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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분수대] 들러리로 살지 마

중앙일보 2015.11.10 00:29 종합 35면 지면보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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안혜리
중앙SUNDAY 기획에디터

최근 서울대의 한 교수로부터 좀 ‘웃픈(웃기고도 슬픈)’ 얘기를 들었다. 장학금 지급을 위한 학부생 면접 때 지금까지 살아오면서 가장 힘들었던 일을 물었더니 남학생 대부분이 군대생활을 꼽더라는 거다. 그렇다면 군대 경험 없는 여학생들은 뭐라고 답했을까. 정답은 남자친구 군대 보냈을 때. 농담이 아니다. 장학금을 타느냐 마느냐를 결정하는 중요한 면접 자리에서 학과 교수님을 앞에 두고 진지하게 “군대 간 남친과 헤어진 게 인생의 가장 큰 어려움”이라고들 한단다. 중·고교 시절부터 교내외의 다양한 활동을 통해 엄청난 스펙을 쌓아야 들어갈 수 있는 게 요즘 대학이라는데, 남녀 불문하고 서울대생들의 경험이 어찌 그리 단조로운지.

 이 얘기를 전해준 교수는 “어떤 경험을 했느냐보다 그 과정을 통해 무엇을 느꼈는지가 더 중요한데, 뭘 느꼈느냐고 되물었더니 다시 가고 싶지 않다거나 헤어지지 말아야겠다는 걸 깨달았다고 하더라”고 했다.

 시대가 달라지면 고민도 달라진다. 사회적 이슈보다 본인의 개인사에 대해 더 아파하고 고민하는 것도 어쩌면 당연하다. 하지만 궁금했다. 이 땅을 ‘헬조선(지옥같은 한국)’이라 부르며 우리 사회의 구조적 모순에 대한 불만을 늘어놓는 게 바로 그 또래들 아닌가. 교수들 얘기를 들어보면 비단 서울대생뿐 아니라 요즘 대학생 대부분이 세상 돌아가는 일에 대해 별다른 고민 이 없다고 한다. 도전하지 않으니 고민도 없다는 것이다.

 70대인 부모님과 언쟁을 할 때가 있다. 주로 지금의 한국 젊은 세대에 관해 얘기할 때다. 부모님은 “터무니없는 어리광에 언론이 비위 맞추는 것”이라는 입장, 난 젊은 세대가 좌절하기 쉬운 구조적 문제가 있다는 입장으로 맞서 왔다. 그런데 문득 내가 틀렸을 수도 있겠다 싶었다.

 케이블 채널 Mnet이 방영하는 여자 래퍼 서바이벌 프로그램 ‘언프리티 랩스타 시즌2’에는 피에스타라는 걸그룹 멤버 예지가 출연한다. 악마의 편집으로 유명한 방송사답게 방송 초반 예지는 말귀 못 알아듣고 어린 후배 면박이나 주는 이미지였다. 그러나 탈락의 위기에 놓인 순간 발군의 실력을 보여주며 단숨에 우승후보로 올라섰다. 그리고 보란 듯이 무대에서 제작진을 향해 이렇게 외친다.

 “애초에 짜놓은 각본 드라마. 그 안에서의 난 그저 들러리일 뿐. 근데 누가 날 주인공으로 바꿔놨어? 바로 나였어.”

 예지의 말대로 들러리를 주인공으로 바꿔놓은 건 환경이 아니라 그 자신이었다. 주인공이 된 예지를 현실 속에서도 많이 보고 싶다.

안혜리 중앙SUNDAY 기획에디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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