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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소문 포럼] 고환율 정책 되풀이해선 안 된다

중앙일보 2015.11.02 01:08 종합 28면 지면보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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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현곤
편집국장 대리

외환시장 수급에 따라 원화값을 결정하는 변동환율제는 1990년 도입됐다. 그 이후 정부가 시장에 노골적으로 개입한 사례는 세 차례 있었다. 첫 번째는 김영삼 정부 막판인 96~97년. 1인당 국민소득 1만 달러를 넘어선 게 95년이다. 여세를 몰아 96년 경제협력개발기구(OECD)에 가입했다. 선진국이 된 것처럼 들떴다. 정부는 이런 분위기를 97년 말 대통령 선거까지 끌고 갈 필요가 있었다.

 어떻게 1만 달러를 지키고, 물가상승률을 5% 이내로 억제하느냐. 정부는 손쉬운 방법을 택했다. 원-달러 환율이 올라가지 않도록 800원대에서 묶은 것. 경상수지 적자가 95년 97억 달러, 96년 238억 달러로 계속 늘었다. 엄청난 적자였다. 시장이 정상 작동했다면 원화는 달러당 1000원 선을 훌쩍 넘는 게 맞았다. 놀랍게도 원-달러 환율은 외환위기 직전까지 800원대에 머물렀다. 결과론이지만, 800원대를 고집하지 않았으면? 수출이 늘고 적자가 줄면서 어느 정도 균형을 찾았을 것이다. 달러가 바닥나는 최악의 상황은 피하지 않았을까.

 두 번째 개입은 노무현 정부 초반의 2003~2004년. 정부는 수출을 늘리기 위해 원-달러 환율의 상승을 유도했다. 환율이 떨어지면 시장에 원화를 풀어 끌어올렸다. 최중경 재정경제부 국제금융국장은 달러당 1140원을 마지노선으로 삼았다. 이 선 밑으로 떨어지지 않으려고 수십조원을 쏟아 부었다. 수출이 늘었지만 부작용이 만만치 않았다. 수입 물가가 오르면서 내수가 침체됐다. 미국의 ‘환율조작국 리스트’에도 올랐다. 환율조작국이라는 꼬리표가 지금까지 따라다닌다.

 세 번째는 이명박 정부의 고환율(원화 약세) 정책이다. 2008년 강만수 경제팀이 들어서자 기다렸다는 듯 고환율을 밀어붙였다. 원-달러 환율이 900원대에서 순식간에 1000원대로 올랐다. 그해 9월 금융위기가 터지자 1400원대까지 치솟았다. 덕분에 수출이 살아났다. 경상수지 흑자가 늘면서 금융위기 극복의 밑거름이 됐다.

 얻은 게 있으면 잃는 게 있는 법. 원-달러 환율이 오르면 국민의 구매력이 줄어든다. 물가도 오른다. 국민이 허리띠를 졸라 수출 대기업을 먹여 살린 셈이다. 대기업은 고환율 덕에 사상 최대의 실적을 냈다. 그러나 대기업의 온기가 가계와 중소기업으로 퍼지지 않았다. 양극화가 심해졌다.

대기업 노조는 자신들이 속한 정규직 노조원의 임금을 올리는 데 열중했다. 대기업과 중소기업, 정규직과 비정규직의 임금 격차가 커졌다. 2008년 대기업 정규직 임금이 100이면 중소기업 비정규직은 39였다. 2014년엔 100대 32로 벌어졌다. 어느새 ‘정부는 기업 편’이라는 인식이 퍼졌다. 심상치 않은 분위기를 뒤늦게 감지한 이명박 정부가 동반 성장을 들고 나왔다. 국민은 냉랭했다.

 우리만 환율의 유혹에 빠지는 건 아니다. 금융위기 이후 마땅한 성장동력을 찾지 못한 세계 각국이 환율 조정에 매달리고 있다. 아베 신조 일본 총리는 2012년 말부터 엔저(일본판 고환율 정책)를 밀어붙였다. 엔화를 무제한으로 풀었다. 수출이 늘고 대기업이 살아났다. 일본 경제가 20년 침체에서 당장이라도 벗어나는 듯했다.

하지만 다시 꺼지고 있다. 올 2분기 일본의 성장률은 마이너스 1.2%에 그쳤다. 수입 물가가 치솟으면서 소비가 부진하다. 일본인들의 호주머니 사정이 나아지지 않았다. 중국도 성장세가 둔화되자 최근 위안화 절하(중국판 고환율 정책)를 승부수로 던졌다. 지금까지 별 효과가 없다.

 올 1~9월 한국의 수출은 전년 동기보다 6.5% 줄었다. 10월 수출은 15.8%나 급감했다. 미국이 금리 인상을 늦추자 달러가 약세로 돌아섰다. 수출 여건은 더 악화됐다. 돌파구가 보이지 않는다. 기업은 고환율의 단맛에 오랫동안 길들여져 있다. 전 세계가 환율전쟁에 나서는데, 우리만 손 놓고 있다는 비판도 나온다. 하지만 과거 세 차례의 시장 개입은 큰 후유증을 남겼다. 국가의 경쟁력은 정부의 환율 조정이 아니라 기업의 혁신 능력에서 나온다. 고환율을 통해 국민에게 부담을 전가하는 정책을 되풀이해선 안 된다. 정부가 시장을 절대로 이길 수 없다.

고현곤 편집국장 대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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