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문화재청·문화유산국민신탁·카툰캠퍼스가 함께하는 역사통(通) 기자단 3기 남한산성

온라인 중앙일보 2015.11.22 00:01

병자호란이 벌어진 춥고 서러웠던 겨울 속으로


남한산성은 조선의 16대 왕 인조와 인연이 깊은 곳입니다. 청나라가 조선을 침입해 일어난 전쟁인 ‘병자호란’ 때 인조가 남한산성으로 피신한 후 항복을 선언했기 때문이죠. 지형이 높고, 경사가 급해 전쟁에 유리한 남한산성에서 인조가 청나라에게 진 까닭은 무엇일까요? 역사통 기자단 3기 기자들이 병자호란에 출전한 장군이 되어 남한산성 성곽을 돌며 곳곳에 새겨진 전쟁의 흔적을 찾아봤습니다.

역사통 기자단 따라잡기
조선의 장군이 되다 ② 남한산성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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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역사통 기자단 3기는 병자호란 당시 인조가 47일 간 머물렀던 행궁에서 답사를 시작했다. 행궁의 정문인 한남루 앞.]


산성 내 왕의 임시 거처, 행궁

1636년 12월, 청나라 황제 태종은 10만 군대를 이끌고 조선에 쳐들어옵니다. 조선의 16대 왕 인조는 다급히 남한산성으로 피했지만, 전쟁에 무방비 상태였던지라 47일 만에 항복하고 삼전도(현 송파구 삼전동)에서 태종에게 무릎을 꿇고 머리를 조아리는 수모를 겪습니다.

병자호란의 설움이 깃든 남한산성에 역사통 기자단 3기가 모였습니다. 한강 남쪽 경기도 광주에 위치한 남한산성은 북쪽의 북한산성과 함께 한양을 지키던 산성입니다. 통일신라 문무왕 때 쌓은 주장성 옛터를 활용해 1624년(인조 2)부터 2년에 걸쳐 승군(승려들이 조직한 군대)들을 동원해 쌓은 것으로 현재 둘레는 11.7㎞에 이르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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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남한산성]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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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추사 김정희가 쓴 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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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외행전 마당에 전시된 통일신라시대 유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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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좌전 영녕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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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내행전 내부]

답사는 산성 내에 위치한 ‘광주행궁’에서 시작했습니다. 행궁은 임금이 궁궐 밖으로 행차할 때 머물던 곳으로 휴양지·피난처 등으로 이용됐죠. 규모는 작지만 왕의 거처인 법궁과 비슷한 시설을 갖춰 전쟁 같은 국가 긴급 상황에도 왕이 안전하게 나라를 운영하도록 했어요. 정문 ‘한남루’를 통해 들어서면 왕이 업무를 보는 ‘외행전’과 침전인 ‘내행전’, 후원이 일렬로 자리하죠. 이를 중심으로 동쪽에는 신하들이 업무를 보는 ‘일장각’과 ‘좌승당’이, 서쪽에는 ‘행각’이 있어요. 광주행궁은 조선 행궁 중 유일하게 건국 이념인 유교사상에 따라 왼쪽에 종묘의 역할을 하는 좌전을, 오른쪽에 사직의 역할을 하는 우실을 두었죠. 현재 우실은 복원되지 못했지만 임시 수도로써 남한산성의 역할을 가늠해 볼 수 있습니다.

행궁 곳곳에는 청에게 당했던 수모를 잊지 않기 위한 징표들이 있어요. 한남루 기둥에는 ‘전쟁을 잊고 다시 일어나라’, ‘아직 복수하지 못했지만 원통해 하지 마라’ 등의 글귀가 적혀 있고, 후원의 정자 ‘이위정’에선 ‘활과 화살이 아닌 인의(仁義)와 충용(忠勇)으로 천하를 다스리라’는 추사 김정희가 쓴 글도 볼 수 있죠. 내행전과 ‘앉아서도 이긴다’라는 의미를 지닌 좌승당을 이어 그만큼 끊임없이 전략을 궁리하겠다는 의지를 표현하기도 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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권서영 역사통 기자단 3기 | “왕이
집무를 보던 외행전 앞 마당 한켠에는 통일신라시대 유적이 남아 있어요. 2005년 남한
산성 행궁터를 발굴하던 중에 나온 초대형 건물터죠. 인화문 토기와 기와 조각, 97개의 주춧돌이 나왔는데 이 유물들에 따르면 통일신라시대 때에는 조선시대 행궁에 비해 3배나 큰 건물이 들어서 있었으리라 추정할 수 있다고 해요.”


글=이민정 기자 lee.minjung01@joong ang.co.kr, 동행취재=역사통 기자단 3기(서울 한산초), 사진=우상조 기자 woo.sangjo@joongang.co.kr·문화재청·중앙포토, 해설=이미숙 경기도 광주시 문화관광 해설사, 진행=권소진 인턴기자, 김인숙 문화유산국민신탁 팀장, 강철웅(한국전통문화대 4)·김지호(한국외대 2)·이현정(한국외대 1) 대학생 멘토, 참고도서= 우리 아이 첫 남한산성 여행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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