본문 바로가기

[Saturday] 중국의 동북공정 추진이 남북 역사학자 뭉치게 했다

중앙일보 2015.11.07 01:11 종합 18면 지면보기
기사 이미지

최광식 전 장관은 이명박 정부 출범(2008년 3월)부터 임기 만료(2013년 3월)까지 5년 동안 국립중앙박물관장→문화재청장→문화체육관광부 장관을 지내는 등 고속 승진했다. 비결을 묻는 질문에 “내가 소위 낙하산인데 인덕이 있었다. 도와주는 사람들이 잘해줬고 운이 따랐다. 운(運) 7, 기(技) 3이었다”며 호쾌하게 웃었다. [권혁재 사진전문기자]


개성 만월대(滿月臺)를 발굴·복원하기 위한 남북 공동작업이 속도를 내고 있다. 만월대는 고려조 태조 왕건이 정무를 보며 거처로 삼았던 궁궐이다. 남북 관계 냉각으로 중단됐던 발굴 작업이 지난해 재개되면서 한국 측 연구원 15명(북한 측은 30명)이 개성에 상주, 발굴 작업에 박차를 가하고 있다. 북한은 이례적으로 국회 외교통일위원들의 발굴 현장 참관(2일)도 허용했다. 5·24 조치 등으로 남북 교류가 전면 중단된 상태지만 만월대 남북 공동발굴 조사는 겨레말 사전 편찬작업과 함께 북한이 지원하고 있는 남북 공동학술교류 사업이다.

[이정민이 만난 사람] 개성 만월대 복원 이끈 최광식 전 문체부 장관
“중국에 왜 꼼짝 못하느냐” 따지자
북한, 고대사 자료 공개하며 공조
평양 안학궁터 고구려 시대 것 입증
고려 유물 주장한 일본 사학계 발칵
고려 왕궁터서 유물 1만여 점 출토
개성공단과 연계, 관광지로 키워야
정치적 이유로 세 차례 중단·재개
소리 없이 신뢰 쌓는 게 진짜 교류


 2007년 공동발굴대가 첫 삽을 뜬 이래 지금까지 공동조사를 이끌어 온 이는 이명박 정부에서 문화체육관광부 장관(2011년 9월~2013년 3월)을 지낸 고려대 최광식(한국사학과) 교수다. 최 전 장관은 “사료로만 전해져 오던 원통 형태의 고려 이형청자와 용두(용머리 형상을 한 건축장식물)가 발견되는 등 지금까지 출토된 것만 1만여 점에 이른다”며 “앞으로 왕궁을 복원하고 인근에 수장고와 고려박물관을 지어 남북이 공동관리한다면 개성공단과 연계된 세계적인 관광지가 될 수 있을 것”이라고 주장했다. 그러면서 “ 소리 없이 신뢰를 쌓고 공감하는 게 진짜 남북 교류라고 생각한다”고 말했다.

 인터뷰는 지난 5일 서울 광화문의 한식당에서 조찬을 겸해 이뤄졌다. 김정배 국사편찬위원장의 ‘애(愛)제자’인 최 전 장관은 교과서 국정화 논란으로 불편한 관계에 놓인 사제 간의 인연과 소회도 털어놨다.

 - 북한이 이례적으로 만월대 공동발굴 작업을 허용한 이유는 뭔가.

 “우선 민족의 동질성 회복이란 당위성을 마다할 수 없었을 것이다. 우리는 통일신라를 최초의 통일국가로 보는 반면 북한은 신라가 백제만 통합했지 고구려는 통합 못했기 때문에 고려를 최초의 통합국가로 본다. 김일성 주석은 1990년대 초 3대 복원사업(고조선의 단군릉, 고구려의 시조 동명왕릉, 고려 시조 왕건릉)을 지시해 왕릉을 대대적으로 복구하기도 했다. 고조선- 고구려- 고려- 북한으로 이어져 오는 한민족의 정통성 있는 정권이란 걸 강조하기 위해서다. 우린 고려를 재통일로 보기 때문에 우리에게도 중요하다. ‘코리아’도 고려에서 따왔지 않나.”

 - 공동발굴을 먼저 제안한 쪽은.

 “중국의 동북공정(東北工程·중국 국영 안에서 벌어졌던 모든 역사를 중국의 역사로 편입하려는 프로젝트) 추진과 관련 있다. 중국이 고구려의 첫 도읍지인 환런(桓仁)과 두 번째 도읍지인 지안(集安)에 있는 고구려 고분군을 세계문화유산에 등재하려는 게 2003년 드러났다. 동북공정이 이뤄지면 고구려가 송두리째 중국의 역사와 문화유산이 되는 거다. 그때 북한은 세계문화유산 등재가 중요하다는 걸 알게 됐지만 경험이 없고 자료가 불충분해 어려움을 겪었다. 중국의 고대사 왜곡에 남북이 공동대응해야 한다. 그러려면 한국의 도움이 필요하다는 데 일치하게 됐다.”(※고구려 고분군은 중국과 북한의 것이 각각 문화유산으로 등재됐다.)

 동북공정 파문은 ‘연구실 학자’이던 최 전 장관을 ‘역사 활동가’로 불러 냈다. 중국의 동북공정 추진으로 여론이 들끓자 노무현 정부는 고구려사 왜곡대책위원회를 만들었고, 당시 고대사 학회장을 맡고 있던 그가 대책위원장을 맡게 됐다. 최 전 장관이 여론의 스포트라이트를 받게 된 것도 이때부터다.

 - 동북공정에 대한 공동대응은 어떻게 성사됐나.

 “북한 사회과학원 역사연구원 학자들을 만나 고구려사 왜곡에 공동대응하자니까 ‘신중히 검토하겠다’는 말만 할 뿐 소극적으로 나왔다. 북한의 태도에 실망해 3개월 후 다시 갔다. 저녁에 술 먹고 북한 학자들에게 ‘북한이 주체, 주체하면서 미국한테나 큰소리치고 중국한텐 왜 꼼짝 못하느냐’고 따졌다. 그랬더니 그쪽도 탁자를 꽝 치고 일어나더니 ‘일본의 역사 왜곡은 우리가 할 테니, 중국의 역사 왜곡은 남조선에서 하라우’라고 했다. 그때(2004년)부터 북한의 고대사 연구자료를 우리한테 개방해 줬다. 그전까지 북한은 고구려 문화유산, 고분벽화 같은 걸 우리한테 개방 안 했고 유네스코(유엔 교육과학문화기구)나 일본 학자들에게만 개방했다. 우리한테도 개방하니까 엄청난 도움이 됐다.”

 최 전 장관이 중심이 돼 남북역사학자협의회가 꾸려졌고 북한은 조희승 사회과학원 역사연구소장이 창구가 됐다. 남북 공동발굴 ‘1호 사업’은 평양성의 안학궁터 발굴이었다. 안학궁은 고구려 장수왕이 평양으로 수도를 옮긴 뒤 건립한 궁성이다. 여기서 고구려 성터와 와당이 발견돼 안학궁이 고구려시대 것임이 입증됐다. 안학궁에서 고려시대 기와가 출토됐다는 걸 들어 안학궁이 고려 유물이라고 해 온 일본 사학계의 주장이 빛을 잃는 순간이었다.

 - 안학궁터 발굴은 고대사학계에도 큰 사건이었겠다.

 “일본 학자들이나 외국의 입장에선 북한의 주장은 귀담아듣지 않고 있었는데 구체적 자료를 찾아냈으니까… 그때부터 우리가 일본보다 고대사의 수준이 올라가는 중요한 계기가 됐다.”

 - 북한의 고대사 연구는 어떤 수준인가.

 “50년대 말 60대 초반까지만 해도 북한의 고대사 연구 수준은 아주 높았다. 백남훈·박시형·김석형 등 기라성 같은 학자들이 있었다. 그러나 60년대 후반과 70년대 들어 주체사상이 나오면서 우수한 학자들이 주체사상 신봉 쪽으로 돌거나 하방·도태됐다고 한다.”

 - 만월대 발굴 공동조사는 2007년에 시작됐는데.

 “2003년 북한이 개성역사유적지구의 유네스코 등재를 추진했다. 개성에서 열린 남북 공동학술회의에서 내가 만월대를 공동발굴하자고 제안했다. 월성(신라 도읍지)·한양(조선 도읍지)·평양(고구려 도읍지)은 폭격을 맞아 유적이 훼손됐지만 개성은 주춧돌이라든지 성터 구역이 그대로 잘 남아 있기 때문에 만월대를 발굴하면 고려시대 유물이 많이 나올 것이라고 생각했다. 개성역사유적지구의 유네스코 등재는 2013년 이뤄졌다.”

 - 발굴작업이 중단되는 등 우여곡절을 겪었는데.

 “유물 발굴 작업을 중단하면 마치 통조림을 딴 것과 같아 부식·훼손될 위험이 크다. 2008년 금강산 관광객 피격사건으로 위기를 맞았지만 문화 교류는 정치와 상관없이 남겨 둬야 한다고 주장해 ‘비공개’를 조건으로 계속할 수 있었다. 2010년 천안함 폭침사건으로 중단됐다 2011년 재개됐는데 그해 말 김정일이 사망하면서 발굴단이 철수하게 된다. 그리고 지난해 다시 재개됐다.”

 - 고대사 전공 학자로서 만월대 발굴에 기대하는 건 뭔가.

 “서부건축군 발굴은 앞으로 2~3년이면 끝난다. 학자로선 태자가 살던 동궁과 못이 있던 동부건축군 발굴에 대한 기대가 크다. 우리나라 토양은 산성인데 못이 있으면 물이 남아 알칼리 토양이 된다. 알칼리성 토양엔 유물이 많이 남아 있다. 이미 긴 원통형으로 생긴 이형청자, 용의 머리 장식 등 사료 속에 전해져 오는 귀중한 유물들이 발굴됐지만 청자로 만든 기와가 나올 가능성도 있다.”

 - 청자 기와의 유물적 가치는.

 “중국 사람은 청자로 보시기·사발·주발 같은 걸 만들었지만 고려 사람들은 창의적으로 청자 기와를 만들어 집을 지었다. 가마터에서 청자 기와가 출토된 적은 있는데 만월대에서 더 많이 나올 가능성이 있다.”

 - 북한 학자들은 어떻게 평가하나.

 “자기들이 못 보던 게 나왔으니 특이하다는 거다. 청자로 만든 기와로 지은 정자, 양의정이 있었다는 기록이 『고려사』에 나오는데 그걸 입증하면 세계적으로 고려 사람들의 창의성을 보여 줄 수 있을 것이다.”

 - 10여 년 동안 북한과 교류해 왔다. 북한이 변하고 있다고 보나.

 “제일 큰 변화는 개성에 자전거가 많아진 거다. 2006년엔 개성에 소와 말이 끌고 가는 달구지가 있었는데 올봄에 가 보니 모내기하는 논 옆으로 자전거가 일렬로 꽉 차게 들어서 있었다. 개성공단에서 일하는 사람들이 자전거를 타고 다닌다고 한다. 94년 처음 중국에 갔을 때 자전거가 많았다. 그게 오토바이로 바뀌고 어느 순간 자동차로 바뀌더라. 젊은 세대의 의상이나 패션도 남쪽 사람과 구분이 안 갈 정도다.”

 - 향후 계획은.

 “공동발굴이 끝나면 근처에 수장고와 유물 보존센터를 세우는 게 필요하다. 많은 사람이 볼 수 있도록 박물관을 짓고 남북이 공동으로 관리하면 개성공단과 연계한 개성 관광상품이 될 거다. 우리도 처음 만났을 때 굉장히 거리감이 있었는데 10년 정도 되니까 친해지기도 하지만 역사인식도 조금씩 달라지더라. 또 아직 발굴되지 않은 고구려 벽화고분의 공동발굴과 철원 비무장지대(DMZ) 안에 있는 궁예도성 공동발굴도 북측에 제안해 놓은 상태다.”

글=이정민 정치·국제 에디터 jmlee@joongang.co.kr
사진=권혁재 사진전문기자


[S BOX] 김정배 국사편찬위원장 ‘1호 애제자’ … “교과서 국정화 반대”

최광식 전 장관은 김정배 국사편찬위원장의 ‘1호 애제자’다. 고려대 사학과 석·박사 시절 지도교수가 김 위원장이었다. 최 전 장관이 서른두 살에 교수가 된데도 김 위원장의 ‘지원’이 절대적이었다고 한다. 요즘 이런 사제지간을 역사 교과서 국정화 파동이 갈라놓고 있다는 얘기가 학계에서 나오고 있다. 교과서 국정화를 이끌고 있는 김 위원장에 반해 최 전 장관은 언론 인터뷰 등을 통해 국정화 반대를 앞장서 주장하고 있어서다. 최 전 장관은 “심지어 국정교과서를 했던 베트남도 올 4월부터 검인정교과서로 돌아왔는데 선진국 문턱에 있는 한국이 국정교과서로 돌아간다는 건 한국의 이미지나 브랜드, 국격을 떨어뜨리는 것”이라고 강조하고 있다.

 -은사와 180도 다른 주장을 하는 게 부담스럽지 않나.

 “내가 공무원이라면 자유스럽게 얘기할 수 없겠지만 민간인이고 국격을 생각하는 역사학자의 입장에서 그건 아니라고 생각하는 바를 전하는 것이다. 김정배 선생님은 국사편찬위원장이고 공무원이니까 당연히 정부가 하는 대로 해야 하는 것이고, 그게 아니면 나오셔야 되는 거고….”

 - 그렇다면 왜 말리지 않았나.

 “그건 제가 얘기하긴 그렇다. 선생님이 (국편위원장) 하실 땐 국정인지 검인정인지 결정되지 않았을 때였다. 더 논의해서 하자고 하던 시기였다.”

 -김 위원장의 소신이 바뀐 건가.

 “2013년 교과서 파동 때 생각이 바뀌었다고 한 인터뷰를 봤다.”

 -스승이 안타까운가.

 “국편위원장은 정부에서 방침이 정해지면 거기에 따라 좋은 교과서를 만들어야 하는 입장에 있지 않나.”

 -김 위원장이 최 전 장관에게 서운해하진 않을까.

 “그건 모르겠다. 난 역사학자 입장에서 여러 가지 이유로 검인정에 문제가 있더라도 그 안에서 해야 된다는 생각이다. 선생님은 국편위원장 입장에서 하시는 거니까 개인적으로 얘기할 건 아니지 않나. 개인적인 얘긴 인터뷰에서 안 하고 있다.”
공유하기
광고 닫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