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독립운동 노선 다툼 격화 … 아나키즘 등장하다

중앙선데이 2015.11.01 04:51 451호 1면 지면보기
【총평】



3.1운동 이후 서구와 일본 등을 통해 자본주의, 사회주의, 아나키즘(무정부주의) 등 다양한 사상과 이념들이 수용되면서 민족 운동 내에서도 사상 경향과 운동 노선이 다양해졌다. 3.1운동 이후 만주와 연해주 일대에서는 여러 무장 단체가 형성되었다. 독립군은 압록강과 두만강을 넘어 평안도와 함경도에 진입하여 일제 군경과 치열한 전투를 벌였고, 일제 식민 통치 기관을 파괴했다.

조선혁명선언, ‘민중은 우리 혁명의 대본영이다, 폭력은 우리 혁명의 유일한 무기다’라고 주장해 일제를 경악에 빠뜨렸다.


16. 아나키즘

의열단이 활약하던 시기의 신문 기사를 보면 의열단은 정의혈단(正義血團)으로 표현된 경우도 많았다. 이는 의열단이 자신들의 희생을 전제로 일제 식민통치에 타격을 가해 조국의 독립을 달성하려 했던 직접행동조직으로 인식되어 있었다는 사실을 말해준다. 의열단의 존재는 일제를 두려움에 떨게 만들었다. 당시 독립운동의 노선 다툼은 치열했다. 대표적인 사례가 무장투쟁론자와 외교독립론자들의 노선 다툼이었는데, 의열단의 직접행동 노선에 대해 외교독립론자들이 비판하자 의열단은 단재 신채호에게 자신들의 주의?주장을 담은 선언문 작성을 의뢰했고 그 결과 ‘조선혁명선언’이 탄생했다.



신채호는 민족주의자이자 아나키스트이다. 피압박 민족의 시각으로 바라본 세상과 민중의 시각으로 바라본 세상이 같았기에 신채호에게는 한국 민족주의와 국제주의인 아나키즘이 서로 모순되지 않았다.



재중국 한인 아나키스트들은 두 가지 방향으로 독립운동을 전개했다. 하나는 의열단이나 다물단 같은 행동조직을 만들어 일제 식민통치기관을 직접 공격하거나 친일파를 제거하는 일이었다. 또 하나는 자신들의 이상을 실현하기 위한 이상촌을 건설하는 사업이었다.



애국 계몽 운동과 의병 운동은 모두 국권 회복이라는 공통 목표를 가지고 상호 보완적인 구실을 했지만, 사상적 배경과 전개 양상에는 차이가 있었다. 애국 계몽 운동은 민중 계몽, 근대 교육, 식산흥업, 언론 활동을 통해 민족의 실력을 양성하여 국권을 회복하려는 운동이었다. 하지만 애국 계몽 운동에는 한계점도 있었다. 계몽 사상가들은 당시 국제 관계를 약육강식과 적자생존의 원리가 지배하는 것으로 인식하여 민족의 실력을 양성하는 것이 급선무라고 생각했다. 이처럼 애국 계몽 운동에는 스펜서의 사회 진화론이 내재되어 있다. 다윈이 주장한 생물학적 진화론의 약육강식과 적자생존 등을 인간 사회와 국제 관계에 적용한 사회 이론이다. 이 이론은 제국주의 열강의 약소국 지배를 정당화하는 논리로 이용되었다. 의병 운동은 외세의 침탈과 국권 침탈의 위기 속에서 자발적으로 봉기하여 무력으로 국권을 회복하려는 운동이었다. 또한, 국가와 민족이 위기에 처해 있을 때 일어난 구국 운동이었고, 양반 유생에서 농민에 이르기까지 광범위한 사회 계층이 참여한 민족 운동이었다. 20세기 초 열강의 약소국 침략이 극심하던 시기에 의병들이 일제의 침략에 대항하여 무장 투쟁을 전개했다는 점에서 세계 약소민족의 독립 운동사에 커다란 의의를 지닌다.

수인 모습의 신채호. 눈빛이 형형하다.



을사조약 체결을 계기로 애국 계몽 운동은 국어와 국사를 연구하여 민족의식을 고취하려는 국학 운동으로 나타났다. 국사 분야에서는 계몽적 특성과 국권 수호적 성격을 지닌 근대 민족주의 역사학이 등장했다. 애국 계몽 운동 시기에 신채호와 박은식 등은 근대 계몽 사학을 성립했다. 특히 신채호는 「독사신론(讀史新論)」을 발표하여 역사 서술의 주체를 민족으로 설정하고, 중국 중심의 역사 인식과 일본에 의한 한국 고대사 왜곡을 비판했다. 이 시기에 신채호, 박은식 등은 「을지문덕전」, 「이순신전」 등 외적의 침략을 물리친 영웅들의 전기를 발간하여 애국심을 고취했다. 최남선과 박은식 등은 조선 광문회를 조직하여 민족의 고전을 정리하고 간행했다.



개화기에도 국어에 대한 관심이 확대된 사실이 있다. 갑오개혁 이후 공사 문서에 국한문 사용이 제도화 되었으며, 당시의 교과서와 유길준의 「서유견문」은 국한문체의 보급에 이바지하였다. 독립신문과 제국신문이 순 국문으로 간행되면서 국문에 대한 관심이 높아졌고, 우리말 표기법 통일의 필요성이 제기되면서 국문 연구가 진전되었다. 대한제국 말기에 학부 안에 국문 연구소가 설립되었고(1907), 지석영과 주시경 등의 주도로 국어 문법의 연구와 정리가 이루어졌다. 주시경은 국어 문법을 저술하여 국문 연구의 새로운 장을 열기도 했다. 국문 연구소는 나중에 조선어 학회의 모체가 되었다.



헌병 경찰 통치 시대에는 공개적인 활동이 쉽지 않았으므로, 국내에서는 비밀 결사를 조직하여 독립을 위한 다양한 활동을 전개했다. 임병찬이 이끌었던 독립 의군부는 고종의 밀지를 받아 조직된 비밀 결사로 조선 왕실을 복원하려는 복벽주의를 지향했다. 이를 위해 전국적으로 의병을 일으키려 했으나, 조선 총독에게 국권 반환 요구서를 보내려고 계획하던 중 발각되어 조직이 해체되었다.



일제는 우리 민족 말살을 위해 역사까지 왜곡했다. 조선 총독부는 한국사를 왜곡하기 위해 조선사 편수회를 설치하고, 『조선사』37권을 편찬했다. 조선사 편수회와 경성 제국 대학의 교수들은 청구 학회를 결성하여 식민 사관을 퍼뜨리는 데 앞장섰다. 한국사를 왜곡한 일제는 식민 사관에는 한국사가 봉건 사회를 거치지 못하고 고대 사회 단계에 머물러 있다는 정체성론, 주변 역사의 영향을 받아 변화하였다는 타율성론, 지리적으로 대륙에 속박된 위치에 있다는 반도성론, 합치지 못하고 분열되었다는 당파성론 등이 있다.



애국 계몽 운동 때부터 한국사를 연구해 온 박은식과 신채호는 일제의 식민 사학에 맞서 민족주의 사학을 발전시켰다. 중국 상하이 임시 정부에서 활동해 온 박은식은 일본의 한국 침략 과정을 서술한 『한국통사』와 한국 독립운동 과정을 서술한 『한국독립운동지혈사』를 저술했다. 민족혼을 중시한 박은식은 『한국통사』서문에서 “국가는 형(形)이요, 역사는 신(神)이다.”라는 말을 남겼다. 신채호는 『독사신론(讀史新論)』을 연재하여 왕조 중심의 사관과 사대주의를 비판한 바 있다. 그 후 신채호는 고대사 연구에 치중하여, 『조선상고사』, 『조선사연구초』를 저술했다. 신채호는 『조선상고사』서문에서 역사는 “아(我)와 비아(非我)의 투쟁”이라고 정의했다. 이병도, 손진태 등은 1934년 진단학회를 조직하고 진단학보를 발간하여 문헌 고증을 중시하는 실증주의 사학을 발전시켰다. 그러나 일제가 우리나라에 있는 역사서를 대부분 소각한 상황에서 증거를 토대로 역사를 연구하는 데는 어려움이 있었다.



한편, 조선인의 일본 이주는 1920년대 이후 크게 증가했다. 이들은 주로 도쿄, 오사카 등 공업 도시로 이주하여 일본인들이 꺼리는 토목, 광업, 운수업 등에 종사했다. 조선인 노동자들의 임금은 일본인의 절반에도 미치지 못했고, 일본인들로부터 온갖 차별과 멸시를 당했다. 중?일 전쟁과 태평양 전쟁 시기에 전쟁이 확대되면서 노동력이 부족해지자, 일제는 조선인을 강제로 징용했다. 무려 150만 명이나 되는 조선인이 일본의 탄광이나 군수 공장에서 강제 노역에 시달렸다. 1923년 관동 대지진 때에는 조선인이 방화하고 우물에 독약을 뿌렸으며, 일본인을 살해하고 일본 여인을 강간한다는 조작된 유언비어가 퍼졌다. 이러한 유언비어는 일본 신문기사에 사실인양 보도되었다. 이 때문에 많은 한국인이 일본인 자경단에 의해 살해되었다(관동 대학살).



【고교 한국사 8종 교과서 비교해 보니】









 



 



 



【핵심 키워드】



☞ 3.1운동 이후 민족 운동 내에서 자본주의, 사회주의, [아나키즘(무정부주의)] 등 다양한 사상과 이념이 수용되었다. [의열단]은 [신채호]에게 자신들의 주의?주장을 담은 선언문 작성을 의뢰했고, 이에 [‘조선혁명선언’]이 작성되었다. [애국 계몽 운동]은 민중 계몽, 근대 교육, 식산흥업, 언론 활동을 통해 민족의 실력을 양성하여 국권을 회복하려는 운동이다. 이 운동에는 [스펜서의 사회 진화론]이 내재되어 있다. [의병 운동]은 국권 침탈의 위기 속에서 자발적으로 봉기하여 무력으로 국권을 회복하려는 운동이다. 임병찬이 이끌었던 독립 의군부는 고종의 밀지를 받아 조직된 비밀 결사로 조선 왕실을 복원하려는 [복벽주의]를 지향했다.



을사늑약 이후 애국 계몽 운동은 [국학 운동]으로 나타났다. 일제는 우리 민족 말살을 위해 역사를 왜곡했다. 조선 총독부는 한국사를 왜곡하기 위해 [조선사 편수회]를 설치했다. 한국사를 왜곡한 [식민 사관]에는 [정체성론], [타율성론], [당파성론] 등이 있다.



신채호는 [「독사신론(讀史新論)」]을 발표하여 역사 서술의 주체를 민족으로 설정하고, 중국 중심의 역사 인식과 일본에 의한 한국 고대사 왜곡을 비판했다. [박은식]은 일본의 한국 침략 과정을 서술한 [『한국통사』]와 한국 독립운동 과정을 서술한 [『한국독립운동지혈사』]를 저술했다. 이병도, 손진태 등은 1934년 [진단학회]를 조직하고 진단학보를 발간하여 문헌 고증을 중시하는 실증주의 사학을 발전시켰다. 최남선과 박은식 등은 [조선 광문회]를 조직하여 민족의 고전을 정리하고 간행했다.



1923년 관동 대지진 때에는 조선인이 방화하고 일본인을 살해한다는 조작된 유언비어가 퍼졌다. 이 때문에 많은 한국인이 일본 자경단에 의해 살해되었다([관동 대학살]). ☜



 



【예상 문제】



1.?다음 취지문을 발표한 단체가 활동한 시기의 사실로 옳은 것은?



국민의 지혜를 열고 국가의 힘을 기르는 길은 교육과 산업의 발달에 달려 있다고 아니할 수 있겠는가! 교육과 산업의 발달이 곧 자강의 방도임을 알 수 있는 것이다. 그러나 만일 이 자강의 목적을 관철하기를 바랄진대 부득불 먼저 그 국민의 정신을 배양하여 단군과 기자 아래 4천 년 한국의 정신으로 2천만 모든 사람의 정신 속에 흐르도록 하여, 한 번 숨을 들이고 내쉬는 시간에도 자기 나라 정신을 잊지 않게 만든 연후에야 바야흐로 자강의 마음을 단련하고 국권 회복의 활기를 만들게 될 것이다.



① 대종교가 창시되었다.



② 경부선 철도가 개통되었다.



③ 대한매일신보가 창간되었다.



④ 한성 사범 학교가 설립되었다.



⑤ 국채 보상 운동이 전개되었다.

* 2014학년도 9월 모의평가 13번



 



2.?(가), (나)는 같은 시기에 활동한 두 운동의 주장이다. 이 두 운동에 대한 설명으로 옳지 않은 것은?

?

(가)?왜적과는 한 하늘을 이고 함께 살지 아니하기로 맹세하여 이미 여러 번 거의(擧義)했다가 실패하였어도 스스로 그칠 줄 모르는 바는,?진실로 왜적과 우리가 같이 거처할 수 없는 까닭입니다.?…?(중략)?… 승패의 수는 미리 헤아릴 수 없으나 살고 죽는 의의는 본래 두 가지가 아니므로 삼가 거사한 전말을 격문으로써?8도에 고하나이다.



(나)?우리에게 남은 오직 하나의 길은 장래의 힘을 기르는 것이다.?우리가 망국의 비극을 당하는 것은 힘이 없는 까닭이니 힘이 모자라서 잃은 것은 힘을 길러야 찾을 것이다.?국내에 남을 수 있는 자는 국내에서 교육과 산업을 일으켜 민력을 배양하고 ….



①?(가)는 공화제 정부를 수립하려고 하였다.



②?(가)는 일제를 축출하기 위하여 무장 투쟁을 전개하였다.



③?(나)는 국권 회복을 위한 국민 계몽 활동을 전개하였다.



④?(나)는 식산 흥업을 민족 운동의 중요한 방책으로 삼았다.



⑤?(가)와?(나)의 활동은 일제의 외교권 박탈을 계기로 활발하게 전개되었다.??

* 2010학년도?9월 모의 평가?12번



 



3.?다음?(가), (나), (다)?주장에 대한 설명으로 적절하지?않은?것은?



(가)?군사를 일으켜 통감부의 주권 침탈을 격퇴하고 국권을 회복해야 한다.



(나)?교육,?언론,?종교 등 문화 활동과 산업 진흥을 통하여 국권을 회복해야 한다.?



(다)?독립 운동 기지를 건설하고 독립군을 양성한 후 일제와의 전쟁을 통해 독립을 쟁취해야 한다.



①?(가)를 실천한 단체로는 연해주의 대한 광복군 정부가 있다.



②?(나)는 사회 진화론의 영향을 받았다.



③?(다)를 실천한 세력은 만주에 무관 학교를 세웠다.



④?(나)는?(가)를 실천한 세력에 비판적이었다.



⑤?(나)를 실천하면서?(다)를 추진한 단체로는 신민회가 있다.

?* 2007학년도?6월 모의 평가?17번



 



4.?다음 글을 쓴 인물에 대한 설명으로 옳은 것은?

세월이 불운하여 뜻을 얻지 못하고 나는 더욱 심히 쇠하였으니 어찌 오늘 독립 운동사를 지을 줄 생각이나 했겠는가??…?(중략)?… 우리의 국성(國性)은 모든 면에서 다른 민족과 구별되어 왔다.?이러한 여러 요소가 합해져 우리의 국혼(國魂)을 강하고 견고하게 만들었으므로 결코 다른 민족에 동화될 수 없다.

① 조선 불교의 자주적 근대화를 추구하였다.



② 대종교를 개창하여 독립 운동에 영향을 주었다.



③ 유교의 폐단을 지적하고 개혁 방안을 제시하였다.



④ 한국사를 세계사적 보편성에 맞추어 체계화하였다. ?



⑤ 고대사 연구를 중심으로 민족주의 사학을 정립하였다.

?* 2013학년도 수능?5번

?



5.?다음 사건이 발생한 지역의 한인 민족 운동으로 옳은 것은?

○월 ○일



날은 샜지만 화재는 여전히 계속되고 있다.?누가 그런 말을 했는지는 모르겠지만 이 화재는 지진 때문만이 아니라 조선인의 소행이라는 소문이 있다.?“방화하려는 무리가 있다고 하니 각자 경계를 엄중히 하고 검거를 위해 적극 보조해 주기 바란다.”라는 내용의 벽보도 눈에 띄었다.?조선인의 행동에 관한 여러 가지 유언비어가 나돌았고 누가 뭐라 할 것도 없이 곤봉,?죽창 같은 것을 들고 밖으로 나갔다.



① 대한 국민 의회를 수립하였다.



② 파리 강화 회의에 김규식을 파견하였다.



③ 유학생의 주도로?2.8?독립 선언서를 발표하였다.



④ 신흥 무관 학교를 설립하여 독립군을 양성하였다.



⑤ 장인환과 전명운이 대한제국의 전직 외교 고문을 사살하였다.

* 2012학년도?6월 모의평가?14번



 



6.?다음 사건이 일어난 지역의 한인에 대한 설명으로 옳은 것은?

시내의 중요한 건물은 대개 소실되었는데 불탄 가옥만?20만 호에 달하였다.?거리에는 거꾸러진 전봇대와 끊어진 전선 등으로 참담한 광경이 펼쳐졌다.?이번 지진으로 재난을 당한 조선인 학생과 노동자?1만?5천여 명을 병영에 수용한 후 경찰관을 붙여 감시하기로 하였다.?그럼에도 자경단이 박해를 가한다면 세계 각국에 대해 결코 좋은 풍문이 되지 못할 것이다.

① 대조선 국민 군단을 조직하였다.



② 중앙 아시아로 강제 이주되었다.



③ 신한촌 등 한인 집단촌을 형성하였다.



④ 청산리 전투에 대한 보복으로 학살당하였다.



⑤ 유학생의 주도로 독립선언서가 발표되었다.

?* 2010학년도?6월 모의평가?11번?



 



7. ?(가), (나)?학자의 역사 연구에 대한 설명으로 옳은 것은?



(가)?옛사람이 이르기를 나라는 멸할 수 있어도 역사는 멸할 수 없다고 하였다.?나라는 형체이고 역사는 정신이다.?오늘날 우리나라의 형체는 이미 훼손되고 말았으나,?정신만큼은 고고히 남아 존재하고 있으니,?이 통사는 바로 이런 뜻에서 쓰는 것이다.?



(나)?우리 조선의 역사적 발전의 전 과정은 다소의 차이가 인정 되더라도,?외관적인 소위 특수성은 다른 문화 민족의 역사적 발전 법칙과 구별되어야 하는 것은 아니며 세계사적 보편성에 따라 전개되어 왔다.



①?(가) -?진단 학회를 중심으로 활동하였다.



②?(가) -?조선학 운동의 일환으로 한국사를 연구하였다.



③?(나) -?식민 사관의 정체성론을 극복하려 하였다.



④?(나) -?한국사의 전개에 끼친 외세의 영향을 강조하였다.



⑤?(가), (나) -?랑케 사학의 실증적 연구 방법을 표방하였다.

?* 2015학년도?6월 모의평가?15번



 



8. 다음 글을 쓴 역사학자에 대한 설명으로 옳은 것은??

옛 사람이 이르기를 나라는 없어질 수 있으나 역사는 없어질 수 없다고 하였으니,?그것은 나라는 형체이고 역사는 정신이기 때문이다.?이제 한국의 형체는 허물어졌으나 정신만이라도 오로지 남을 수 없는 것인가.

① 조선사 편수회에 참여하였다.



② 민족주의 사학을 발전시켰다.



③ 한국사의 타율성을 강조하였다.



④ 진단 학회를 중심으로 활동하였다.



⑤ 유물 사관의 관점에서 역사를 연구하였다.

?* 2014학년도 수능?3번



 



9.?다음 글을 쓴 역사학자에 대한 설명으로 옳은 것은?

대개 국교,?국어,?국사는 혼(魂)에 속하는 것이요,?전곡(錢穀),?군대,?함선,?기계 등은 백(魄)에 속하는 것으로 혼의 됨됨은 백에 따라서 죽고 사는 것이 아니다.?그러므로 국교와 국사가 망하지 않으면 곧 나라도 망하지 않는 것이다.

① 진단 학회에 소속되어 활동하였다.



② 한국 독립 운동지혈사를 저술하였다.



③ 블라디보스토크에서 권업회를 조직하였다.



④ 명동 학교를 설립하여 민족 교육을 실시하였다.



⑤ 사적 유물론에 입각하여 한국사의 보편적 발전을 강조하였다.

?* 2012학년도?9월 모의평가?5번



 



10.?다음과 같은 일이 있었던 시기의 국내 상황을?[보기]에서 모두 고른 것은?

장지연,?신채호,?박은식 등 계몽 사학자들은 우리 역사상 외국의 침략에 대항하여 승리한 영웅들의 전기를 써서 널리 보급시켰으며,?외국의 건국 영웅이나 독립 운동,?혁명 운동의 역사를 번역,?소개하였다.

[보기]



ㄱ.?민중 계몽을 위한 만민 공동회가 개최되고 있었다.



ㄴ.?국권을 회복하려는 애국 계몽 운동이 전개되고 있었다.



ㄷ.?민족 의식을 드높이기 위하여 외국 흥망사가 많이 소개되고 있었다.



ㄹ.?가혹한 식민 통치를 은폐하기 위한 문화 통치가 실시되고 있었다.



① ㄱ,?ㄴ ? ?② ㄱ,?ㄷ ? ?③ ㄴ,?ㄷ ? ?④ ㄴ,?ㄹ ? ?⑤ ㄷ,?ㄹ

* 2005학년도?6월 모의평가?9번



 



 



【정답 및 해설】



?1.?해설?:?정답 ⑤



애국 계몽 운동은 사회진화론의 영향을 받아 교육과 산업의 발전을 강조했다.?애국 계몽 운동은 을사늑약 전후에 시작한 운동으로,?대표적 단체로 보안회,?헌정 연구회,?대한 자강회,?신민회 등이 있다.?국채 보상 운동 역시?1907년에 진행되었다.?



<오답 풀이>?



① 대종교 창시(1909)는 애국 계몽 운동과는 관련 없다.?



② 경부선 철도는 일본 주도로 러일 전쟁 중 건설되었다.



③ 대한매일신보 창간(1904)과 지문 내용은 관련 없다.



④ 한성 사범 학교는 교육 입국 조서(1895)?통해 설립되었다.



 



2.?해설?:?정답 ①



(가)?내용을 통해 의병 운동에 관한 내용임을 짐작할 수 있다. (나)?내용을 통해 애국 계몽 운동임을 추론할 수 있다.?



항일 의병 운동은 위정척사 사상을 계승하였기 때문에 근대적인 공화주의보다는 복벽주의인 존왕양이의 성격을 띠고 있다.?



 



3.?해설?:?정답 ①



(가)는 항일 의병 전쟁론, (나)는 애국 계몽 운동, (다)는 신민회의 독립 운동 기지 건설 활동이다. (가)와?(다)는 후에 무장 투쟁론으로, (나)는 실력 양성론으로 발전했다.?



① 의병 투쟁은 국권 피탈 직전,?대한 광복군 정부는 국권 피탈 직후에 활동했다.?



 



4.?해설?:?정답 ③



박은식은 “한국독립운동지혈사” 서문에 국가의 ‘국혼’을 강조했다.?③ 박은식은 ‘유교구신론’을 통해 유교의 폐단을 지적하고 개혁 방안을 제시했으며,?양명학의 영향을 받아 실천적인 유교를 강조했다.?



 



5.?해설?:?정답 ③



대규모 지진으로 인한 화재의 원인을 조선인의 책임으로 넘겨,?조선인들에 대한 대규모 학살(관동대학살)?사건이 발생한 곳은 일본이다.



③ 일본으로의 이주는?19세기 말 유학생들이 나간 것에서 시작되었다. 1900년부터는 노동 이민지 주를 이루었다. 1919년에는 동경 유학생들의 주도로?2.8독립 선언서가 발표되었다.



<오답 풀이>

?

① 대한 국민 의회를 수립한 곳은 연해주이다.



② 파리 강화 회의에 김규식을 파견한 단체는 상하이에 근거지를 두고 있던 신한 청년단이다.



④ 신흥 무관 학교는 남만주 삼원보에 설립되었다.



⑤ 장인환과 전명운이 대한제국의 전직 외교 고문이었던 스티븐스를 사살한 곳은 미국 샌프란시스코이다.?



 



6.?해설?:?정답 ⑤



제시문의 내용 통해 일본 관동 대지진 때 조선인이 피해 본 상황을 설명하고 있음을 알 수 있다.?



⑤ 일본 이주는 개항 직후엔 유학생이 주를 이루었고,?국권이 피탈된 이후에는 노동 이민이 많았다.?일본에 유학 중이던 학생들이 조선 청년 독립단을 조직하고?1919년?2월?8일 도쿄에서 독립 선언서를 발표했다.



 



7.?해설?:?정답 ③



③?(가)?내용 중에 ‘나라는 형체이고 역사는 정신이다’,?‘통사’라는 표현을 통해서?(가)는 민족주의 역사학의 박은식임을 알 수 있다. (나)는 ‘역사적 발전 법칙’,?‘세계사적 보편성’ 등을 통해 사회경제사학의 백남운임을 추론할 수 있다.



 



8.?해설?:?정답 ②



제시문 내용을 통해 박은식의 민족주의 역사학과 관련된 문제임을 알 수 있다.?



② 박은식은 신채호와 더불어 민족주의 역사학을 주도했으며,?“한국통사”,?“독립운동지혈사” 등을 저술했다.



 



9.?해설:?정답 ②



‘국혼’이라는 표현은 박은식이 “한국통사” 서문에서 민족 의식의 중요성을 강조하며 언급한 것이다.?박은식은 일제의 식민 사관에 맞서 민족 정신을 강조했고,?민족의 자주성을 중시했다.?이러한 역사관을 바탕으로 하여 “한국통사”,?“한국독립운동지혈사” 등을 저술했다.?



 



10.?해설?:?정답 ③



장지연,?신채호,?박은식 등의 계몽 사학자들이 우리 역사상 외국의 침략에 대항하여 승리한 영웅의 전기를 쓰고,?외국의 건국 영웅이나 외국의 망국사 등을 번역하고 소개한 시기는 대략?1905년 을사늑약 이후?1910년 한일 병합 이전의 시기이다.



ㄴ.?근대 계몽 사학이 활발하게 전개된 시기인?1905년 이후는 민족의 힘을 키우자는 애국 계몽이 활발하게 전개되던 시기이다.?개화 운동과 독립협회 운동의 전통 계승ㅇ한 진보적 지식인과 시민들은 자주 독립을 위해 실력을 기르는 일을 중시하였고,?이에 애국 계몽 운동을 전개하였다.



ㄷ.?이 시기 미국 독립사나 월남 망국사 등과 같은 외국 흥망사 관련 서적이 소개되었다.?신채호와 박은식 등에 의해 시작된 근대 사학은 왕 중심의 유교적 역사 인식을 극복하고 일반 민중들을 대상으로 하는 계몽적 성격이 지니고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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