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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소문 포럼] 폐쇄적 시민권을 허무는 작업, 그게 개혁이다

중앙일보 2015.11.09 00:27 종합 32면 지면보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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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기찬
논설위원 겸
고용노동 선임기자

두 차례의 구제금융도 모자라 3차 구제금융을 받으려 안간힘을 쓰는 그리스의 썩은 경제를 이보다 더 적나라하게 묘사한 책이 있을까. 『그리스의 혐오스러운 부패(Greece’s ‘Odious’ Debt)』란 책이다. ‘그리스, 유로와 정치엘리트 그리고 투자집단에 약탈당하다’란 부제가 붙어 있다. 저자는 글로벌 헤지펀드인 드로메우스 캐피털의 공동창업자인 제이슨 마노로폴로스다. 세계 금융시스템에 대한 경험을 바탕으로 책을 썼다고 한다.

 이 책을 관통하고 있는 건 그리스의 기막힌 시민권이다. 기득권은 세습되고, 한 번 잡은 줄은 평생 간다. 공무원은 대부분 장관의 자녀나 친·인척이다. 공채 제도가 없어서다. 월급은 민간부문 직장인보다 세 배 많다. 국영철도는 연간 수입이 1억 유로인데, 인건비가 7억 유로다. 1950년대 말라가는 호수를 관리한다고 관청을 설립했는데, 몇 해 뒤 물이 완전히 사라졌지만 아직 공무원은 월급을 받으며 건재하다. 고속도로 톨게이트에 버려진 영수증을 모아 출장비를 청구해도 준다. 이런 공무원의 은퇴시기가 남자는 55세, 여자는 50세다. 그동안 누린 풍족한 생활에 흠집이 나지 않을 정도의 연금이 평생 지급된다. 굳이 일할 필요가 있겠는가. 기업은 노조원만 고용토록 돼 있다(클로즈드 숍). 회사가 문을 닫지 않는 한 해고할 수 없을 정도의 강력한 규제가 위력적이다. 탈세는 당연한 생활방식이 됐다. 설령 법원에 가도 판결이 나기까지 평균 15년 걸린다. 범죄인데, 범죄취급을 못 받는다.

 도저히 이해가 안 되는 이 모든 불합리가 그들에겐 엄연한 관행이다. 그리스 시민권은 부조리를 당당히 행해도 통하는 만병통치약이라 할 만하다. 반면 외국기업에는 엄격(?)하다. 회사가 들어서서 1년 이상 버틴 경우가 드물다고 한다. 부조리가 안 통한다고 파업하고 공장을 멈추기 일쑤여서다. 그래서 관광과 농업밖에 없는 국가가 됐다.

 그 옛날 지중해를 호령하던 스파르타도 폐쇄적이고 부패한 시민권 때문에 망했다. 정복한 뒤 시민권을 가진 자만 그 열매로 풍족한 생활을 향유했다. 평생 시민권을 받을 수 없었던 정복민들이 다른 국가로 마음을 돌리는 건 당연했다. 나라를 지킬 진짜 시민이 없으니 무너지는 건 불문가지다. 약탈해서 대제국을 일궜지만 약탈당하는지도 모르고 약탈당하는 그런 꼴이다.

 반면 로마는 정복민에게도 시민권을 줬다. 정복된 부족에서 황제도 나오고, 집정관도 배출했다. 차별 없이 시민권을 누릴 수 있었다는 얘기다. 이게 자유다. 외세가 침략하면 이민족이 로마를 지키려 힘을 합쳐 대항한 것도 이 때문이다. 시민권의 자유가 경제를 일으켰다. 한니발이 탁월한 전략과 전술을 써도 로마를 무너뜨리지 못하고 패한 이유다.

 다소 장황했다. 그런데 ‘우리와 전혀 다르다’고 할 수 없는 게 제법 눈에 들어오지 않는가. 정치권, 공공부문, 노조 등 그들만의 폐쇄적 시민권이 통하는 세계는 비슷하다 할 정도다. 혹자는 고대 그리스가 망한 건 민주주의 때문이라고 한다. 알고 보면 그들만의 폐쇄적 시민권 민주주의가 패망의 원인이란 얘기다.

 이런 사회에 능력은 뒷전이다. 아무리 능력이 있어도 기득권으로 구축된 단단한 성벽을 뚫을 수 없다. 소크라테스도 쫓아내지 않는가. 대기업 정규직은 기득권을 누리는 사람들이다. 노조라는 강력한 성벽은 더 높아진다. 정치권은 이런 기득권의 눈치를 보고, 끌어안으려 안간힘을 쓴다. 정권을 거머쥐기 위한 정쟁에 초점이 맞춰져 있어서다. 그들에게 시민을 생각하는 이성적 정책을 기대하긴 힘들다. 공공부문엔 낙하산이 횡행한다. 그 낙하산이 지인을 다시 고위직에 떨어뜨려 포진시킨다. 그들이 시민일 뿐 진짜 일하는 사람이 시민 대접받긴 글렀다.

 좋은 일자리도 따지고 보면 능력에 맞는 일자리다. 능력에 맞는 대접을 받는 자유가 있어야 한다. 그 자유가 사기를 진작시키고 경제를 일으킨다. 그런 시민권을 모두에게 허락해야 한다. 노동개혁을 비롯한 여러 개혁도 어쩌면 폐쇄적인 시민권을 모두에게 돌려주는 작업이다. 우리도 약탈당하는 건 아닐까. 페로니즘(남미식 포퓰리즘)이 번지는 걸 보면 그런 생각을 떨치기 힘들다.

김기찬 논설위원 겸 고용노동 선임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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