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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Saturday] “차창 밖 풍경 보면 위로가 돼요” 402번 기사님 오라이~

중앙일보 2015.11.14 01:25 종합 14면 지면보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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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난 11일 남산순환버스 05번이 늦가을 단풍이 채 지지 않은 남산길을 달리고 있다. 버스의 종착지는 남산서울타워다. [권혁재 사진전문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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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삑, 감사합니다’. 적당한 소음과 덜컹덜컹 몸으로 전해지는 미세 진동, 창밖을 스치는 풍경과 함께 버스가 달린다. 그 안에 수많은 사람이 각자의 사연을 안고 올랐다 내린다. 지금부터 할 이야기는 바로 이 ‘버스’에 대한 것이다.

[현장 속으로] 테마별 서울 버스 이야기
시민의 발
하루 서울 버스 8979대, 500만명 이용
“지하철보다 시선 자유롭고 잠 잘 와”

 하루에 서울을 지나는 버스가 8979대다. 이용자 수는 500만 명이 넘는다. 지난 몇 주 동안 서울에 사는 버스 애호가들을 수소문했다. 생각보다 버스를 좋아하는 사람은 많았다. ‘힘들게 계단을 오르락내리락하지 않아도 되니까’ ‘지하철보다 시선 처리가 자유로워서’ ‘버스 안에서 잠이 더 잘 온다’ 등 이들이 버스를 좋아하는 이유는 각양각색이었다. 하지만 다들 입을 모아 칭송하는 버스의 가장 큰 장점은 바로 ‘창’이 있다는 것. 그래서 혹자는 달리는 버스를 ‘영화관’에 비유하기도 했다. 버스마다 상영 영화는 조금씩 다르다. 이왕이면 더 괜찮은 영화가 보고 싶어 자칭 ‘베테랑 버스 여행가’들을 만나 이야기를 들어봤다.

 ◆아름다운 자연을 느낀다=“아카시아 꽃이 만발한 도로에 진입한 순간, 버스에 탄 승객 모두가 약속이라도 한 듯 창문을 열었어요. 그 순간 느꼈던 사람들과의 교감은 지금도 잊을 수가 없어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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버스에 나란히 오른 잡지 ‘파노라마’의 에디터 이창원씨, 책 『서울 재발견』 저자 이지나씨, 잡지 ‘생각버스’의 대표 이혜림씨(앞줄부터). [권혁재 사진전문기자]


 책 『서울 재발견』의 저자 이지나(31)씨가 마을버스 종로 02번을 타면서 목격한 풍경이다. 종각·삼청동을 지나 와룡공원을 달려 성균관대 후문으로 향하는 마을버스 종로 02번은 이씨가 가장 좋아하는 버스다. 특히 감사원에서 성균관대 후문으로 가는 와룡공원 길은 계절이 변할 때마다 다른 아름다움을 드러낸다. 지난 5일 종로 02번에 올랐을 때는 붉고 노란 단풍은 지나고 나무들이 낙엽을 떨구는 계절이었다. 나무들 아래로는 서울시내가 한눈에 보였다. 버스는 곡선 구간을 따라 도로를 여유롭게 오르내렸다. 그 시간은 야속하리만치 짧게 느껴졌다.

 친구들 사이에서 ‘버스 내비게이션’으로 통하는 이씨는 유난히 마을버스에 마음이 꽂혔다. 종로 02번 외에도 서울시내에서 수송동 계곡까지 가는 종로 09번, 한성대에서 길상사로 가는 성북 02번, 정릉이 종점인 성북 22번 등이다. 이씨는 “서울에서도 자연을 느낄 수 있는 버스를 좋아한다”며 “창가 자리에 앉아 지나가는 풍경들을 보고 있으면 무언가 위로받는 느낌이 든다”고 말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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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402번이 지나는 남산 소월길은 이맘때쯤이면 노란 은행잎이 반은 나무에 달려 있고, 반은 낙엽이 돼 남아 있다. 냄새는 다소 고약하지만 창밖으로 보이는 아름다움까지 부정할 순 없다. 봄에는 벚꽃과 개나리가 만발하고 밤에는 서울의 야경을 감상할 수 있다. 서울 중구 중심가에서 서촌과 부암동, 불광동을 거치는 7022번 버스도 바쁜 일상 속 간편 여행을 즐길 수 있는 노선이다. 주말과 휴일에는 버스 안이 북한산 둘레길을 찾은 등산객으로 복작인다.

 ◆청춘을 싣고 달린다=서울 버스 중 승객의 평균 연령이 가장 낮은 버스는 몇 번일까. 조심스럽게 273번이라고 추측해 본다. 273번은 서울시내에서 경희대·고려대·연세대·한국외대·이화여대·홍익대 등 13개 대학교를 거치는 버스다. 이 버스를 타면 등에 저마다 다른 대학 이름이 새겨진 야구점퍼 차림의 대학생들을 쉽게 만날 수 있다.

 “밤새 졸업작품 설계를 한 뒤 조명이 필요해 종로에 들렀다 273번을 타고 돌아가는 길이었어요. 피곤해 잠깐 눈을 붙였는데 떠 보니 아직도 종로더라고요. 알고 보니 이미 버스가 반 바퀴를 돌아 제가 원래 탄 정류장의 반대편 정류장에 있던 거였어요.” 홍익대 건축학과를 졸업하고 건축 독립잡지 ‘파노라마’를 만드는 이창원(27)씨의 경험담이다. 종로에서 홍익대 정문을 돌아 다시 종로를 거쳐 한국외대 방향으로 향하는 273번에서 학생들이 흔히 겪는 에피소드다.

 압구정·명동·신촌 등 서울 번화가를 지나는 472번 버스는 전신(前身)인 12번 좌석버스 시절부터 오렌지족이 많이 탄다고 해서 ‘오렌지 버스’로 불리기도 했다. 강남과 강북을 가로지르는 472번에 오르면 높이 솟은 빌딩숲부터 한강, 대학가까지 한번에 볼 수 있다.

 “여자친구를 데려다주고 혼자 버스를 탔는데 아직 손에 그 아이의 냄새가 남아 있는 거예요. 버스 안에서 그 냄새를 계속 킁킁 맡으며 행복해하던 기억이 나요.” 인디 뮤지션 기면승(26)의 기억이다. 청춘과 그 시절의 로맨스에는 늘 버스가 있다. 서울에서 승객이 가장 많은 143번 버스의 경우 그 안에서 사랑을 고백하면 이뤄진다는 전설이 있다. 143이 ‘I(1), love(4), you(3)’의 글자 수와 같다는 건데 믿거나 말거나다. 미신에 좀 더 힘을 싣자면 143번 버스의 전신은 국민 첫사랑 수지가 출연한 영화 ‘건축학개론’에서 주인공 서연(수지)과 승민(이제훈)이 탄 710번 버스다. 가는 길 중간중간 코엑스·가로수길·경리단길·대학로 등 데이트 코스가 많은 것도 한몫한다.

 ◆과거와 현재를 오간다=“110번 버스는 노선이 동그란 시계 모양이에요. 버스를 타고 가다 보면 오래된 동네부터 요새 가장 ‘핫’하다는 동네까지 다 나오는데 마치 시간여행을 하는 기분이죠. 그래서 전 이 버스를 ‘시계 버스’라고 불러요.”

 독립잡지 ‘생각버스’를 발행하는 이혜림(24)씨의 말을 듣고 지난 10일 110번 버스를 탔다. 110번 버스는 110A와 110B로 나뉘어 시계 방향과 반시계 방향으로 순환한다. 정릉에서 세검정, 상명대를 지나 지어진 지 40년이 넘었다는 유진상가까지 다다르면 매일 보던 서울시내와 동떨어진 듯한 옛 모습이 묻어난다. 연희동·연남동·신촌 등을 거쳐 녹사평·이태원·한강진 쪽으로 진입하면 그야말로 ‘핫 플레이스’다. 창밖의 풍경은 그곳에서 한 번 변하고, 한남동에서 금호동·마장축산물시장·제기동 등을 지날 때 또 한 번 변한다. 종점인 정릉에 내려 잠시 들른 북한산 국립공원 정릉 매표소 입구에는 늦가을 농익은 단풍이 남아 있었다.

 잡지 ‘파노라마’ 에디터 이창원씨는 비슷한 이유로 420번 버스를 추천했다. 이 버스를 타면 서울 건축물의 역사가 보인다고 했다. 그래서 지난 11일에는 동대문에서 420번 버스에 올랐다. 가장 최근 건물인 동대문디자인플라자를 지나 조금 더 가니 건축가 김수근의 작품인 경동교회가 나왔고 남산을 넘을 때는 한국자유총연맹·반얀트리·국립극장 건물이, 강남에 진입하니 교보빌딩을 비롯한 온갖 신식 빌딩이 즐비했다. 이씨는 “동대문에서 경동교회 가는 구간은 외형을 많이 안 건드리고도 잘 관리된 건물들이 많아 제일 좋아하는 길”이라고 귀띔했다.

 누군가에게는 이들의 ‘버스 찬가’가 사치처럼 느껴질지 모른다. 매일 만원 버스에 몸을 싣고 일터로 향하는 사람들에게 버스는 지옥철에 버금가는 ‘지옥버스’일 터다. 하지만 오히려 그렇기 때문에 버스 여행은 우리가 일상에서 벌일 수 있는 가장 작은 반란이 아닐까. “제게 버스는 일상인 것 같아요. 늘 있는 아이인데, 이 아이의 예쁜 구석을 굳이 찾아보는 거죠. 그러면 무미건조한 일상이 조금은 즐거워지지 않을까요. 1200원짜리(간선·지선버스 성인 카드 기준) 여행 티켓만으로도요.”(이혜림씨)

글=홍상지 기자 hongsam@joongang.co.kr
사진=권혁재 사진전문기자

[S BOX] 서울 버스 다루는 잡지 ‘생각버스’ ‘파노라마’ 인기

독립잡지 ‘생각버스’와 ‘파노라마’는 그 성격이 조금 다르지만 둘 다 서울 버스들을 소재로 한다.

 생각버스는 버스 그 자체에 집중한다. 격월로 버스 노선 한 개를 정해 테마를 붙인다. 그리고 버스 소개와 버스에 담긴 사연, 버스와 관련된 인물 인터뷰 등을 게재한다. 주로 글은 이혜림씨가, 디자인 작업은 이예연씨가 맡는다. 고등학교 때부터 친구 사이인 두 사람은 3년 전 독립출판물을 같이 만들어 보자며 의기투합한 뒤 그 주제로 ‘버스’를 선택했다. 이혜림씨는 “모든 승객의 시선이 손에 쥔 스마트폰에 가 있고, 라디오도 나오지 않는 지루한 버스 안에서 문득 ‘낭만’을 잃어버린 기분이 들었다”며 “버스를 좀 더 다양한 관점에서 생각해 보자는 취지로 생각버스를 기획했다”고 설명했다. 두 사람은 이를 바탕으로 지난 9월 책 『버스로 서울여행』을 출간했다. 가장 최근에는 버스를 사랑하는 뮤지션·작가들을 모아 기획음반 ‘나의 서울 그리고 나의 버스’를 내기도 했다.

 파노라마는 버스를 타고 가면서 스치는 건축물에 주목한다. 건축 전공자와 비전공자가 모여 다른 관점에서 버스 밖 건물을 관찰하고 이야기를 써 내려가는 잡지다. 친구들에게 건축물의 유래 등을 설명하는 걸 좋아하던 이창원씨가 4년 전 기획했다. 1년에 한 권씩 발간해 지금까지 총 4권이 나왔다. 올해 선택한 버스는 150번이다. 이씨는 “버스를 타고 창밖 구경을 주기적으로 하다 보면 같은 장소에 있던 건물이 없어지거나 전혀 다른 종류의 건물이 들어설 때가 있다”며 “그 모습에서 서울의 변화상을 보여 주는 단서를 발견하기도 한다”고 말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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