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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단독] 서울 남가좌1동서도 “젊은이·아이 구경하기 힘들어”

중앙일보 2015.11.05 00:34 종합 4면 지면보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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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난달 26일 서울 서대문구 남가좌1동의 한 약국에서 노인들이 약사에게서 의약품에 관한 설명을 듣고 있다. 이 지역 약국에선 파스·소화제·청심환 등 노인들이 자주 찾는 제품이 많이 팔린다. [오종택 기자]


농어촌 마을들은 소수의 노인만 남으면서 점차 사라지고 도심 속 ‘노인 도시’는 확장된다. 초고령화 사회를 넘어 극(極)고령화 사회로 치닫고 있는 대한민국의 미래상이다. 서울 서대문구 남가좌1동은 이런 대한민국의 미래를 예고해주는 곳이다. 젊음과 활기의 상징으로 여겨졌던 도심에서 고령층 비율이 급증하면서 주거와 상권 등 사회 인프라가 노인들을 중심으로 재편돼 가고 있다. 충남 청양군의 범직이 마을은 급속히 붕괴돼 가는 과정에 놓인 농어촌 마을 풍경을 여실히 보여준다. 본지는 대한민국의 미래를 엿볼 수 있는 두 지역을 취재했다.

 # “여기선 마흔 살 넘어도 막내” - 서울 남가좌1동

 “팔팔한 청년들이나 동네를 뛰어다니는 아이들은 구경하기 힘들어요. 여기선 마흔 살 넘어도 막내 취급을 받으니까 말 다했지.”(79세 김영림씨)

 지난달 26일 찾은 남가좌1동은 노인들의 도시였다. 거리를 걷는 사람은 대부분 머리가 희끗하거나 지팡이, 보행보조기에 의지한 고령층이었다. 다세대주택이 모여 있는 주거지역도 노인들이 주류를 이뤘다. 건물 입구나 계단엔 ‘미끄러짐, 낙상 조심’이란 문구가 적혀 있었다. 게시판에도 각종 전염병이나 질병이 퍼졌을 때의 대응 방법을 알리는 주의사항이나 공문들이 붙어 있다.

 남가좌1동의 65세 이상 노인 인구 비율은 18.7%(전국 평균 12.7%, 2014년 기준). 서울에서 을지로, 종로, 삼청동, 회현동에 이어 다섯 번째로 노인 비율이 높다. 을지로 등 네 곳의 경우 상업시설과 젊은 유동인구가 많다는 것을 감안하면 노인 비율이 가장 두드러지는 동네다. 남가좌1동 주민 3718명 중 703명이 65세 이상 노인이고 40~64세 중장년층 인구 비율도 40%에 달한다.

 거리의 풍경도 노인 중심으로 바뀌고 있다. 주 소비층인 노인들에 초점이 맞춰진 ‘실버 상권’이 형성됐다. 다른 동네에선 고개만 돌려도 찾을 수 있는 PC방이나 프랜차이즈 커피전문점·패스트푸드점은 눈에 띄지 않았다. 대신 약국과 한의원, 정형외과, 출장 요양소, 건강원, 기성복 전문점, 노인용 구두점, 철학관, 작명소, 수선집 등이 밀집해 있었다. 본지가 남가좌1동의 상권 밀집지역 골목(100m가량)에 위치한 상점들을 분석한 결과 46곳 중 29곳이 노인층과 연관된 상점이었다. 이곳에서 5년간 약국을 해온 안모(41)씨는 “주 고객이 어르신들이다 보니 파스나 소화제·청심환 등이 많이 팔려 이런 제품들을 충분히 구비해놓고 있다”고 말했다.

 젊은 층이 자주 찾는 휴대전화 대리점에도 노인들이 북적였다. ‘스마트폰을 구매하면 돋보기 안경, 목토시, 시장 가방 중 한 개를 증정한다’는 안내판이 눈에 띄었다. 대리점에서 일하는 김민석(20)씨는 “어르신들께 스마트폰 사용법이나 요금제를 알기 쉽게 설명하는 노하우가 필수적”이라고 말했다. 치안 유지 활동을 하는 자율방범대나 해병대 전우회 역시 노인층을 위한 순찰에 치중하고 있었다. 자율방범 활동을 하는 주민 김모(48)씨는 “순찰할 때 가파른 계단이나 가로등 불빛이 잘 들어오지 않는 후미진 골목에 쓰러져 있는 분이 없는지 주의 깊게 살피곤 한다”고 말했다.

 # “어르신들 돌아가시고 나서 없어진 집도 많아” - 충남 범직이 마을

 사람들은 그곳을 ‘범직이 마을’이라고 불렀다. 충남 청양군 칠갑산 자락에 위치한 이 마을 뒷산에선 과거 호랑이가 자주 목격됐다고 한다. 마을 이름이 ‘범 지킴이’에서 ‘범직이 마을’로 굳어졌다. 호랑이에게 고마움을 전하자는 의미로 시작된 동아제 행사는 매년 200여 명이 모인 가운데 마을 어귀에서 치러졌다.

  지난달 30일 찾아간 청양군 온직리의 범직이 마을은 황량했다. 구불구불한 마을 길을 따라 쓸쓸하게 남아 있는 폐가가 곧 쓰러질 듯 서 있었다. 흙벽은 여기저기 무너져 있었고 서까래엔 거미줄이 쳐져 있었다. 대문 근처에 버려진 오래된 식기와 옷가지들이 사람이 살았던 곳임을 짐작하게 했다. 1990년대 초반만 해도 인구가 100명을 넘었던 곳이라고 믿겨지지 않았다. 현재 이 마을엔 다섯 가구만 거주하고 있다. 온직리 김용만(58) 이장을 제외한 4가구가 70세 이상의 노인들이다.

 “여기 보이죠? 지금은 고추밭이지만 원래 집터였어요. 어르신들이 돌아가시고 나서 없어진 집도 많죠. 이젠 어디가 집터였는지 기억나지 않을 정도지만….”

 곧 예순이 되는 김 이장은 이 마을에선 궂은 일을 도맡아 하는 일꾼이다. 논밭을 지나 마을 초입에 외롭게 자리 잡은 집 마당에선 이병옥(78) 할머니가 깨를 털고 있었다. 이 할머니는 이곳에서 50년 넘게 살아온 산증인이다. 장성한 자녀들은 모두 도시로 떠났다.

 “남은 노인마저 하나 둘 떠나면 범직이 마을도 함께 세상을 떠날까봐 아쉽지. 그래도 어쩌겠어, 남은 이들이라도 끝까지 살아야지.”(이 할머니)

글=손국희 기자 9key@joongang.co.kr
사진=오종택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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