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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철호의 시시각각] 삼성 이재용은 왜 계열사를 팔까

중앙일보 2015.11.03 00:25 종합 34면 지면보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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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철호
논설실장

10월 수출이 곤두박질쳤다. ‘수출 절벽’이라고 난리다. 하지만 올해 경상수지 흑자는 사상 최대인 1100억 달러로 중국·독일에 이어 세계 3위에 오를 기세다. 경제원론에 따르면 당연히 두 가지 화학반응이 일어나야 한다. 먼저 외환보유액이 폭증해야 한다. 하지만 3600억 달러에서 제자리걸음이다. 원화가치도 당연히 강세여야 한다. 그러나 달러당 1150원 수준의 약세다. 불가사의한 수수께끼다.

 우리 경제의 현주소를 짚어보려면 눈여겨볼 통계가 따로 있다. 바로 자본수지다. 지난해 우리 자본수지는 무려 903억8000만 달러 적자였다. 올해도 9월 말까지 720억 달러 적자다. 무역흑자보다 더 많이 해외로 빠져나간 것이다. 지난해 우리 기업들은 해외공장을 짓거나 외국 기업 흡수·합병에 253억 달러를 썼다. 올해 국민연금은 200억 달러의 해외 주식·채권·부동산을 쓸어담고 있다. 이제 무역수지보다 자본수지가 더 중요하다.

 여기에는 좋은 신호와 나쁜 조짐이 뒤섞여 있다. 밝은 뉴스라면 한국이 1980년대의 일본, 2000년대 중국과 판박이란 점이다. 막대한 무역흑자를 배경으로 미 국채 등을 사들여 순자산국으로 탈바꿈하고 있다. 오랫동안 부러워했던 꿈이 이뤄진 것이다. 하지만 나쁜 신호가 더 문제다. 그만큼 국내의 기대수익률이 낮아진 것이다. 오죽하면 공장은 외국에 짓고, 국내의 저금리를 피해 해외 주식·채권 매입에 골몰하겠는가.

 삼성그룹 고위 관계자는 “요즘 최대 관심은 ‘일본의 잃어버린 20년’”이라고 했다. 놀랄 만큼 닮은꼴이기 때문이다. 가장 큰 공통분모는 저출산·고령화다. 인구절벽 다음 단계는 반드시 소비절벽이 온다. 일본의 경제성장률 급락을 20년의 시차를 두고 따라가는 것도 불길하다. 일본처럼 구조적 저성장을 맞으면 기업의 부담은 커진다. 그중 하나가 정년 연장이다. 냉정하게 말하면 연금 등 일본의 공공부문이 맡았던 55~65세의 복지를 기업들이 반강제로 떠안았다. 기업가 정신이라고? 제대로 정신이 박힌 기업가라면 한국이든 일본이든 국내 투자를 망설일 수밖에 없다.

 눈치 빠른 삼성부터 최근 방산 부문과 화학 계열사를 팔아치우고 있다. 이재용 부회장이 주도하는 가지치기다. 저성장에 미리 대비하면서 경쟁력이 뛰어난 반도체와 미래 먹거리인 바이오에 집중하는 포석이다. 일본 전문가인 서울대 김현철 교수는 “저성장 시대의 생존법은 개종(改宗)에 버금가는 혹독한 변신”이라고 강조한다. 그는 유니클로를 예로 들었다. 유니클로는 이제 일본의 ‘국민복’이다. 소비절벽에 맞춰 가격은 확 낮추고, 품질은 높이고, 패션성도 포기하지 않은 덕분이다. 이를 위해 생산은 몽땅 중국에서 하고, 도산한 일본 의류 공장장들을 중국에 보내 품질관리를 맡겼다. 일본 의류업계는 “유니클로가 죽어야 우리가 산다”고 아우성쳤지만 결국 살아남은 건 유니클로였다.

 우리 경제 주체들은 과연 ‘잃어버릴 20년’에 대비나 하고 있을까. 박근혜 정부는 경제민주화→규제완화→세무조사→경제 살리기→4대 개혁으로 오락가락 중이다. 삼성 이외의 대기업들도 구조조정 시늉만 내고 있다. 일본 재벌들은 맥아더 사령부가 아니라 저성장 압력에 의해 완벽히 해체됐다. 한국의 가계는 가계부채에 아랑곳없이 오늘도 열심히 빚을 내고 있다. 여기에다 우리 사회는 온통 역사 교과서에 빠져 있다. 역사 교과서 때문에 앞으로 20년의 역사를 잃어버리지 않을까 겁난다.

 참고로 지난 2월 14일 중앙일보 북섹션의 ‘조선은 왜군에 왜 짓밟혔나, 피로 쓴 반성문’을 소개하고 싶다. 서애 류성룡의 ‘징비록(懲毖錄)’ 이야기다. 조선은 여기서 아무것도 못 배운 채 병자호란의 치욕을 당했다. 놀라운 것은 일본이다. 62년 뒤 징비록을 찍어내 베스트셀러로 만들었다. 그 징비의 정신을 메이지유신의 밑그림으로 삼은 게 일본이다. 이렇게 준비성이 뛰어난 일본도 영문을 모른 채 ‘잃어버린 20년’을 당했다. 한국은 그런 이웃 나라의 실패를 뻔히 알고도 재앙을 향해 줄달음치고 있다. 정말 바보 같은 짓이다.

이철호 논설실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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