본문 바로가기

공부라는 블랙홀

중앙선데이 2015.11.01 00:48 451호 22면 지면보기

일러스트 강일구



추석 전 개봉한 영화 ‘사도’가 이례적으로 장기 상영 중이다. 영조와 사도세자의 갈등은 새로울 것 없는 내용인데도 말이다. 교육열 강한 부모가 아이를 데리고 영화를 보러 가는 것이 흥행의 요소라는 얘기가 있다. 영조가 놀러만 다니는 세자에게 "이렇게 좋은 환경에서 너는 왜 공부를 안 하니!"라고 혼내는 것에 감정이입한 부모들이 ‘아버지의 뜻을 거스르고 공부를 게을리 한 나머지 결국 뒤주에 갇혀 죽었다’는 교훈을 주기 위해서라고 한다.


하지현의 마음과 세상

이런 일은 처음이 아니다. 올해 개봉한 ‘위플래쉬’는 재즈 드러머를 꿈꾸는 음악학교 신입생 앤드류와 최고의 실력자이자 폭군인 플레쳐 교수의 이야기다. 플레쳐 교수는 앤드류를 끝까지 몰아붙인다. 영혼이 부서져도 된다고 여긴다. 교수에겐 1000명의 평범한 수재보다 별이 될 단 한 명의 제자가 필요했다. 플레쳐 교수의 계략에 빠져 망신당할 위기였던 앤드류는 잠재성을 꽃피우며 최고의 연주를 해낸다. 한계를 넘어선 것이다. 많은 부모들이 “역시 무서운 선생님이 최고야, 애들은 다그쳐야 정신을 차려”라고 영화를 해석한 덕에 인디영화로는 상당히 흥행을 했다는 얘기를 들었다.



영화 뿐 아니라 뉴스·사건을 공부와 연관시켜 해석하는 부모들의 능력은 대단하다. 한 조각의 빛마저도 빨아들여버리는 블랙홀과 같다. 자기가 보는 모든 것을 공부와 연관시키려 노력한다.



KTX를 타러 서울역에 가는 길이었다. 아이와 함께 가던 여성이 길가의 노숙자를 보고 "너 공부 안하면 저렇게 되니까 열심히 해야 돼"라고 말하는 것을 들었다. 빈부격차 등 사회 문제와 사회안전망까지는 아니더라도 공감과 연민의 마음은 이야기해줘야 하지 않나 싶었는데, 역시나 결론은 공부였다.



교육청이 시작한 혁신학교가 초등교육 과정에서는 성공적으로 운영 중이라고 한다. 그런데 혁신학교 주변의 부동산이 함께 움직이고 있다. 내 아이를 좋은 환경에서 가르치고 싶다는 부모의 기민한 움직임 덕분이다.



우리 사회에서 공부는 모든 문제를 빨아들이는 블랙홀이 되고 있다. 공부를 위해 에너지의 90% 이상을 쏟아 붓고, 생각의 틀이 공부를 중심으로 획일화된 상태다. 아이를 대학에 보낸 다음에도 그 생각의 틀은 유지된다. 무엇이든 학원에서 배우고, 설명회에 참석하고, 시험으로 평가하기를 원한다. 공부가 삶의 틀까지 정해버린 것이다. 책으로 배울 수 없고, 몸으로 부딪혀야 익힐 수 있는 것도 학원 선생이 족집게로 집어주기를 원한다. 부모는 자식 결혼 잘 시키는 법에 대해 결혼정보업체의 강의를 듣는다. 틀이 정해지니 대안이라고 찾는 것이 고작 더 좋은 학원을 찾는 것이다. 완전히 다른 틀에서 생각할 엄두를 내지 못한다. 공부의 블랙홀에 빠진 부모들이 공부에 중독된 아이를 만들어, 사회에 내보냈다. 이들은 공부에 특화된 존재일 뿐, 사회성·공감능력·유연성 같은 요소는 결핍되어 있다. 공부로 승부할 수 있는 나이는 20대 중반까지다. 그 후에는 다른 요소들이 더 중요할 수 있다. 그러나 이 요소들이 모자라다 느낄 때 공부를 하면 된다며 책과 학원만을 찾으니 기가 찰 노릇이다. 이런 악순환에 빠져있는 것이 지금 우리 사회다. 공부라는 블랙홀이 학교를 넘어서 사회와 인생을 빨아들이고 있다.



 



하지현



건국대 정신건강의학과 교수jhnha@naver.com



 

선데이 배너

공유하기
광고 닫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