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혼인보 영예 사회 환원… 반상의 ‘라스트 사무라이’ 슈사이

중앙선데이 2015.11.08 00:33 452호 26면 지면보기
#1. 국수(國手)라는 이름이 있다. 본래 수(手)는 재주를 뜻하니 어느 분야든 최고의 기능을 가진 이를 고대엔 국수라 했다. 요즘은 바둑에만 붙이는 이름이다. 현재 한국에서 도전기를 치르는 기전은 국수전밖에 없고, 타이틀 이름에 후원사 이름이 들어가지 않는 기전도 국수전 하나밖에 없다. 다른 기전은 하이원리조트배 명인전, 지지옥션배 등 회사 이름을 넣는다.



#2. “400년의 역사와 명예를 지닌 우리 혼인보(本因坊) 일문(一門)에게 있어, 그 이름을 향후 어떻게 지켜나갈까 하는 것이 오늘의 우리에게 맡겨진 현안이다… 우리는 전통의 세습에 그치지 않고 당대의 1인자는 혼인보라는 상식을 확립하면서, 일문의 사유(私有)에서 벗어나 혼인보의 명의를 일본기원에 제공키로 한다.” 1939년 6월 혼인보 슈사이(秀哉) 명인이 일본 바둑 300년 전통과 권위의 상징인 혼인보를 일본기원에 넘기는 순간이었다.


[반상(盤上)의 향기] 신문 기전의 탄생

한국에 국수가 있다면 일본엔 혼인보가 있다. 역사적으로 혼인보를 세습한 자는 모두 21명. 명인은 혼인보를 포함한 4대 바둑 가문에서 뽑았다. 실력이 안 되면 정략으로도 이겨내야 얻을 수 있었다. 역사 속에서 명인은 11명. 기성(棋聖)은 후세에 주어지는 이름이다. 기성의 칭호를 받은 이는 도사쿠(道策)·슈사쿠(秀策)·우칭위안(吳淸源). 그런 역사적 의미를 이어받아 혼인보·명인·기성, 이 셋은 현재 일본 바둑 최고의 기전으로 남았다. 상금 규모로도 그렇고 명예로도 그렇다.



 

1 제1기 혼인보전에 참가한 기사들. 우칭위안(뒤쪽 왼쪽 끝)과 기타니 미노루(앞줄 오른쪽 두 번째), 세고에 겐사쿠(앞줄 오른쪽 네 번째)의 얼굴이 보인다. 세고에는 우칭위안의 스승이었고 60년대엔 조훈현을 길러냈다.



 



‘혼인보’ 내주며 기사들 생활 보장 요구1867년 바쿠후(幕府)체제가 무너지자 바둑의 4대 가문은 힘이 다 사라졌다. 혼인보만이 겨우 명맥을 유지했다. 하지만 세상이 안정을 되찾고 신문이 바둑 지면을 만들었다. 50년이 지난 1910년 일본 국민들에게 바둑은 영화 다음의 취미였다. 1924년 일본기원이 설립됐고 33년의 신포석 혁명은 바둑에 대한 세간의 흥미를 자극했다. 거의 모든 신문이 바둑란을 신설했고 새로운 기획에 열을 올렸다.



도쿄 니치니치(日日)신문과 오사카 마이니치(每日)신문이 혼인보전 창설 아이디어를 냈다. 당초 두 신문은 명인전을 기획했고 일본기원에 타진했다. 하지만 슈사이 명인은 혼인보전을 요구했다. 기사들의 생활 보장도 요구했다.



혼인보전 창설 전후를 니치니치의 학예부장 아베 신노스케(阿部眞之助)의 회상을 통해 들어보자.



“슈사이 명인은 명인전이 아니라 혼인보전을 하자고 끝까지 굽히지 않았다. 곧 혼인보가 명인이라는 생각 때문이었다. (중략) 먼저 문하생 10여 명의 승낙을 얻어야 했다. 기타니와 우칭위안 등 인기 기사도 설득해야 했다. 그리고 혼인보를 넘겨준 슈사이 명인에 대해서는 남은 여생을 보장해 주어야 했다. 이것저것이 서로 얽혀들어 실로 방대한 운동비와 계약금이 움직였다.



장기는 시끌시끌하다가도 일단 결판이 나면 뒤가 빠르다. 게임의 성격이 기사에 반영되는지 바둑은 달랐다. 지루한 나머지 실제로 몇 번을 단념할까 말까 했는지 모를 정도였다. (중략) 혼인보의 이름을 권위 있는 것으로 남긴 일에는 슈사이 명인의 생각이 옳았다.”



신문사는 37년 명인 은퇴기에 나설 기사를 뽑기 위한 예선전을 1년 남짓 열었다. 혼인보전을 하기 전에 혼인보 슈사이 명인은 은퇴해야만 했기 때문이다. 슈사이는 38년 기타니 미노루(木谷實) 7단을 상대로 은퇴 바둑을 둔 뒤 39년 문하생들의 서명을 받아 은퇴 성명서를 발표했다. 신문사는 슈사이로부터 혼인보 명칭을 양도받았고, 이를 다시 일본기원에 양도하면서 혼인보전 독점 게재권과 맞교환했다.



혼인보는 일본 바둑 최고의 가문이었지만 일본기원이 창립되면서 기원 속의 혼인보로 전락했다. 가문의 유지는 불가능했다. 현실이었다. 다만 전통은 사회의 자산이라, 가능하면 가치를 높여 남겨두는 덕이 바람직하다. 혼인보 가문의 해체와 함께 일본 바둑의 대명사 혼인보는 타이틀전의 이름이 되었다.



 권위 혁파한 호선 방식 대국 도입혼인보전의 개막은 전통의 가치와 바둑의 시장경제 편입 등 모든 것이 합쳐진 결과였다. 혼인보전이라고 간단하게 부르지만 본래 기전의 이름은 길었다. 혼인보 자리를 승계하기 위한 일본 프로들의 한 판 싸움(本因坊位繼承全日本專門棋士選手權戰).



 

기보 1943년 제2기 혼인보전 도전 2국에서 하시모토 우타로 7단이 둔 백6을 보고 생각에 잠겼던 세키야마 혼인보는 지나친 긴장과 과로로 그만 쓰러지고 말았다. 세키야마는 건강을 크게 해쳐 다시는 승부를 하지 못했다.



대회 방식이 혁명적이었다. 첫 번째 혁명은 토너먼트. 이는 바둑계 70년을 이끌었다. 전통은 번기(番棋)였다. 두 사람이 승부를 겨룰 경우 적어도 3판(3번기), 많으면 10판, 20판을 두었다. 그래서 상대를 압도하면 실력이 낫다고 인정해주었다. 하지만 토너먼트는 단판 승부. 기사들의 저항은 대단했다. 단 한 판으로 실력의 우위를 가릴 수 있느냐? 겨우겨우 반발을 잠재웠다.



두 번째 혁명은 권위의 상징이었던 단위를 무시한 채 모든 기사들이 호선(互先, 두 판을 두면 서로 흑백을 한 번씩 나누는 것)으로 두고, 흑에게 덤을 부과키로 한 것이다. 덤에 대한 저항은 더욱 컸다. 바둑은 실력차를 전제한 게임이란 게 당시의 인식이었다. 가장 강력한 반대자는 기원의 장로 가토 진(加藤信) 7단이었다. 신문사는 가토가 제시한 두 가지 조건을 들어주면서 덤을 관철시켰다. 첫째, 신문에 ‘덤바둑은 바둑도 아니다’는 가토의 글을 게재할 것. 둘째, 최종 결승은 덤 없는 바둑으로 치를 것.



예선과 본선에 덤 3집을 적용했다. 참가 자격은 4단 이상으로 4~6단은 예선을 거친 후 본선 시드를 받은 7단과 합류해 본선을 치렀다. 당시 8단은 없었다. 결승전은 6번기로 흑백을 세 번씩 나누어 잡았다. 3대3이면 본선 성적을 우선 적용해 우승자를 가리기로 했다. 2년 뒤인 43년 2회 대회부터 결승도 4집반의 덤을 도입했다.



당시 최강자 우칭위안은 결혼과 종교 문제로 부진했다. 41년 결승전엔 세키야마 리치(關山利一) 6단과 가토 7단이 올라갔다. 제한시간은 각자 13시간. 세키야마가 4대2로 이겨 초대 혼인보에 올랐다. 권위에서 실력주의로 이행하는 20세기 바둑계의 흐름에 첫 걸음을 내디뎠다. 하지만 세키야마는 운이 없었다. 43년 제2기 혼인보전 도전 2국에서 도전자 하시모토 우타로(橋本宇太郞) 7단을 맞아 두다가 백6(실전 백96)에 이르러 그만 쓰러지고 말았다. 긴장이 건강을 해친 탓이었다. 권위와 실력, 그리고 숙명. 그런 게 뒤섞인 게 바둑이다.



 

2 1952년 혼인보 다카가와(왼쪽)가 도전자 하시모토 우타로와 대국하고 있다.



실력 떠나 지금도 ‘혼인보’엔 경외감역사가 주관하지 않는 세계는 없다. 바둑도 역사가 알려주는 정보에 의존해 가치를 획득하고 질서를 세워 왔다. 그 정보의 하나가 이름이었다. 이름은 사회가 불러주는 것이고 사회가 불러주는 것이 곧 질서다.



하지만 역사 속 혼인보가 전통과 권위의 상징이라 하더라도 실력의 세계에선 한계가 있었다. 바둑은 승부이기에 혼인보도 부침 속에서 살았다. 먼저 40~50년대 최고의 권위는 혼인보가 아니었다. 승부방식으로는 치수고치기 10번기요, 인물로는 우칭위안이었다.



타이틀전은 50년대에 와서야 비로소 봇물 터지듯 생겨났다. 왕좌전, 일본기원 선수권전, NHK배, 7,8단급 최고위전 등이 생기고 마침내 60년엔 최고의 상금을 건 명인전이 생겼다. 그때까지 최고의 승부는 치수고치기 10번기였고 최고의 기사는 우칭위안이었다. 그는 39년에서 58년까지 도전하는 일류기사들을 모두 한 단 또는 두 단 아래로 주저앉혔다. 도전자가 9단이라면 우칭위안은 11단에 해당했다.

2 1952년 혼인보 다카가와(왼쪽)가 도전자 하시모토 우타로와 대국하고 있다.



특별기전도 많았다. 50년 제5기 혼인보에 오른 하시모토 우타로는 우칭위안과 3번기 특별 대국을 두었다. 이후 혼인보가 된 기사는 우칭위안에게 3번기를 두는 것이 관례가 되었다. 이는 사카타 에이오(坂田榮男)가 혼인보에 올랐던 58년까지 유지되었다. 52년 제7기 혼인보에 오른 다카가와 가쿠(高川格) 7단은 1년에 3국씩 둔 3번기에서 계속 패했다. 무려 11연패까지 당했다. 그래도 혼인보의 명예에 흠이 되지 않았다. 다행히 11연패 이후 1승을 했고 4연승까지 반격했다.



우칭위안은 신문기전에도 출전하지 않고 하코네(箱根) 산중에 은거하면서 한 달에 한두 판만 대국했다. 일본 바둑계는 ‘타도 우칭위안’을 내세우며 그가 구사하는 신수를 연구하는 게 일이었다. 잡지 ‘기도(棋道)’는 그의 신수를 검토하고 분석하는 데 많은 지면을 할애했다.



그렇다. 40~50년대 20년 간 일본도, 일본의 자존심 혼인보도, 우칭위안을 제외하고서는 한낱 이름밖에 이룰 게 없었다. 그것을 잘 알려주는 책이 하나 있다. 『혼인보전전집(本因坊戰全集)』 6권이 그것인데 ‘우칭위안 특별기전’이라는 이름으로 상하 두 권을 별권(別卷)으로 펴냈다. 매년 혼인보가 우칭위안과 둔 기념대국을 따로 모은 것이다.



기둥 없는 집은 없다. 일본 바둑의 기둥은 둘. 권위와 실력이었다. 혼인보는 권위는 있었지만 실력까지 말해주는 것은 아니었다. 그럴 것이다. 바둑은 존재하기 쉽지 않았을 것이다. 실력이 있어도 권위가 없다면, 권위가 있어도 실력이 없다면. 하지만 부침 심한 실력과 달리 권위는 안정적인 속성을 갖는 것. 일본은 오늘도 혼인보에 경외감을 갖고 있다. 초대 혼인보 산샤(算砂) 이래 21세 슈사이를 끝으로 세습 혼인보는 막을 내렸다. 일본기원은 98년 다카가와 가쿠, 사카타 에이오, 이시다 요시오(石田芳夫), 조치훈 등 혼인보 5연패 이상 기사를 명예 혼인보로 부르기로 결정했다. 권위와 질서는 여전히 바둑 세상의 기틀이라 하겠다.



 



문용직 객원기자·전 프로기사moonro@joongang.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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