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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중앙시평] 태평양의 길 vs. 아시아의 길

중앙일보 2015.11.14 00:39 종합 31면 지면보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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장달중
서울대 정치외교학부 명예교수

갈수록 심해지고 있는 미국과 중국의 경쟁관계. 지금 우리가 직면하고 있는 가장 심각한 외교안보 전략 문제다. 실은 아시아 국가들이 공통적으로 직면하고 있는 문제이기도 하다. 이 틈새에서 어떻게 해야 할까.

 이런 아시아 국가들의 고민에 대한 흥미로운 해법이 우리의 눈길을 끌고 있다. 최근 키신저의 전기(傳記) 전편(前篇)을 출간한 하버드대의 역사학자 닐 퍼거슨 교수의 견해다. 아시아 국가들은 미국과 중국 어느 한쪽에 밀착한 것처럼 보이는 것을 피해야 한다는 것이다. 즉 키신저가 그의 저서 『세계질서』에서 언급한 비스마르크의 ‘모호성 전략’을 고려할 필요가 있다는 것이다.

 비스마르크는 외교관 출신으로 독일을 통일한 철혈재상이다. 그에게 동맹국인 오스트리아와 러시아의 갈등은 고민거리가 아닐 수 없었다. 여기서 그가 들고 나온 것이 ‘모호성의 전략’이다. 어느 한쪽에 밀착한 것처럼 보이지 않게 독일-오스트리아-러시아 3국 관계를 모호하게 유지하는 것이었다. 이 전략은 유럽의 파워 게임에서 그 진가를 유감없이 발휘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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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우리에게 시사하는 바가 적지 않다. 우리는 지금 ‘미국과는 어떻게 지낼 것이며, 중국과는 어떻게 지낼 것인가’ 하는 문제로 고민하고 있기 때문이다. 중국은 우리의 경제와 통일에 날로 영향력을 증대시키고 있으며, 미국은 우리의 안보를 보장해주고 있는 전통적인 동맹이다. 이 둘 사이에서 어느 한쪽에 분명하게 ‘편들기’를 하는 것은 위험스러운 베팅이 아닐 수 없다. 그래서 우리는 알게 모르게 모호성의 전략으로 방향을 틀고 있다. 아시아인프라투자은행(AIIB) 가입이나, 박근혜 대통령의 중국 전승절 기념식 참석은 한·미·중 사이에 모호한 3각 관계를 구축하려는 시도로 비쳐지고 있다.

 그동안 우리는 이 모호성의 전략으로 미·중 사이에서 ‘편들기’를 벗어나 주도적 외교 공간을 확보했다는 자부심도 적지 않았다. 하지만 문제는 이 모호성의 전략을 계속 유지할 수 있느냐 하는 데 있다. 미국과 일본 주도의 환태평양경제동반자협정(TPP) 합의와 남중국해 문제를 둘러싼 미·중 간의 갈등이 우리에게 어느 한편의 선택을 강요하는 상황이 벌어지고 있기 때문이다.

 TPP 합의는 단순한 경제협정이 아니다. 미국이 일본과 함께 경제를 넘어 동아시아의 안전보장을 주도할 수 있는 협정이다. 버락 오바마는 “중국 같은 나라에 경제 질서의 룰을 만들게 할 수는 없다”고 했다. 아베 신조는 한 발 더 나갔다. “경제적 이익을 초월한 TPP의 전략적 가치는 ‘놀랄 만한(awesome) 것’”이라고 말했다. TPP 참여를 주저해 왔던 우리에게는 이 말이 경탄이 아니라 위협으로 들린다.

 남중국해에서의 ‘항행과 비행의 자유’ 문제 역시 다르지 않다. 경제 관계는 물론 통일과 안보의 관점에서 비중이 점점 커지고 있는 중국과의 관계에서 볼 때 미국 편을 확실하게 들기 쉽지 않다. 결국 미국 편을 들기는 했지만 우리의 ‘대중경사(對中傾斜)’를 의심하고 있는 미국과 일본의 불편한 기색은 여전해 보인다.

 어떻게 보면 미국과 중국의 대립은 단순한 힘의 대결 차원을 넘어서고 있다. 새로운 국제질서의 룰을 둘러싼 대결이기도 하다. 즉 미국 주도의 ‘태평양의 길(Pacific Way)’과 중국 주도의 ‘아시아의 길(Asian Way)’의 대결인 것이다. 태평양의 길은 법의 지배, 민주주의 규범, 시장주의를 토대로 한 자유주의적 길이다. 이에 반해 아시아의 길은 이를 수정하려는 움직임이다.

 그동안 미국·일본과 함께 태평양의 길을 걸어왔던 우리로서는 이런 변화에 어떻게 대응할지 고민이 적지 않다. 지금 동아시아의 역학구도가 미국 중심의 패권적 질서에서 미·중 세력균형에 토대를 둔 다극형 질서로 이행 중에 있기 때문이다. 이런 현실에서 우리가 택한 모호성의 전략은 그 자체로서 합리적인 것임을 부인하기 어렵다. 다만 문제는 그것을 계속 유지할 수 있는 힘이 우리에게 있느냐 하는 것이다. 비스마르크의 독일은 유럽에서 절대적인 영향력을 행사했다. 하지만 우리는 미국의 안전보장 없이 그런 영향력을 발휘하기 어렵다. 자칫 잘못하면 미·일의 따돌림 속에 아시아의 고아로 전락할 위험도 배제하기 어렵다.

 한·미·일 협조체제는 우리에게 더없이 중요한 자산이다. 미·일과 함께 중국을 대하는 것이 우리에게도 득이 된다. 하지만 중요한 것은 아시아에서 존재감을 높이고 있는 한국의 노력 또한 미국과 일본에 중요한 자산이라는 점이다. 그 때문에 한·미·일 협조체제는 지금의 상태로 그대로 머물러 있을 수는 없다. 진화하든가 퇴보하든가 둘 중 하나다. 태평양의 길과 아시아의 길을 가교하려는 우리의 입장을 미·일에 각인시키는 노력이 더욱 필요해 보인다.

장달중 서울대 정치외교학부 명예교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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