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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진석의 걷다보면] 바람이 분다

중앙일보 2015.11.03 11:18
제주올레 트레킹 5회

오늘은 우도로 간다. 모슬포를 중심으로 올레길 몇 개 코스를 걷던 우리 일행은 올레길의 시작(당시에는 섬 전체가 이어지지 않았다)인 1코스로 목적지를 옮겼다. 길의 번호는 표기를 위한 기호일 뿐, 꼭 순서대로 걸을 필요는 없다. 나와 심샘은 ‘지금까지 만들어진 올레길을 다 걷는다’는 목표를 정했기 때문에 서울로 올라가야 하는 일행의 일정에 맞춰 걷는 코스를 조정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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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1코스가 끝나는 지점인 제주 성산항에 도착했다. 우도로 들어가는 배편을 기다리며 멀리서 우도를 바라보았다. 소가 누워 있는 형상의 섬이다. 제주도 속의 제주도라 해야 하나. 우도는 마치 제주도를 축소한 듯 보였다. 이미 관광지로 널리 알려진 우도는 땅콩, 짬뽕, 영화 촬영지, 우도봉, 순환버스 등 많은 먹거리와 볼거리로 유명하다. 무엇보다 우도의 바닷물은 정말 맑다. 그 에메랄드 빛깔의 해수욕장은 성수기에 가장 인기가 많은 곳이기도 하다. 제주올레는 우도 올레길을 1-1코스라 정하고 섬을 한 바퀴 돌 수 있는 길을 만들었다.
 

 사실 올레길에는 만들었다는 표현은 잘 어울리지 않는다. 제주올레 정신이 바로 ‘노 공구리’이기 때문이다. 길을 만들기 위해 무언가를 파괴하지 않는다는 뜻이다. 최대한 자연에 있는 길을 활용하고 불가피한 경우에만 길을 내기 위해 여러 가지 방법을 연구한다고 한다.
 

해질 녘에 도착해서 숙소에 짐을 풀고 일행과 잠시 바닷가에 나왔다. 배편으로 10여 분 거리밖에 되지 않지만 우도의 바람은 제주의 바람과는 다르게 느껴졌다. 좀 더 거칠고 세차다. 제주의 바람이 아름다운 여인의 부드러운 손길이라면 우도의 바람은 바다 냄새 풍기는 남자의 거친 손길을 닮았다.
 
바람을 맞으며 해변을 걷는다. 어스름한 빛과 맑은 바닷물이 어우러져 아름다운 쪽빛을 만들어내고 있다.
 해가 진다. 지는 해를 중심으로 하늘과 바다가 붉은색으로 칠해져 가고 있다. 난 빨간색을 좋아한다. 특히 자연이 만들어 내는 빨간색은 언제나 매혹적이고 나를 흥분시킨다. 내 얼굴이 붉다. 내 머리카락도 붉다. 내 몸도 붉다.
 

제비가 내 머리 위를 낮게 날고 있다.
 내일은 비가 올려나.

 
바람에 부딪히는 창문 소리에 밤새 잠을 설치다가 새벽 3시가 넘어 겨우 잠이 들었다. 맴돌던 생각도 함께 잠들었다.

 푸르스름하던 하늘과 바다가 조금씩 자기 색깔을 찾아 가고 있다. 카메라 가방만 들고 숙소에서 나왔다. 일행들이 하나 둘 모인다. 마치 출근하는 사람처럼 얼굴이 좀 부어있고 숙취에 시달리는 사람도 보인다. 천천히 일행의 꼬리를 따라 우도 올레길을 걷기 시작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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에메랄드빛 해안가를 지나갈 무렵 한 젊은 청년이 더위를 식히며 바람을 맞고 있다. 어딘가를 바라보며 깊은 생각에 빠져 있는 모습. 바람이 무슨 말을 전해주는 듯 그 자리에 한참 앉아있다. 올레꾼인가 보다. 무엇을 생각하고 있을까? 20년 전 그 청년과 비슷한 나이였을 나는 무엇을 하고 있었을까? 종로의 아스팔트를 뛰어다니고 친구들과 신림동 주점에 앉아 소주를 마시고 목청껏 노래를 부르고 있었을 것이다. 조금 다른 모습에 지나간 시간이 추억처럼 떠오른다.
 
사람 키보다 작은 돌담 사이로 길은 계속 이어진다. 돌담 중간 중간 구멍난 사이로 푸릇푸릇한 작물이 보인다. 올레길을 걷다 보면 이런 장면을 많이 보게 된다. 먼 과거의 제주도는 척박한 땅이었다. 섬이라는 특성 때문에 유배지가 되었고 바닷길의 요충지로 외부의 침략이 빈번했다. 밭을 보면 그런 역사를 알 수 있는 증거가 보인다. 밭 한가운데 떡 하니 자리 잡고 있는 무덤들이다. 밭 한가운데 무덤이라니, 모르는 사람 눈에는 황당해 보이기만 할 뿐이지만 제주도 지인의 이야기를 들어보니 여기에도 나름의 역사가 있었다.
 
길을 계속 걸으니 이 척박한 환경에서 살아가기 위해 자연을 거스르지 않고 조화를 만들어가는 제주 사람의 모습이 보인다. 이것은 내가 제주 올레길에서 배울 수 있는 최고의 공부였다.
 
붉은 양귀비꽃 무더기 앞에 멈췄다. 이토록 강렬한 색깔을 본 적이 있던가. 바람이 불어 꽃들이 춤을 춘다. 저마다 다른 몸짓으로. 그렇게 한참 군무를 추더니 이내 자리로 돌아와 언제 그랬느냐는 듯 도도하게 고개를 들고 우리의 시선을 즐기고 있다. 찰나의 순간에 본 꽃들의 춤이었다.
 
길은 어느새 처음 시작했던 곳으로 이어진다. 우도 올레길의 특징이다. 내일은 다시 배를 타고 성산항으로 간다. 그곳에서부터 다시 이어진 올레길을 걷기 시작할 것이다. 숙소로 돌아와 저녁을 먹는데 말도 안 되는 청천벽력 같은 소식이 들린다. 함께 걷기로 한 심샘에게 갑자기 일이 생겼다. 내일 일행과 함께 서울로 올라가야 한단다. 이게 무슨 소린가? 나 혼자라면 절대 올레길을 걷지 못했을 거다. 심샘과 일행이 있어 그나마 걸을 수 있었다.
 
혼자.
길.
걷다.

 
이 세 단어가 내 머릿속에서 꼬인다.
 과연 내가 혼자 길을 걸을 수 있을까?

 
내 머릿속은 텅 비워져 버렸다. 평소에 이런 여행을 해 본 사람이라면 별문제 아니겠지만, 난 태어나 한 번도 혼자 여행을 해 본적이 없었다. 183cm의 키에 100kg의 몸무게를 가진 내가 고민에 빠진다.
 
난 초보자다. 
걷기도 초보자.
여행도 초보자.
제주도 초보자.

 
돌아갈 거면 서둘러 비행기 예약을 해야 한다. 장고 끝에 악수라더니, 생각이 많아 단순해진 걸까. 뭔가 대단한 것을 바라는 것도 아니고 오기도 아니었다. 그저 서울에 갔다 다시 오는 것이 귀찮았다. 싫어하는 비행기를 또 타야 하고, 갔다 오는 사이에 생각은 더 많아 것이고. 무엇보다 매는 빨리 맞는 게 낫다는 계산도 있었다.
 
이제 혼자 걷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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