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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노트북을 열며] 다큐가 된 드라마

중앙일보 2015.11.12 00:35 종합 34면 지면보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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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영훈
경제부문 차장

이번에도 나는 순진했다. “대기업 돈은 안 받겠다”는 말을 덜컥 믿었다. 기업 돈을 안 받는 게 “개인 명의 기부이기 때문”이란 설명은 흘려들었다. 그때 눈치채야 했다. 한 달여 만에 700억원이 모인 청년희망펀드의 성격을.

 대기업 명의의 돈은 정말 한 푼도 없다. 총수 개인의 기부가 있을 뿐이다. 이건희 삼성 회장 200억원, 정몽구 현대차 회장 150억원, 구본무 LG 회장 70억원…. 그룹 크기와 총수 기부액은 비례했다. 기부 발표 순서도 재계 순위를 따랐다. 오랫동안 봐 온 기업 모금의 반복이자 거짓말한 사람은 없는데 속은 것 같은 생각이 드는 이유다.

 펀드의 취지는 좋다. 모인 돈은 청년 일자리를 위해 쓰인다. 취지가 좋으니 많이 모아 나쁠 건 없다고 한다. 그러나 취지가 좋아서 더 안타깝다. 첫 회만 해도 감동 드라마의 가능성이 있었다. 펀드를 만들자는 대통령의 제안은 9월 15일 국무회의에서 나왔다. 노사정위원회가 대타협을 한 직후였다. 대타협 정신을 잇는 연상 효과가 있었다. 노블레스 오블리주(지도층의 도덕적 의무) 차원의 펀드라는 총리의 친절한 해설도 있었다. 편성 시간도 기가 막혔다. 속으로 삭였던 세대 갈등이 입 밖으로 분출되기 시작한 시점이었다. “우리 때는 더 힘들었어”와 “꼰대 같은 소리 하네”가 포성처럼 오갔다.

 청년희망펀드가 포성을 멎게 할 노랫소리가 될 수 있다고 기대했다. 독창이 아니라 합창이 되면 말이다. 월드컵 응원, 촛불 집회 등에서 나타났듯 한국 사회는 언제든 감동할 준비가 된 천만 명 단위의 ‘감동 예비군’이 있는 나라(김문조 고려대 명예교수)가 아니던가. 클라우드 펀딩과 핀테크 기술을 잘 물리면 구닥다리였던 성금 모금의 이미지도 바꿀 수 있었다. 게다가 지금은 소셜네트워크서비스(SNS)를 통한 ‘선한 자랑질’이 유행인 시대 아닌가.

 그런데 대통령·총리 순으로 기부를 하는 바람에 드라마는 교양 프로그램이 됐다. 감정 공유 없는 솔선수범은 줄세우기일 뿐이다. 대기업 총수의 정무형 기부는 교양을 다시 다큐멘터리로 만들었다. 거액 모금의 편의성은 십시일반의 자발성을 뭉갰다. 소액 기부에 녹아 있을 절절한 사연도 증발했다. 정부의 기획은 뻔했고, 기업의 상상력은 빈약했다. 그리고 우리는 기회를 또 날렸다. 청·노년 세대가 정서적·경제적으로 연대할 수 있는 얼마 안 남은 기회 말이다.

 이왕 모았으니 돈은 효율적으로 투명하게 쓰였으면 좋겠다. 총선용으로 활용되면 기부가 정치자금이 되는 꼴이다. 이참에 기업의 사회공헌활동(CSR)을 기부 규모로 평가하는 시각도 바꿨으면 한다. 이번 일을 놓고 보자면 후행적 기부보다 기업의 사업 모델 자체를 더 많은 일자리를 만드는 쪽으로 발전시키는 게 진짜배기다. CSR의 본질은 어디에 쓰느냐가 아니라 어떻게 버느냐이기 때문이다. 개처럼 벌어도 정승처럼만 쓰면 되던 시대는 끝났다.

김영훈 경제부문 차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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