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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와 당신을 잇는 달콤 쌉싸름한 위로 한 잔

중앙일보 2015.11.03 15:2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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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획]
나와 당신을 잇는 달콤 쌉싸름한 위로 한 잔
'세상의 끝에서 커피 한 잔'


일본 홋카이도의 바닷가 마을. 평화롭다 못해 적막한 이곳에서 닮은 구석이라곤 찾아볼 수 없는 두 여자가 만나 가족 같은 존재가 된다. ‘세상의 끝에서 커피 한 잔’(11월 5일 개봉, 치앙시우청 감독)은 이 따뜻한 순간을 커피라는 친숙한 소재로 그려낸다. 다큐 ‘바람이 나를 데려다 주리라’(2010) 등을 연출한 대만 여성 감독 치앙시우청(46)이 일본 제작사와 처음 합작한 영화다. 푸른 바다의 아름다운 풍광과 깊은 커피향이 나는 듯한 영상, 여기에 녹인 훈훈한 메시지가 관객의 마음을 어루만진다. 치앙 감독 특유의 섬세하고 차분한 연출이 빛나는 영화다. 그와의 e-메일 인터뷰를 바탕으로, 영화의 세 가지 테마인 커피와 여성 그리고 가족을 들여다 본다.



주인공 미사키(나가사쿠 히로미)는 어린 시절 헤어진 선원 아버지가 배를 타고 떠나 8년째 돌아오지 않았다는 소식을 듣는다. 빚과 함께 그가 상속받은 건 아버지가 지내던 부두의 선박 창고. 미사키는 이곳을 카페로 개조하고 아버지를 기다리기로 한다. 마을의 유일한 이웃은 옆집의 젊고 예쁜 싱글맘 에리코(사사키 노조미)와 그의 두 아이다. 도시 술집에 일하러 간 엄마를 기다리던 오누이는 카페에 드나들며 미사키와 가까워진다.

이 영화는 잡지에 실린 작은 기사에서 시작됐다. 일본 프로듀서 오오쿠보 타다유키가 도쿄에서 일하던 바리스타 니자미 요코가 고향인 스즈시로 돌아가 카페를 열었다는 사연을 접한 게 아이디어의 발단이 됐다. 시나리오가 완성되자 오오쿠보는 대만의 치앙 감독을 찾아가 연출을 의뢰했다. 2011년 3월 11일, 동일본 대지진이 일어난 날이다. 감독은 “이 사건의 뉴스를 보며 큰 충격을 받은 터였다. 시간과 공간을 넘어 사람의 마음을 어루만지고, 세상에 힘을 북돋워주는 작품을 만들겠다고 다짐했다”며 연출에 나선 이유를 설명했다. 커피라는 소재도 그의 마음을 움직였다. 커피를 무척 좋아한다는 치앙 감독은 이렇게 말했다. “첫 맛은 쓰지만 마지막엔 단맛을 남기는 커피는 인생을 닮았다.”

영화에서 커피는 사람과 사람을 이어주는 매개체, 마음의 상처를 다독여주는 소재다. 극 중 에리코의 딸 아리사(사쿠라다 히요리)는 어떤 일을 계기로, 미사키의 카페에서 일하게 된다. 이후 학교에서 왕따당하기 일쑤였던 아리사는 친구를 사귀고 상처를 회복해간다. 또 커피를 통해 오누이는 자신들의 작은 마을 너머, 바깥 세계를 상상한다.

아리사는 로스팅한 커피를 일본 각지의 고객에게 택배로 보내고, 아리사의 남동생 쇼타(호타모리 카이세)는 아프리카산 커피를 보며 그곳의 코끼리를 떠올린다. 치앙 감독은 “아이들은 커피로 자신이 다른 세상과 연결돼 있다는 사실을 알아간다”며 “세상과 삶을 향한 궁금증을 키우고 활기를 얻게 된다”고 말했다.

 
- 부드러운 카리스마로 이웃을 보듬는 미사키

이 영화의 또 다른 매력은 부드러움과 강인함을 동시에 지닌 캐릭터 미사키에 있다. 버려진 창고를 카페로 뚝딱 개조할 만큼 독립적이면서도, 이웃에 늘 커피를 먼저 권하는 상냥함도 갖췄다. 감정 표현에 서툰 에리코가 화를 내며 아이들을 데려갈 때도 그 모습을 차분히 지켜볼 뿐이다. 그는 마을 건달에게 몹쓸 짓을 당할 뻔한 위기를 모면한 후, 큰 동요 없이 커피를 내리며 “물론 나 역시 힘들지만 이따위 일에 지고 싶지 않아”라고 말한다. 음식과 인간 관계를 다룬 일본영화 ‘카모메 식당’(2007, 오기가미 나오코 감독)의 엉뚱발랄한 주인공 사치에(코바야시 사토미)와 언뜻 비슷하지만, 그와는 다른 부드러운 카리스마가 한껏 묻어난다.

치앙 감독은 “여성 감독으로서 미사키가 아버지를 기다리는 모습에 깊이 공감했다”며 “강하고 아름다운 여성을 그리고 싶었다”고 말했다. 여기에는 ‘일본의 전도연’이라 불리는 배우 나가사쿠 히로미(45)의 공이 컸다. 강단이 느껴지는 입매, 커피를 내리는 손길, 아이들을 보며 싱긋 웃는 표정, 자기 몸집보다 큰 로스팅 기계를 돌리는 모습 등 나가사쿠의 섬세한 연기는 단조로워 보일 수 있는 이야기를 더욱 입체적으로 만들었다.

치앙 감독은 그와 함께 작업하기 위해, 3년여 동안 그의 임신과 출산을 기다렸을 만큼 애정이 남달랐다. “나가사쿠를 생각하면 사자성어 ‘여목춘풍(如沐春風·봄바람으로 목욕한 듯 기분이 좋다는 뜻)’이 떠오른다. 그가 현장에 나타나면 선하고 따뜻한 기운으로 주변 공기가 변하는 듯했다. 영화에도 그 느낌이 고스란히 담겼다.” 감독의 말이다.

 
- 누군가와 함께 살아간다는 기쁨

‘세상의 끝에서 커피 한 잔’이 궁극적으로 그리는 것은 전혀 닮지 않은 생면부지의 타인이 가족만큼 애틋한 존재가 되는 과정이다. 홀로 시간을 잘 견디는 자립적인 미사키와 달리, 에리코는 하염없이 누군가가 자신을 사랑해주길 바란다. 외로움을 달래기 위해 자신의 삶을 갉아먹는 남자마저 받아들일 정도다. 때론 자신보다 미사키가 아이들과 더 친한 듯 보이자 질투심을 내비치기도 한다.

달라도 너무 다른 둘이 조금씩 바뀌는 모습을 보는 것은 큰 재미다. 언뜻 철부지였던 에리코만 성장한 듯 보이지만, 꼭 그렇지만은 않다. 치앙 감독은 “아버지를 기다리는 목적만 생각한 채, 삶의 여유 없이 살던 미사키가 에리코 가족을 만나며 기쁨을 느끼기 시작한다”고 말한다. 미사키와 에리코는 자신이 겪은 가슴 아픈 과거를 고백하며 점차 특별한 존재로 거듭난다.

치앙 감독은 “가족이라는 최소한의 관계마저 무너져가는 현대 사회에서 누군가와 함께 살아가는 기쁨을 그려내는 것, 그것이 큰 의미로 다가왔다”고 말한다. 사람은 결코 혼자 살 수 없다는 메시지 그리고 이웃을 보듬으며 느끼는 따뜻한 삶의 위로를 이 영화는 담담하게 그려낸다. 가족이 해체된 이 시대에 탄생할 만한 대안 가족의 구체적 형상을 그려놓았다는 느낌도 든다.

대만의 거장 허우 샤오시엔 감독의 제자로 알려진 치앙 감독은 스승의 작품처럼 정갈하고 짜임새 있는 화면에 이러한 주제를 깊이 있게 담았다. ‘ただいま(타다이마·다녀왔어요)’ ‘おかえり(오카에리·어서 와요)’. 가족끼리 나누는 이 짧은 인사말을 주고받는 두 여자의 모습에서 가슴 뭉클한 감동이 전해지는 이유다.


글=김나현 기자 respiro@joongang.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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