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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Saturday] 형사 34년, 범인 1300명 잡은 포도왕 … 죽기 전에 화성 연쇄살인범 꼭 잡겠다

중앙일보 2015.11.07 01:26 종합 14면 지면보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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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빌딩이 높을수록 그림자는 길어진다.” 드라마 ‘수사반장’에서 박 반장(최불암)의 대사다. 최중락 전 에스원 고문은 고도성장기의 그늘에서 자란 범죄와 평생 맞섰다. [권혁재 사진전문기자]

지난여름 개봉했던 영화 ‘극비수사’에서 부산의 공길용 형사(김윤석)는 유괴범을 잡기 위해 서울 경찰과 합동수사를 진행한다. 그에게 동료가 말한다. “거기(서울) 팀장이 ‘수사반장’ 실제 모델이라카던데.” 영화에선 서정학 반장(정호빈)으로 나오지만 실제 이름은 다르다. 일요일 저녁 TV에서 류복성의 오프닝 테마와 함께 ‘수사반장’ 타이틀이 뜨면 출연자 명단과 함께 ‘지원 서울시경 형사과 최중락’이 나온다. ‘영원한 수사반장’이란 칭호가 최중락(86) 전 에스원 고문에게 붙는 이유다. 지난달 창설 70주년을 맞은 경찰의 살아 있는 역사이자 한국 범죄사의 증인인 그를 만났다.

[사람 속으로] ‘영원한 수사반장’ 최중락 전 에스원 고문
드라마 ‘수사반장’ 최불암 실제 모델
인민군으로 끌려간 동생 찾기 위해
1950년 6·25전쟁 때 경찰에 지원

 -‘극비수사’에서 인질의 안전보다 범인을 잡는 데만 신경 쓰는 모습으로 그려진다.

 "영화를 안 봐서…. 그때 부산 경찰의 수사를 도와줬지. 그들은 서울 지리를 모르잖나. 부산 사건이니 공(功)이 부산팀에 돌아가는 건 당연하지. 나야 사건을 해결하면 돼.”

 최씨는 1950년 6·25전쟁 때 경찰에 지원했다. 인민군으로 끌려간 동생을 찾기 위해서였다. 전투경찰이 된 그는 국군을 따라 북진했으나 중공군 개입으로 흥남부두를 통해 철수했다.

 - 왜 형사가 됐나.

 “철도경비 기동부대사령부에 배속됐던 53년 9월 영등포역에서 청년 서넛이 할머니의 보따리를 낚아채는 모습을 봤어. 그들을 때려 눕혀 보따리를 되찾아줬지. 그러면서 ‘범죄는 이길 수 있다. 앞으론 정의를 위해 싸우겠다’고 마음먹었다.”

 56년 서울 중부경찰서로 옮기면서 그의 34년 형사생활이 시작됐다. 이후 총경으로 승진하면서도 사건 현장을 떠나지 않았다. 평생 잡아들인 범죄자가 1300명을 넘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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드라마 ‘수사반장’ 촬영 현장. 왼쪽부터 최불암, 남광현 전 경위, 이금복, 김상순, 조경환, 김호정, 최중락 전 고문.


 - 드라마 ‘수사반장’은 어떻게 만들어졌나.

 “70년대 서독에 파견된 광부·간호사들이 돌아오면서 형편이 나아지니 떼강도가 설친 거야. 그래서 ‘법을 어기면 안 된다’는 메시지를 주는 드라마를 만들게 됐지. 나중에 들어보니 박정희 전 대통령의 지시였어. 그런데 작가들이 경찰과 수사에 대해 뭘 알겠나. 그래서 방송국이 경찰에 ‘범인 잘 잡는 형사 하나 추천해 달라’고 요청했지. 그래서 포도왕(절도범 검거 실적이 좋은 경찰에게 주어지는 상)인 내가 방송국에 파견된 거야.”

 그는 리얼리티를 살린다며 스태프를 경찰대에 보내고, 실제 살인사건 현장에 배우들을 데리고 갔다. 작가와 PD를 유치장에서 재우기도 했다. 최씨는 “‘수사반장’ 인기 덕도 봤다”고 했다. “사람들이 수사반장 출연진을 진짜 형사로 안 거야. 한번은 조경환과 김상순을 남대문시장에 풀어놨지. 그랬더니 슬금슬금 피하는 사람들이 보였어. 그런 이들을 잡아다 뒤져 봤더니 남의 지갑이 발견됐어. 소매치기였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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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현역 시절 그는 악착같이 범죄자들을 잡았다. 하루에 네다섯 명을 체포한 날도 있었다. 비결은 남보다 더 부지런히 움직이는 것이었다. “68년 강도사건 범인이 훔친 수표로 참깨 여섯 가마니를 샀다는 정보를 입수했어. 그래서 동료와 함께 돋보기를 들고 깨알을 찾아다녔지. 결국 한 알을 골목길에서 발견해 범인을 잡았어.” 살인사건이 잘 풀리지 않을 땐 소주를 마신 뒤 시체를 안고 잔 적도 있었다. ‘꿈에서라도 피해자가 단서를 주지 않을까’ 하는 생각에서였다.

 또 다른 비결은 지혜였다. 특히 도둑으로 도둑을 잡는 데 그만 한 형사가 없었다. 전국의 어지간한 전과자들은 그를 형님으로 모셨다. 최씨가 그들을 인간적으로 대하고 보살폈기 때문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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실제 모델 ‘수사반장’ 최 전 고문(왼쪽)과 드라마 ‘수사반장’ 최불암.

 - 계기가 있었나.

 “한번은 겨울에 오랜 잠복근무 후 술 한잔을 한 뒤 취해 길거리에서 잠들었지. 새벽에 깨어보니 가마니 속에 있는 거야. 옆에 잠든 사람이 덮어준 거였지. 내가 예전에 감옥에 보낸 이였어. 그가 일어나 ‘형님, 내가 또 죄를 저질렀소. 가게에서 가마니를 훔쳤소’라고 말했어. 그때 깨달았지. ‘죄는 순간의 욕심 때문에 저지르지만 사람은 나쁘지 않을 수 있다’고.”

 그가 ‘도둑 동생’들의 도움을 제대로 받은 사건이 있다. 66년 린든 존슨 미국 대통령이 방한하기 전 당시 정부 고위 관계자 집에 도둑이 들어 보석과 함께 권총 한 자루와 실탄 30발을 훔쳐갔다. 미국이 외교라인을 통해 안전 문제가 생길 수 있다며 대통령 방한을 재검토하겠다고 알려왔다. 실제 ‘극비수사’가 진행됐다. 최씨는 절도 전과자들을 모아 협조를 부탁했다. 그랬더니 그들이 단서를 찾아줬다.

 모든 전과자가 그를 모신 건 아니었다. 사형대에 보낸 범죄자가 그에게 “지옥에서 두고 보자, 복수하겠다”는 말을 남겼다. 그의 집에 협박장을 보낸 이도 있었다. 교도소 감방 벽엔 ‘만고역적 최중락’이란 낙서도 있었다.

 90년 경찰에서 나와 에스원 고문을 맡았다. 갑자기 2010년 뇌경색이 왔다.

 - 건강이 왜 안 좋아졌나.

 “퇴임 후 하루 만 보를 걸을 정도로 건강했다. 2010년 코미디언 배삼룡이 세상을 떴어. 상가에 가 보니 밀린 병원비가 많았지. 마음이 아파 코미디언 송해 등과 소주 한 말을 마셨더니 갑자기 쓰러졌어.”

 그러면서 말을 이었다. “94년 림프종(임파선 암) 판정을 받았어. 자살할 마음에 인왕산을 올랐지. 그랬더니 그동안 잡았던 범죄자들 얼굴이 떠올랐어. 내가 죽으면 그들이 ‘잘 죽었다’고 생각하겠지. 이겨내야겠다는 결심을 했어. 그래서 10년 후 재발돼도, 2006년 계단에서 굴러떨어져 척추를 다쳐도 일어났어.”

 지금도 거동이 불편하지만 총기는 잃지 않았다. 예전 사건의 구체적 내용을 아직도 줄줄이 꿴다.

 - 형사가 된 걸 후회하나.

 “64년 삼분(三粉, 밀가루·설탕·시멘트) 폭리사건을 수사하는데 한 기업주가 돈을 포대에 담아 와선 봐달라고 했다. 당시 집을 여러 채 살 만한 거금이었지. 그런데도 원칙대로 그를 구속했어. 형사가 가오(체면)로 살면 됐지.”

 - 범죄가 시대에 따라 달라진다.

 “범죄는 사회를 따라간다. 50~60년대는 절도가 많았다. 먹고살려는 생계형 범죄였다. 절도범을 체포하고 나면 대부분 눈물을 흘리며 반성했다. 그런데 경제가 발전했던 70~80년대부터 폭력을 동반하는 범죄가 늘어났다.”

 - 대도 조세형과 인연이 있다.

 “대도는 무슨 대도. 좀도둑이야. 과대포장됐어. 조세형이 16세 때 라디오와 은수저를 훔쳐 나한테 붙들렸어. 그게 인연이 돼 내가 에스원 범죄예방연구소에 취직을 시켜줬지. 그런데도 갱생을 못했어.” 조씨는 고급빌라에서 귀금속을 훔친 혐의(상습절도)로 지난달 구속기소됐다.

 - 지금도 후회하는 사건은.

 “65년 신문사 기자와 야당 국회의원이 잇따라 테러를 당했어. 경찰은 엉뚱한 사람을 범인으로 잡았지. 증거는 없지만 ‘나까무라’(중앙정보부) 짓으로 보여. 87년 용팔이 사건도 윗선 지시로 수사를 제대로 못 했어.”

 최씨는 “범인 잡는 게 천직”이라며 “죽기 전에 반드시 잡고 싶은 범죄자가 있다”고 했다. ‘화성 연쇄살인 사건의 범인’이란다. 그가 당시 뒤늦게 사건에 투입됐지만 결국 해결하지 못했다.

 - 왜 잡고 싶나.

 “지금도 범인은 평범한 이웃으로 숨어 지낼 거야. 억울하게 죽은 피해자를 생각하면 반드시 잡아야지. 내가 수갑을 채울 순 없지만 노마지지(老馬之智·늙은 말의 지혜)를 줄 순 있지 않을까 수사기록을 요즘도 뒤져봐.” 최씨의 수사는 아직도 진행형이다.

글=이철재 기자 seajay@joongang.co.kr
사진=권혁재 사진전문기자


[S BOX] 소매치기·제비족 점점 줄어드는 까닭

‘서울지검은 27일 서울시내 조직소매치기 28개 파 151명에 대한 계보와 명단을 파악, 경찰과 함께 일제 검거에 나섰다’.

 1984년 10월 27일자 중앙일보 기사는 이렇게 시작했다. 당시 검찰과 경찰은 ‘각종 국제행사와 스포츠 교류를 틈타 관람객과 외국 관광객들을 노리는 소매치기의 범행이 부쩍 늘어났다’고 판단해 대대적인 단속에 나섰다. “사람이 많은 역이나 시장에 갈 때마다 늘 소매치기 한두 명을 체포했다”는 최중락 전 에스원 고문 얘기처럼 한때 소매치기는 흔한 범죄였다. 뉴스에선 하루가 멀다 하고 소매치기 범죄가 보도됐다. 경찰은 ‘방범비상령’을 내려 소매치기를 잡아들였고, ‘지갑이나 가방을 잘 간수하자’는 캠페인을 종종 벌였다.

 그랬던 소매치기가 점점 사라지고 있다. 1970년대 연간 6000여 건, 90년대 4000여 건이던 소매치기 발생 건수가 2000년대 2000여 건으로 줄었다. 지난해는 1454건이었다. 신용카드 사용이 늘고 CCTV가 많이 설치됐기 때문이란 게 경찰의 분석이다. 소매치기가 줄면서 83년에 창설된 서울시경찰청 소매치기전담반은 99년 해체됐다.

 최근 체포된 소매치기들은 대부분 60대 이상이다. 2000년대엔 국내에서 자리를 잃은 소매치기들이 일본으로 건너가 ‘원정범죄’를 저질렀다. 당시 일본이 한국보다 신용카드를 덜 썼기 때문이다.

 제비족도 줄었다. 70~80년대 남편을 중동에 건설 노동자로 보낸 부인이 카바레에서 만난 제비족에게 돈을 뺏기는 사건이 자주 일어나 사회 문제가 됐다. 정부가 “이역만리에서 고생하는 근로자들이 안심하고 일할 수 있게 만들겠다”며 카바레에 사복 형사를 잠복시킨 적도 있었다. 경찰 관계자는 “카바레가 많이 없어졌고, 세태가 예전보다 이혼을 덜 꺼리면서 제비족의 활동 무대가 줄어든 것”이라고 설명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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