 중학이 있으며, 지방의 학생들도 각 도의 추천을 받아 입학할 수 있었다.? (나) 은/는 성현에 대한 제사와 유생의 교육, 주민의 교화를 위해 부, 목, 군, 현에 하나씩 설치되었다. 이에 대한 관리를 수령 7사에 포함시켜 수령의 평가 기준으로 삼았다.

① (가)는 초등 교육을 담당하는 교육 기관이었다.② (가)에서는 유학부와 기술학부로 편성하여 교육하였다.③ (나)의 입학 자격은 생원, 진사를 원칙으로 하였다.④ (나)에 중앙 정부에서 교수 또는 훈도를 파견하였다.⑤ (가)는 사립, (나)는 국립 교육 기관이었다.

* 2012학년도 수능 6번



 



5.?(가)에 대한 설명으로 옳은 것은??

역사 Q & A

Q 궁금 합니다

(가)의 일대기를 정리해 주세요.

A 답변입니다

19세 성균시에 합격48세 조준, 정몽주 등과 공양왕 추대51세 개국 일등 공신 책봉53세 『심기리편』저술, 한양 천도 주도54세 『고려국사』편찬57세 1차 왕자의 난으로 사망



① 노장 사상과 양명학을 포용하려 하였다.② 경연을 강화하고 위훈을 삭제하 것을 주장하였다.③ 주례의 통치 이념을 바탕으로 한 법전을 편찬하였다.④ 고조선에서 고려 말까지의 역사를 편년체로 서술하였다.⑤ 화약 무기의 제작과 사용법을 정리한 병서를 편찬하였다.

* 2011학년도 6월 모의 평가 13번



 



6.?다음은 조선 시대 왕과 신하의 가상 대화이다. (가)에 들어갈 신하의 대책으로 가장 적절한 것은?





① 음서의 적용 대상을 늘리는 것이 좋겠습니다.② 좌주와 문생의 관계를 강화하는 것이 좋겠습니다.③ 경재소와 유향소의 관계를 강화하는 것이 좋겠습니다.④ 과거와 취재의 절차를 엄격하게 하는 것이 좋겠습니다.⑤ 상피를 강화하여 권력 집중에 따른 부정을 막는 것이 좋겠습니다.

* 2008학년도 9월 모의 평가 9번



 



7.?그림의 대화에 나타난 업무를 수행한 기구의 기능으로 가장 적절한 것은?





① 수도의 행정과 치안을 담당하였다.② 왕에게 경서 강론의 일을 담당하였다.③ 왕의 명령을 받들어 관리에게 하달하였다.④ 왕의 잘못을 논하는 간쟁의 업무를 담당하였다.⑤ 역사서를 편찬하고 사고에 보관하는 일을 주관하였다.

* 2008학년도 6월 모의평가 11번

?



8.??밑줄 친 ㉠~㉤에 관한 설명으로 옳지 않은 것은?

조선 시대의 관리는 과거와 취재, ㉠음서, 천거를 통하여 선발되었다. 과거에는 문관을 뽑는 ㉡문과와 무관을 뽑는 ㉢무과, 기술관을 뽑는 ㉣잡과가 있었다. 문과는 3년마다 실시되는 정기 시험인 식년시와 부정기 시험인 ㉤별시가 있었다.

① ㉠ : 음서 출신은 문과에 합격하지 않으면 고관으로 승진이 어려웠다.② ㉡ : 소과에 합격해야 응시할 수 있었지만, 뒤에는 큰 제한이 없었다.③ ㉢ : 탐관오리의 아들과 서얼에게는 응시를 제한하였다.④ ㉣ : 3년마다 실시되며 분야별로 정원이 정해져 있었다.⑤ ㉤ : 국가에 경사가 있을 때나 성균관 유생을 격려하기 위해 실시되었다.

* 2006학년도 9월 모의평가 5번



 



9.?○ 로 표시된 기구들의 기능과 관련이 가장 먼 그림은?







 



 



 

* 2006학년도 6월 모의평가 12번?

?

10.?조선 시대 신분 제도를 나타낸 그림이다. 이에 대한 설명으로 옳지 않은 것은?





① (가)는 법제적 신분 제도였다.② (가)에서 농민은 과거에 응시하여 관리가 될 수 없었다.③ (나)에서 중인은 문과 응시에 제한을 받았다.④ (나)의 양반에는 문반과 무반 뿐 아니라 그 가족이나 가문까지 포함되었다.⑤ (가)와 (나)의 천민 중에서 대부분을 차지하는 것은 노비였다.

* 2005학년도 6월 모의평가 3번

?



【정답 및 해설】



1. 해설 : 정답 ④④ 사헌부는 관리를 규찰하고, 인사에 대한 서경권을 담당하는 등 권력의 독점과 부정을 방지하는 기능을 하였다.



2. 해설 : 정답 ③③ 수령 보좌와 향리 규찰을 목적으로 설치된 자문기관은 유향소이다.



3. 해설 : 정답 ②② 정도전은 재상 중심 정치를 주장하며 좋은 재상을 발탁해 정치 실권을 부여하여 위로는 임금을 받들어 올바르게 인도하고, 아래로는 백관을 통괄하고 만민을 다스리는 중책을 부여하자고 주장하였다.



4. 해설 : 정답 ④④ 향교에는 그 규모와 지역에 따라 중앙에서 교관인 교수 또는 훈도를 파견하였다.



5. 해설 : 정답 ③③ 정도전은 유가의 이상 제도인 “주례”를 바탕으로 6전 체제의 “조선경국전”을 편찬했다.



6. 해설 : 정답 ⑤제시된 자료에서 왕의 지시 사항은 지방관의 부정과 비리를 막을 수 있는 방법이 핵심이다.⑤ 상피제는 얼굴을 아는 사람들이 서로 피하도록 하는 제도라는 의미로 이를 통해 관리가 저지를 수 있는 부정을 막으려 하였다.



7. 해설 : 정답 ③③ 제시된 자료에서 설명하는 기구는 왕에게 올리는 신하들의 상소를 전달하고, 국왕의 행차를 수행하는 역할을 담당하는 왕의 비서 기관임을 알 수 있다. 조선시대에는 승정원이 이러한 역할을 담당했다. 왕의 명령을 관리에게 하달하는 역할도 아울러 수행했다.



8. 해설 : 정답 ③③ 천인을 제외하고는 특별한 제한이 없었으나, 문과의 경우 탐관 오리의 아들, 재가한 여자의 아들과 손자, 서얼에게는 응시를 제한하였다.



9. 해설 : 정답 ① 사헌부, 사간원, 홍문관의 3사는 언론 기능을 담당했다. 사헌부는 관리의 비리를 감찰했고, 사간원은 왕이 잘못을 저질렀을 때 이를 비판하는 일을 했다. 홍문관은 왕의 자문 기관으로서 학문을 연구하면서 언론 기능을 담당했다. ① 왕명의 출납을 담당하는 것은 왕의 비서 기관인 승정원의 역할이다.



10. 해설 : 정답 ②② 나라에서는 농민이 과거에 응시하는 것을 법적으로 금지하지 않았지만, 과거 준비에는 많은 시간과 비용이 들었으므로 농민이 과거에 응시하는 것은 매우 어려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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