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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진석의 걷다보면] 비 그리고 외로움

중앙일보 2015.11.10 10:21
제주올레 트레킹 6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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불안감으로 밤새 뒤척이다 자는 건 포기했다. 어제 우도항을 나와서 일행과 헤어졌다. 시간이 어중간해서 성산항 근처의 여관에 짐을 풀고 소주 한 병 마시고 설핏 잠이 들다 깨기를 반복하면서 어스름한 새벽을 맞았다.

   ‘나 혼자구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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비가 내린다. 많은 비는 아니지만 옷이 젖는 것은 감수해야 했다. 배낭을 메고, 카메라 가방을 또 메고. 카메라는 수건으로 둘둘 말아 비를 막아주고 신발을 신었다. 갑자기 우울해졌다. 날씨 탓이려니 생각하지만 기분이 자꾸 가라앉는다. 머리카락이 살짝 비에 젖더니 금세 옷이며 신발까지 젖어버렸다. 더 우울해진다.
 
일행은 각자의 일상으로 가버렸다. 지금쯤 출근 준비를 하거나 침대 위에서 늦잠을 즐기고 있겠지. 불과 하루 만에 달라지는 삶의 모습에 쓴웃음이 나온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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프리랜서의 삶을 강제로(?) 선언한 후 내 일상에 아주 많은 변화가 생겼다. 그 중 가장 급격한 변화는 ‘시간’이었다. 직장 생활을 할 때는 말 그대로 시간에 갇혀 살았다. 사진과를 졸업하고 무작정 카메라만 들고 현장으로 뛰어들었다. 아무도 인정해주지 않았지만 그저 열심히 하다 보면 언젠가는 인정받을 것이라는 믿음 하나로 시작한 일이었다. ‘말지’ 객원기자부터 ‘오마이뉴스’, ‘여의도통신‘까지, 닥치는 대로 사진을 찍었다. 남보다 늦게 시작한 사진에 고민과 의미를 부여할 여유가 없었다. 무조건 남보다 더 많이 뛰고 남보다 더 많은 사진을 찍어야 했다. 정규직과 비정규직의 차별을 느낄 형편도 못 되었다. 그저 나를 부르면 전국 어디든지 카메라를 들고 달려갔다.
 
사진은 배고픈 직업이었다.
 
어렵게 뜻이 맞는 지인들과 주간지를 창간했다. 수많은 시행착오, 형편없는 월급(그나마도 못 받는 달이 더 많았지만). 그렇게 4년이라는 시간을 보냈다. 주간지가 어느 정도 궤도에 오를 즈음 나는 그 자리에서 떠밀려 났다. 기반을 잡았으니 좀 더 유명하고 영향력 있는 사람들로 판을 새로 짠다는 거다. 어이가 없었지만 받아들일 수밖에 없는 현실이었다. 같이 밤을 새워가면 일했던 주간지 후배들을 뒤로하고 아무 말 없이 짐을 챙겨 회사에서 나왔다. 세상에 태어나 그렇게 울어본 적이 없었다. 그렇게 나는 자의 반 타의 반 프리랜서가 되었다.
 
비가 오는 올레길. 운치가 있다. 걷기에는 조금 불편했지만 나름 시원한 느낌이 좋다. 혼자 걷는다는 두려움, 앞으로 어떤 길이 나를 기다릴지 모른다는 불안함은 여전히 내 머리를 짓누르지만 여하튼 난 혼자 걷고 있다. 그리고 이 운치를, 나만 느끼는 행운을 실컷 만끽했다. 나중에는 먼저 일상으로 돌아간(마침 월요일이었다) 일행에게 미안함마저 들었다.
 
사람들과 같이 걸을 때는 몰랐다. 길보다는 주변에 있는 사람이라는 존재감이 더 컸기 때문에 다른 것들은 잘 보이지 않았다. 혼자가 되니 지금까지 보지 못하고 지나쳐 버린 것들이 보인다.
 
내가 밟고 가는 흙 한 줌,
나무 한 그루,
작은 연못의 물웅덩이,
날아가는 한 마리 까치,
 
어쩌면 내가 그들의 주변이었을지 모른다.
내가 세상의 중심이라고 생각하며 살았는데…….
그래서 슬픔도 기쁨도 내가 중심이었다. 그게 오만하고 독단적인 마음이라는 걸 길에서 배웠다.
 
어느 순간. 나는 주변을 돌아보게 되었다. 이미 세상에 존재했던 것들을 보았다. 그것은 나의 경험으로 만들어진 것이 아니라 이미 있어 왔던 것들이다. 그것들은 나를 요란하게 반기거나 나를 차갑게 내치지도 않는다. 그저 나와 함께 그 자리에 머물러 있다. 그런 깨달음의 순간, 난 망치로 머리를 맞은 듯 멍했다. 지금까지 내가 보고 싶은 것들만 보면서 살았구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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비가 멈추고 뜨거운 햇빛이 비친다. 젖었던 땅과 풀 위의 물기들이 어느새 다 말라버렸다. 그리고 내 몸도 말라가는 듯 심한 갈증을 느낀다. 마실 물을 미처 준비하진 못한 채 가게가 나오기만을 바라며 걷는다. 한참을 걷다 물을 발견했다. 밭농사를 위해 설치해 놓은 지하수. 수도꼭지에 먼지가 가득하지만 신경 쓸 겨를도 없었다. 허락을 구하고 싶었는데 사람이 없어 실례를 무릅쓰고 목을 축였다(마치 어릴 적 수박 서리를 하는 느낌이 들었다). 이날 이후 길을 걷기 전 가장 먼저 챙기는 것은 물이다. 가다가 가게가 보이면 사 먹지 싶어서 허투루 여겼던 물이 이렇게나 절실할 줄이야. 늘 이렇게 기본적인 것들을 놓치고 살아간다. 명심할 것. 물을 파는 가게는 찾으면 찾을수록 나타나지 않는다.
 
정오가 지나면서 햇볕은 더욱 뜨겁게 나를 몰아붙인다. 이 코스는 그늘도 거의 없다. 지나가는 사람도 적다. 설상가상 거리도 지금까지 코스보다는 한두 시간 더 걸린다. 피식 웃음이 나온다. 걷기 싫어 서울로 올라갈까 말까를 수십 번 생각하며 갈등 하던 내 모습. 그런데 지금은 그늘 한 점 없는 길에서 터벅터벅 길을 걷고 있는 나를 보고 있으니 한심스러운데 허탈한 웃음이 터진다. 아무도 없는 길에서 혼자 큰소리로 웃었다.
 
“하하하!”
 
궁금했다.
 왜 올레길을 만들었을까. 사람들은 왜 올레길을 걷고 좋다고 하는 걸까. 아니 왜 걸을까?  모르겠다. 가던 길 마저 걷고 궁금한 것은 천천히 생각하자.
 
내 옆으로 경운기 한대가 지나간다. 할아버지와 할머니. 할아버지는 나를 보며 씩 웃으신다. 그리고 뒤에 여유롭게 앉아있던 할머니는 나를 불쌍하다는 듯 짧은 눈빛을 보낸다.
 ‘아니, 이 더운데 저 총각은 뭐 하는 거여?’
 ‘참, 할 일도 없지.’
 노부부가 세상에서 가장 편하고 빨라 보이는 경운기를 타고 간다. 그 멋진 경운기가 내 시야에서 사라질 때까지 난 부러움에 몸서리쳤다.
 
해가 어스름하게 내려앉은 후에 겨우 코스의 끝을 알리는 지점에 도착했다. 발가락에 조그만 물집이 생겼는지 몹시 쓰리다. 그 발로 30분 정도 헤매다 게스트하우스를 발견하고 숙소 등록을 하려는데 주인장이 하는 말,

 “아니 힘들게 걸어왔어요? 전화 주면 우리가 픽업 가는데.”
 하하하, 이건 뭐 억장이 무너지는 소리가 분명하다. 그래도 티는 내지 말자.
 “좀 더 걷고 싶어서요.”

 말도 안 되는 거짓말을 표정 하나 안 바꾸고 해버렸다. 안내하는 사장님 뒤를 절뚝거리면서 따라갔다. 다행이다. 내가 뒤에서 걸을 수 있어서.
 
이곳에서도 올레꾼들을 위해 저녁 시간에 바비큐 파티를 한다고 한다. 단돈 1만 원. 술도 준단다. 당연히 참석이다. 짐을 부리나케 정리하고 초간단 샤워를 마치고 나왔다. 제법 사람이 많다. 오늘 걷는 동안 거의 사람을 보지 못했는데 모두 올레길을 걷는 사람이라고 한다. ‘도대체 이 사람들은 어디에 있었던 거지?’ 간단하게 인사를 나누고 열심히 먹기 시작했다. 정신없이 먹다가 주위를 둘러보았다. 모두 처음 만나는 사람들이지만 같은 길을 걷는다는 동질감이 느껴진다. 이야기를 들어보니 사람마다 사연도 다양하다.
 
연인이 추억을 만들기 위해 걷고,
 취업을 준비하면서 마음을 다스리기 위해 걷고,
 휴가를 내고 온 회사원은 생활의 휴식을 취하기 위해 걷고,
 나는…… 걷고.
 
그 중 한 여인이 장작을 보며 깊은 생각에 잠겨 있다. 무슨 생각을 하는 걸까. 무엇을 고민하는 것일까. 무엇을……. 궁금하지만 그냥 궁금한 채로 두기로 했다. 배도 부르고 피곤해서 일찍 숙소로 들어가 잠자리에 들었다. 파티는 계속 이어지는지 노랫소리도 들린다. 자장가랄 수는 없지만 낯선 이의 노랫소리에 기대어 잠을 청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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