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영화 ‘마션’이 원작에서 놓친 것

중앙일보 2015.11.09 17:21
[홍석재의 심야덕질] 영화 ‘마션’이 원작에서 놓친 것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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영화 ‘프로메테우스’(2012, 리들리 스콧 감독)의 종반부를 보면 살아남은 인간은 주인공 엘리자베스(누미 라파스) 혼자다. 지구로부터 몇십 광년 떨어진, 외롭고 척박한 별의 지표면에 살아남은 유일한 인간이 된 것이다. 도무지 상상조차 하기 힘든 외로움과 절망이 엘리자베스를 덮쳤을 게다. 아마도 남은 답은 자살밖에 없을 만큼 절망적인 시간이 좀 더 집요하고 견디기 힘들게 보여지길 바랐다. 그러나 영화는 곧장 안드로이드 데이빗(마이클 패스벤더)이 살아 있음을 알려주며 쉽게 넘어간다.

리들리 스콧 감독이 ‘프로메테우스’ 속편의 스케줄을 뒤로 미루면서 소설 『마션』(앤디 위어, 알에이치코리아) 영화화에 박차를 가한 이유는 바로 그 장면에 대한 아쉬움 때문이 아닐까 멋대로 상상했다. 그런데 웬걸, 소설을 읽어보니 지구로부터 2억㎞ 떨어진 화성에 남겨진 와트니(맷 데이먼)는 너무 낙천적이고 유머러스했다. 소설은 홀로 남은 자의 고뇌나 외로움보다는 화성 서바이벌 생활기에 집중했지만, 한 남자의 고립감만큼은 제대로 그려낸다.

영화 ‘마션’(10월 8일 개봉, 리들리 스콧 감독)을 보며 가장 당황했던 건 소설의 핵심 컨셉트를 완전히 놓쳤다는 데 있다. 화성에 조난당한 사람의 느낌이 완전히 지워진 이유는 무엇일까. 영화는 소설을 시간 순으로 각색했다. 아레스3 탐사대가 갑작스런 폭풍 때문에 화성을 떠나는 장면으로 시작한 영화는 바로 지구로 넘어간다. 그리고 NASA(미국항공우주국)는 와트니의 죽음을 알린다. 다음 장면, 화성의 모래 언덕에 파묻혀 있던 와트니가 정신을 차린다. 영화 속에서 화성과 지구의 교차는 쉽게 이루어진다. 영화 양식상 이런 교차 진행은 특별히 이상할 건 없다. 하지만 소설과 비교해 보면 묘하게도 화성과 지구 사이의 거리가 특별하게 느껴지지 않는다.

소설은 시작부터 84쪽에 이를 때까지 와트니만 보여준다. 사고 전의 아레스3 탐사대 장면은 등장하지도 않는다. 이 차이는 크다. 정확히 무슨 일이 있었는지 알지 못한 채, 와트니는 우주복의 산소 부족 경보에 깨어난다. 그는 부지불식간에 화성 모래 언덕 한복판에 서 있다. 다른 팀원들은 이미 떠났고, 홀로 남았다는 사실을 그제서야 깨닫는 것이다. 우리는 순식간에 와트니의 입장이 된다. 그리고 84쪽까지 내내 그가 생존을 위해 물과 산소 그리고 식량과 사투를 벌이는 하루하루를 함께한다. 영화가 보여주지 못한 것은 이 모든 과정에 빼곡한 계산과 수식 그리고 유머가 동원된다는 점이다.

『마션』은 이공계 로빈슨 크루소의 이야기다. 와트니에게 화성은 아주 긴 워크플로(Workflow)다. 단계마다 주어진 질문- 며칠을 버텨야 하나? 필요한 물의 양은? 물을 만들기 위한 방법은? 먹을 것이 필요하다. 칼로리를 계산해 보자-에 예스(Yes)와 노(No)로 이어지는 분기회로들을 읽고 있으면 머리가 뻑뻑해진다.

솔직히 말해 598쪽 내내 이런 식이었다면 책을 덮었을 거다. 그런데 85쪽에서 갑자기 지구 파트가 등장한다. 순간, 지구가 엄청 반가웠다. 반면 영화는 시작부터 곧장 지구와 화성을 교차해 보여준다. 소설에서 지구 파트의 등장이 몹시 반가웠던 것은 그만큼 내가 화성에 홀로 남겨진 한 남자에게 몰입했다는 증거였다. 영화나 소설 모두, 생략하고 비약함으로써 묘사한 것보다 훨씬 긴 시간성을 표현한다. 하지만 물리적인 시간을 체험해야 하는 순간이 있다. 소설의 84쪽까지 담긴 내용은 그 역할을 톡톡히 수행한다.

영화 ‘데어 윌 비 블러드’(2007, 폴 토마스 앤더슨 감독)의 첫 13분은 오로지 한 남자가 시추 구멍에 들어가 곡갱이질을 하는 노동의 순간만 집요하게 보여준다. 압도적인 첫 시퀀스 이후, 남자는 노동자가 아니라 자본가가 되어 직접 곡갱이를 휘두르진 않는다. 하지만 영화 내내 그의 노동은 강한 잔상을 남긴다. 그 장면은 캐릭터를 형성하고 그가 살아가는 세계를 보여준다. 영화 ‘마션’에 그런 결정적인 장면이 있는가? 없다. 영화는 단 10분도 와트니를 화성에 혼자 남겨두는 일이 없다. 그랬다간 지구의 NASA 보모들이 큰일나는 것처럼. 지금 이 순간 지구의 그들은 뭘 하고 있는지 알려주고 싶어 안달난 것 같다.

소설은 화성과 지구의 배분을 불균등하게 구성한다. 나는 이것을 ‘밀당’이라 표현하고 싶다. 화성과 지구 사이의 밀당. 상대적으로 더 많은 시간을 배분한 화성은 마치 입대한 남자친구 같다. 그에 반해 지구는 밖에 있는 여자친구다. 군대와 사회에서 서로 다르게 흐르는 시간이 두 공간 사이의 거리를 보여준다. 군대(화성) 파트를 보면 사회(지구)가 너무 궁금해진다. 정작 사회(지구)로 넘어오면 물리적·심리적으로 책장이 순식간에 넘어 간다. 다음 휴가를 고대하는 군인처럼 다시 화성 파트를 읽어나가는 것이다. 소설을 읽으며 이러한 비대칭 구성에 감탄했다.

그에 반해 영화 ‘마션’에서 지구와 화성의 시간은 동시적인 것처럼 다가온다. 패스파인더를 재부팅하는 장면을 떠올려 보자. 교차로 지구와 화성을 넘나들던 양측은 결국 동일한 시간을 공유한다. 교차 편집은 감정 고조에 효과적이다. 그리고 가장 영화적인 시공간 조작이다. 즉, 패스파인더 장면 이후로 지구와 화성은 완전히 링크된다. 영화적으로 둘은 떨어져 있지 않은 것이다. 영화적인 시공간 조작이 역설적으로 지구와 화성 사이의 시공간을 지워버리는 악수(惡手)가 된다.

우주에 대한 이야기에서 시간과 공간은 매우 중요한 요소로 다뤄질 수 밖에 없다. 즉, 상대성이론 위에서 이야기의 핍진성이 구축된다. ‘스타워즈’ 시리즈(1999~)가 SF가 아니라고 말하는 사람들의 이유는 바로 이 지점에 있다. ‘스타워즈’에서 우주는 그냥 검고 사방으로 펼쳐진 하늘과 똑같다.

‘마션’은 어떨까. 어느 순간 화성 장면이 그저 지구의 사막 로케이션으로 다가왔다면 그것은 촬영상의 문제는 아니다. 분명히 영화 속의 화성 시각화는 레퍼런스 그 자체다. 소설을 읽으며 궁금하고 상상했던 그 모든 게 완벽히 구현돼 있다. 그런 의미에서 영화는 소설을 읽은 사람들의 갈증을 크게 해소시켜준다. 스콧 감독은 언제나 당대 최고의 비주얼리스트였고, 특히 화면에서 우리가 시각적으로 느끼는 질감의 측면에서 항상 최고의 경험을 보장해 왔다. 영화 ‘마션’도 그런 의미에서 스콧 감독의 장기가 십분 발휘된 작품이다.

장면에 보이는 리얼리티만으로 우리가 그것을 체감하는 것은 아니다. 시간과 공간, ‘마션’의 경우 지구와 화성 사이의 거리는 하나의 장면으로 찍을 수 있는 성질의 리얼리티가 아니다. 그것은 배열과 구성에서 관객이 상상하고 체감하는 것이다. 세간에선 ‘마션’이 ‘그래비티’(2013, 알폰소 쿠아론 감독)와 ‘인터스텔라’(2014, 크리스토퍼 놀런 감독)와 함께 우주 3부작으로 언급되는 중인데, 나는 다른 두 영화와 달리 ‘마션’이 진짜 우주 영화인지 모르겠다.

‘인터스텔라’의 얼음 혹성 장면을 떠올려 보자. 거대한 중력 때문에 산맥 같은 파도가 치는 별에서 겨우 살아 돌아온 쿠퍼(매튜 맥커니히) 일행이 우주선에서 맞닥뜨리는 건 바로 시간이다. 멀리 떨어진 지구에서 날아온 아이들의 영상을 보는 쿠퍼는 몇 분 만에 아이가 어른으로 그리고 다시 부모가 되는 광경을 보며 울음을 터뜨린다. 쿠퍼가 모니터를 향해 손을 뻗는 순간, 툭 하고 영상 편지가 끝나고 장면은 지구의 머피(제시카 차스테인)로 전환된다. 나는 이때 두 사람 사이의, 별과 별 사이의 거리를 느꼈다. 영화 ‘마션’에서 이런 순간을 바랐다면 그건 너무 순진한 기대였을까.


글=홍석재 영화감독. ‘소셜포비아’(2015) 연출. 타고나길 심심한 인생인지라 덕질로 한풀이 중.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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