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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취재일기] 'H&M과 발망' 소동이 남긴 것

중앙일보 2015.11.09 00:25 종합 33면 지면보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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박현영
문화스포츠부문 기자

지난주 서울 명동과 압구정동에 있는 패스트패션 브랜드 H&M 매장 앞에서는 진풍경이 펼쳐졌다. 두꺼운 파카와 모자, 마스크로 무장한 사람들이 간이의자와 이불을 들고 나와 며칠씩 밤샘을 했다. H&M이 프랑스 명품 브랜드 발망과 협업해 만든 의류·핸드백·신발을 사기 위한 줄이었다.

 노숙 행렬은 판매를 개시한 5일까지 장장 엿새간 이어졌다. 매장 안팎에서는 물건을 확보하기 위한 몸싸움과 실랑이가 이어졌다. 물론 이런 난리가 한국에서만 벌어진 건 아니었다. 런던·뉴욕·시드니·두바이 등의 매장에도 수천 명이 몰려들었다. 하지만 엿새간이나 줄을 선 곳은 한국이 유일했다. 한국인의 유별난 명품 사랑이 세계적 뉴스거리가 됐다. H&M 관계자는 “명품 브랜드와의 컬래버레이션 컬렉션을 출시할 때는 통상 이틀 전쯤 대기 줄이 생겨나는데 이번 한국 고객들의 호응이 너무 이례적이어서 본사에서도 매우 놀랐다”고 전했다.

 스트리트 패션과 명품 브랜드의 컬래버레이션은 10여 년 전 시작됐다. 2004년 H&M은 카를 라거펠트 샤넬 수석 디자이너와 손잡고 샤넬 스타일 옷을 H&M 가격에 선보여 성공을 거뒀다. 이후 해마다 주목받는 디자이너를 초청해 한정판 제품을 선보이고 있다. <본지 10월 30일자 week& 7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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5일 서울 명동 H&M 매장 앞에 명품 브랜드 발망과 협업한 제품을 사기 위한 줄이 길다. [뉴시스]


 지난달 유니클로가 에르메스 수석 디자이너 출신인 크리스토프 르메르와 협업한 컬렉션을 내놓았을 때도 700여 명이 줄을 섰지만 이번처럼 혼란스럽지는 않았다. 이번 사태는 발망 수석 디자이너인 올리비에 루스텡에 대한 팬덤과 소셜미디어 문화가 빚은 것이다. 인스타그램에서 160만 명의 팔로어를 거느린 스물아홉의 루스텡은 소셜미디어의 ‘황제’로 군림해 왔다. 그런 디자이너의 제품이 싼 가격에 나오자 고객들이 거리로 뛰쳐나온 것이다.

 툭하면 ‘한정판’을 내세우는 이 업계의 오랜 마케팅 기법과 공급 제한도 한몫했다. H&M은 세계 3600개 매장 중 250곳(7%)에서만 발망 컬렉션을 판매했다. 공급이 제한되자 장사꾼들이 줄을 서서 물건을 구매한 뒤 온라인에서 되파는 일까지 벌어졌다. 판매 시작 몇 시간 만에 e베이 등 온라인몰에 제품이 올라오기 시작했고, 원래 발망 제품 가격보다 더 비싸게 거래되기도 했다.

 이번 소동은 무엇을 남겼을까. 발망의 명품 디자이너는 대중적 인기를 과시했고, 스트리트 패션 브랜드 H&M은 고급스러운 이미지와 매출을 챙겼다. 한국 소비자는 과연 무엇을 얻었을까. 주말 내내 골똘히 생각했지만 끝내 답을 찾지 못했다. 개별소비세 인하에도 국내에 시판되는 명품 가격을 내리지 않아 세금 인하를 ‘없던 일’로 만들었던 글로벌 럭셔리 브랜드 앞에서 한국 소비자들은 여전히 ‘착하기만 한’ 고객인 것 같다.

박현영 문화스포츠부문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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