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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중앙시평] 사실만으로 역사의 수레를 밀고 가자

중앙일보 2015.11.04 00:33 종합 35면 지면보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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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 진
논설위원

역사 교과서 논쟁과 관련된 핵심적인 질문은 다음 세 가지다. ①도대체 얼마나 ‘좌편향’이길래 뜯어고쳐야 하나 ②검정(檢定)으로는 고치지 못하나 ③국정(國定)은 편향을 피할 수 있나. 가장 중요한 건 ①번이다. 문제의 심각성을 알면 검정으로 고치는 게 가능할지, 어떻게 하면 국정을 제대로 만들지 알 수 있다.

 고등학교 한국사 8종 가운데 대표적으로 나는 채택률 1위(33%) 교과서를 분석해 보았다. 학생 3명 중 1명이 읽는 책이다. 현대사를 다룬 60페이지 분량에서 모두 65개 문제점을 발견했다. 대부분 좌편향 서술이나 편집이다. 나는 지난달 29일 중앙일보 인터넷 방송 ‘직격 인터뷰’ 코너에서 이를 설명했다. 일일이 밑줄을 쳐가면서 왜 문제인지를 말했다.

 한국의 현대사에는 두 가지 줄기가 있다. 하나는 불가피성의 흐름이다. 건국과 호국(護國) 그리고 반공·산업화·근대화 과정에서 현실적인 이유 때문에 어쩔 수 없이 이상(理想)적인 가치를 포기한 것이다. 해방 후 김구의 ‘남북합작정부’ 운동을 제치고 이승만이 남한 단독정부를 성사시킨 것, 미 군정과 우익세력이 좌익·공산세력과 싸우기 위해 일부 친일파를 등용한 것, 국가의 근대화 역량이 성숙하지 않은 상태에서 일부 군인이 5·16 쿠데타를 일으켜 근대화 작업에 뛰어든 것, 수출입국·경제성장·반공(反共) 생존을 위해 자유를 구속하고 노동자의 희생을 감수한 것 등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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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이에 맞서는 또 다른 흐름은 자유·인권·민주화를 위한 투쟁이다. 1960년 부정선거 독재정권을 무너뜨린 4·19 혁명, 신군부의 강압에 피로써 항거했던 5·18 민주화 운동 그리고 민주화를 완성시킨 87년 6월 시민항쟁 등이다.

 올바른 교과서라면 두 흐름을 균형 있게 배치해야 할 것이다. 그런데 내가 분석한 ‘채택률 1위 교과서’는 한쪽으로 기울었다. 민주화 흐름은 크게 부각하면서 ‘불가피성’은 제대로 다루질 않았다. 이 책만 보면 별다른 사정이 없는데도 이 나라가 이상(理想)의 길을 봉쇄한 것으로 된다. 불가피하지도 않은데 남북통일정부를 포기하고, 친일파를 중용했으며, 쿠데타를 일으키고 노동자 인권과 시민의 자유를 제한한 것이 된다.

 광복 70년을 맞아 한국갤럽은 지난 7~8월 6일 동안 성인 2003명을 대상으로 여론조사를 실시했다. ‘나라를 가장 잘 이끈 대통령’ 항목에서 압도적인 비율(44%)로 박정희가 1위다. 2위 노무현(24%), 3위는 김대중(14%)이다. 사망한 지 36년이나 지났다면 박정희에 대한 이런 평가는 거의 굳어진 것이라 할 수 있다. 그런데 ‘채택률 1위 교과서’는 이런 국민의 평가와는 정반대다. 박정희의 불가피한 개발독재·반공은 작게 쪼그라들었다. 반면에 김대중·노무현의 민주화·남북 화해는 크게 부풀려졌다. 박정희 사진은 1개인데 김대중 사진은 3개다.

 기운 것은 북한에 대해서도 마찬가지다. 남한에 북한은 대화와 교류의 상대다. 하지만 동시에 테러·도발·핵개발로 남한의 생존을 위협하는 존재다. 올바른 교과서라면 두 측면을 나란히 기록해야 한다. 그래야만 학생들이 안보 경계심을 갖는다. 그런데 교과서는 심하게 좌편향이다. 남북 정상회담 같은 것은 요란하게 부각시킨다. 반면에 도끼만행·아웅산·여객기 폭파·천안함 같은 테러는 거의 없다. 그동안 북한이 얼마나 처절한 ‘피의 송곳’을 꽂았는지 책만 보면 학생들은 알 수 없다.

 평가의 저울에 달아보면 이 교과서는 전체적으로 김대중·노무현 교과서다. 그렇다고 이승만·박정희 교과서로 바꾸자는 게 아니다. 반쪽짜리 애꾸눈 교과서가 아니라 당당한 대한민국 교과서를 만들자는 것이다.

 물론 이 ‘채택률 1위 교과서’에 대해 나와 생각이 다른 이가 많을 것이다. 교과서에 별문제가 없으며 설사 문제가 있어도 검정으로 고칠 수 있다고 그들은 주장한다. 그래서 나는 ‘10시간 TV 생중계 대(大)토론회’를 제안한다. 모든 시각을 대표하는 이들이 모여 국민이 지켜보는 토론회를 열자. 여야 정치인, 교과서 집필진, 검정했던 전문가, 출판사 사장들, 시민단체 지도자, 역사학자들이 모여 모든 걸 얘기해 보자. TV 카메라로 교과서를 생생히 보여주면서 핵심 쟁점을 논의해 보자.

 그러면 많은 국민이 문제에 대한 해답을 얻을 수 있을 것이다. 역사를 움직이는 건 사실(事實·fact)에 대한 실증적인 토론이다. 지식인들이 교과서 내용이라는 사실은 제쳐두고 책상에 앉아 관념만을 얘기하면 사태는 더 혼란스러워진다. 세 치 혀는 잠시 쉬게 하고 사실로 하여금 역사의 수레를 밀고 가게 하자.

김진 논설위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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