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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정민이 만난 사람] 판다 한국행 성사시킨 이세기 한중친선협회장

중앙일보 2015.11.21 00:35 종합 16면 지면보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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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세기 회장은 이기택 전 민주당 총재 등과 함께 4·19의 주역으로 꼽힌다. 당시 고려대 총학생회장으로 ‘4·19 혁명 선언문’을 낭독했다. 개성 출신인 그는 “낮엔 국군 해병대가, 밤엔 인민군이 들어오고 나중엔 중공군이 들어왔다. 전쟁의 경험이 통일에 대한 관심으로 이어졌다”고 한다. [권혁재 사진전문기자]


평화와 우호의 상징인 중국산 판다 한 쌍이 내년 봄 한국에 온다. 비용이 많이 든다는 이유로 청와대가 거절했던 것을 지난달 리커창(李克强) 중국 총리 방한을 계기로 재추진해 성사됐다. 중국의 ‘국보급 동물’로 통하는 판다의 한국행을 이끈 숨은 주역은 4선 국회의원을 지낸 이세기(79) 한중친선협회장이다. 여야를 초월한 ‘한·중 초당파 국회의원 교류’를 이끌고 있는 이 회장은 지난 10일 중국을 방문, 류윈산(劉雲山) 정치국 상무위원과 만나 “중·북 정상회담은 예정돼 있지 않다”는 입장을 확인하기도 했다. 통일부 장관을 지낸 이 회장은 교수(고려대 정치학과) 시절, 분단과 6·25전쟁을 연구하다 중국 공부에 빠져들었다고 한다. 한·중 수교(1992년)를 전후한 시기엔 정치인으로, 정계 은퇴(2000년) 후엔 민간인 신분으로 중국과의 민간 교류를 이어오고 있다. 지난해 방한한 시진핑(習近平) 국가주석이 “라오펑유(老朋友·오랜 친구) 이세기를 만나고 싶다”고 해 두 사람의 만남이 이뤄지기도 했다.

"중국경사론 ? 한·미 갈등 반 이상은 일본의 모함이다"
미·중, 대결 아닌 경제협력 관계
국익 차원 한국 외교의 길 찾아야


 지난 18일 서울 청담동의 한중친선협회에서 이 회장을 만나 ‘한·중 민간외교 30년’의 뒷얘기를 들었다. 그의 사무실 벽면은 역대 중국 실력자들과 함께 찍은 사진들로 가득했다.

 -판다 교류의 아이디어는 어디에서 나왔나.

 “고려대 교수를 할 땐데 학생 데모가 심하니까 뒤에서 내가 선동하는 건 아닌가 의심한 박정희 정부가 휴교령을 풀어주는 조건으로 나랑 김상협 총장 등 4명을 쫓아냈다. 망명하는 기분으로 도쿄대에서 유학을 하게 됐다. 당시 일본을 방문한 덩샤오핑(鄧小平) 주석이 우호의 상징으로 판다 한 쌍을 줘 우에노 공원에서 전시를 했다. 판다를 구경하느라 중·고생들과 도쿄 시민들이 매일같이 줄을 서는 걸 보고 판다가 저렇게 인기가 있구나 하는 걸 알게 됐다. 2013년 박근혜 대통령 당선 특사로 서울에 온 장즈쥔 외교부 상무부부장을 통해 판다 교류를 제안했다.”

 -중국이 선뜻 수락했나.

 “시 주석과의 인연을 설명하면서 ‘한·중 수교 20년인데 판다를 줄 때가 되지 않았느냐. 미국·일본·북한엔 준 것으로 안다. 박 대통령이 중국 갈 때 판다 한 쌍을 줘야 할 것 아니냐’고 했다. 내 말이 시 주석에게 전해졌고. 판다를 주겠다는 연락이 왔다. 그런데 박 대통령이 돈(연간 사육비 10억여원)이 너무 든다며 거절했다. 수소문 끝에 에버랜드가 동물보호기금 등을 부담하는 조건으로 교섭이 돼 급진전이 이뤄졌다. 내년 3월 이전에 에버랜드로 한 쌍이 온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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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세기 회장의 사무실은 시진핑 주석(위), 후진타오 전 주석(아래) 등 중국의 역대 지도자들과 함께한 사진들로 꾸며져 있다. [사진 이세기 전 의원]

 -시 주석과의 인연은 어떻게 시작됐나.

 “저장(浙江)성에 강연하러 갔다가 당시 저장성 서기를 하던 시 주석을 처음 만났다. 그 다음달 시 주석 일행이 서울에 왔을 때 제주도 서복(徐福)공원을 안내해 몇 시간 동안 같이 구경하면서 친숙하게 됐다. 시 주석이 감귤의 내력 설명서를 보더니 ‘제주 감귤의 종자가 우리 고장 저장성 원저우(溫州)에서 온 것’이라며 소년처럼 좋아하던 기억이 선명하다. 그때 국내 신문에 ‘시진핑이 성장주’라는 기사가 난 게 있었는데 그걸 오려서 건네줬더니 싱긋 웃으며 안주머니에 집어넣더라. 그때 야심 있는 사람이구나 짐작했다.”

 서복공원은 진시황의 명을 받고 제주도에 불로초를 구하러 왔다는 서복을 기리는 공원이다. 이 회장이 국회 문화관광위원장이던 97년 서귀포에 서복공원을 만들어 놓으면 중국 관광객 유치에 도움이 될 것이라고 해서 문화부 예산을 배정해 서복공원을 만들었다.

 -시 주석과 다섯 차례 만났는데.

 “2005년 저장성 당 서기로, 2009년엔 상하이 당서기로 올라가 부주석이 돼 또 만났다. 기자들에게 ‘좋은 친구도 몇 사람 사귀었다’며 박 대통령, 반기문 유엔 사무총장, 그리고 나를 꼽았다. ”

 -지난해 시 주석의 서울대 강연 때 이 회장이 특별 초대됐는데 무슨 얘기를 나눴나.

 “하얼빈(哈爾濱)에 안중근기념관을 만들어준 것, 판다를 보내주는 데 대해 감사인사를 했다. 또 한·중 합작으로 안중근 영화를 만들고 싶다는 의향도 밝혔다. 영화 제작 건은 지금 진행 중이다.”

 -시 주석의 리더십을 어떻게 평가하나.

 “마오쩌둥(毛澤東) 이래 가장 막강한 힘을 가진 사람이다. 중국 사람들끼리는 ‘시진핑 대황제’를 약칭해 ‘시따띠’라고 부른다. 꼭 좋은 말은 아니다. 부패를 적발한다고 접대문화를 반으로 줄이라고 하니까 불평들이 나온다. 호텔·식당은 장사가 안 되고 경기가 위축되고 ‘관시 문화’가 안 돌아가니까 숨을 못 쉰다. 시진핑의 꿈은 좋은데 꿈이 너무 크다 보니까 미국과도 마찰이 생기는데 이걸 어떻게 극복하느냐는 문제가 있다.”

 이 회장이 중국에 눈뜨게 한 건 김상협 전 고려대 총장이다. 고려대 학생(정치학과)시절 지도교수인 김 전 총장이 쓴 『모택동 사상』과 강의를 통해 중국을 처음 접했다. 1985년 우연히 참가하게 된 인도네시아 반둥의 비동맹회의(다자 간 군사동맹에 참여하지 않은 국가들 모임)가 인연이 됐다. 한국은 옵서버 자격으로 참여하게 됐는데 당시 외무부 장관(이원경)이 대통령을 방미 수행하는 바람에 통일부 장관이던 이 회장이 대신 참석하게 된 것이다.

 “반둥에서 중국 대표로 온 우쉐첸(吳學謙)과 만나게 됐다. 당시는 수교가 없어 깜깜할 때였는데 미주리대에서 매스컴을 전공하던 우쉐첸의 아들 우시융의 지도교수가 마침 친구인 장원호 교수였다. 한·중 수교 때는 우쉐첸이 외교담당 부총리가 됐는데, 7년간 우시융이 메신저 역할을 했다. 내가 편지를 써서 장 교수한테 보내면 이를 우시융이 다시 베이징의 우쉐첸에게 전달하는 식이다. 체육부 장관으로 88년 올림픽을 준비할 때 우쉐첸에게 중국의 참가 의사를 타진하는 편지를 보냈더니 아들을 통해 ‘내가 외상이어서 갈 순 없지만 성공하기 바란다’는 메시지가 왔다. 우쉐첸과 가깝게 지내다 보니 후진타오 전 주석한테까지 연결이 됐다.”

 -김대중(DJ) 정부 때 주중대사 제안을 받기도 했다.

 “DJ가 야당 때 중국을 방문했는데 우쉐첸이 ‘한국에 잘 아는 친구가 있다’며 내 자랑을 했다고 한다. DJ가 집권해 나에게 중국대사 제안을 했다. 정치노선(당시 한나라당 소속)을 바꾸는 것 같아서 거절했다.”

 -류윈산 상무위원 방북 이후의 북·중 관계를 어떻게 봐야 할까.

 “시 주석 집권 직후 북한이 핵실험을 한 데 대해 중국은 국민적 분노가 일었다. 시 주석이 미·중 정상회담 때 북핵은 안 된다고 천명하자 북한은 배신자라고 중국을 비난해 북·중 관계에 질적 변화가 오는 게 아니냐는 데까지 갔었다. 그러나 중국을 겨냥한 미·일 동맹이 강해지고 미·중 관계가 나빠지니까 중국으로선 북·중 관계를 회복해야 할 필요성을 느낀 것 같다. 류 상무위원의 방북을 계기로 화해의 국면으로 들어섰다고 본다.”

 -북·중 정상회담이 이뤄지지 않는 이유는 .

 “핵 문제에 대한 북한의 변화를 읽을 수 없기 때문에 관계 회복은 했어도 정상회담까지는 결심을 못 하는 것 같다. 시 주석 입장에서도 북핵에 대한 태도 변화 없이 정상회담을 하면 오바마 미 대통령에 대한 약속 위반이 된다.”

 -‘중국경사론’이 나오는 건 우리한테 부담 아닌가.

 “우리 처신이 어려워졌지만 충분히 헤쳐나갈 수 있다고 본다. 미국 입장에선 일본이 소중할수록 일본을 보호하기 위해서도 한국이 필요하다. 동시에 일본을 견제하기 위해서도 한국이 필요하다. 한·미 동맹을 우선해 가면 외교의 지평이 있다. 한·미 갈등의 반 이상은 일본의 모함이다. 중국과 가까워지지 못하게 미국에 대해 ‘한국 믿을 것 못 된다’고 모함한다. 중국경사론은 일본에서 나온 것이라고 본다.”

 -한국 외교가 가야 할 길은.

 “미·중 관계는 과거 미·소 관계와 다르다. 미·소 관계는 이데올로기·군사적 대결이어서 갈 데까지 가는 관계였다면 미·중 관계는 경제협력이 바탕이 되고 있다. 생산국과 소비국, 채권국과 채무국의 관계다. 둘 중 하나가 무너지면 같이 무너지는 경제협력 관계에 있다. 리더십 경쟁은 하지만 전쟁까지 가지는 않는다는 큰 흐름을 내다봤을 때 우리 외교의 길이 있을 수 있다. 국익에 따라 한·미 동맹은 지키고 우선하되 한·중 관계도 잘 발전시킬 수 있어야 한다.”

 -박 대통령은 한·중 정상회담 때 ‘통일 문제도 상의하기로 했다’고 전했다. 통일 논의란 무엇을 뜻하나.

 “두 분이 한 얘기를 누가 알 수 있겠나. 그러나 중국 사람들의 일반적인 성품으로 보아 박 대통령이 통일 문제를 깊이 얘기하고 싶었겠지만 깊이 있는 얘기까지는 가지 않았을 것이다. 통일 문제에 대해 기초적인 의사소통을 한 것 같다고 짐작한다.”

 -소망이 있다면.

 “판문점 지대가 있는 개성이 고향이다. 전쟁의 참화와 분단의 비극을 가장 쓰라리게 겪었다. 소년 시절 꿈이 통일이었고, 그러자면 전쟁부터 알아야겠다고 해서 6·25를 공부하게 됐다…통일이 되는 걸 봤으면 좋겠다.”

글=이정민 정치·국제 에디터 jmlee@joongang.co.kr
사진=권혁재 사진전문기자

[S BOX] “6·25전쟁, 중·소 갈등이 원인” 박사 논문, 36년 만에 책 펴내

새누리당 고문이기도 한 이세기 회장은 6·25전쟁 65주년을 맞아 지난 6월 『6·25전쟁과 중국』(나남)이란 책을 냈다. 마오쩌둥의 신중국이 수립되고 얄타 체제가 무너지면서 만주 장악을 놓고 소련의 최고지도자인 스탈린과 마오가 암투를 벌이는 과정에서 한국전쟁이 격발됐다는 내용이다. 얄타 체제는 소련과 국민당 장제스(蔣介石) 정부가 맺은 협정으로 다롄(大連)·뤼순(旅順)항 이용권과 남만주철도 관할권을 소련에 주도록 한 것이다. 그러나 신중국 수립으로 ‘중국의 주인’이 바뀌면서 만주의 지배권이 다시 중국으로 넘어가는 과정에서 위협을 느낀 스탈린이 김일성의 남침 계획을 승인, 한반도에서 미국과 중국이 대결을 벌이도록 유도했다는 주장이다.

 이 책은 이 회장의 박사학위 논문(1979년)이 바탕이 됐다. 박사학위 논문이 36년 만에 책으로 나온 사연은 이렇다.

 “박사학위 논문에서 한국전쟁이 터진 게 김일성의 적화야욕보다 더 거대한 구조적 차원의 암투, 다시 말해 얄타 체제가 붕괴되면서 중·소 대립이 격화된 상황에서 스탈린이 고안해낸 대중·대미 2중 전략이었다는 틀은 만들었다. 하지만 이를 위한 충분한 증거가 뒷받침이 안 돼 추론으로 맺을 수밖에 없었다. 그러다 2005년 러시아의 문서보관소에서 ‘스탈린이 체코 대통령에게 보낸 비밀 전문’이 발견돼 나의 추론을 뒷받침할 수 있게 됐다.”

 그는 “역사 교과서 국정화 파동도 초점이 6·25에서 시작되는 것인데, 내 책에서 그걸 해부해놨다”고 했다. 그러면서 “교과서를 손봐야 한다는 정부 입장은 맞는다고 보지만 국정화 자체는 무리가 아니냐”고 말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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