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떠나고 싶은 여자 머물고 싶은 남자

중앙선데이 2015.11.01 00:30 451호 22면 지면보기

일러스트 김옥



“어떤 걸 가지고 있는지 알고, 무엇이 필요한지 알고, 무엇이 불필요한지 아는 것, 그것이 재고 관리다!”


백영옥의 심야극장 -13- 레볼루셔너리 로드

영화 ‘레볼루셔너리 로드’의 주인공 프랭크가 한밤중 회사에 앉아 이 말을 중얼거릴 때, 그는 의미 없던 자신의 일을 정리하고(아버지가 일하던 ‘녹스’사에서 컴퓨터를 팔아치우는 세일즈) 아내와 두 아이와 함께 파리로 가서 새로운 삶을 살 생각이었다. 그것은 어느 날 문득 아내가 던진 제안이었다. 새로운 곳에서 책도 읽고, 아이들과 산책도 하면서, 지금의 무미건조한 생활과는 다르게 살아보자는 계획 말이다.



배우를 꿈꾸던 에이프릴과 건장한 세일즈맨 프랭크의 첫 만남은 극적이었다. 서로에게 매혹을 느꼈고 사랑에 빠졌다. 첫 아이를 임신한 후 시내를 떠나 뉴욕 외곽의 레볼루셔너리 로드로 왔다. 1950년대는 2차 세계대전 이후라 모든 것이 급변하는 시대였고, 도심에 살던 중산층이 교외로 이동하던 시기였다. 하얀색 2층집, 넓은 잔디밭과 이야기를 나눌 다정한 이웃, 그곳은 아메리칸 드림의 전형 같은 장소였다. 이들 부부는 이런 아름다운 장소에 ‘딱’ 어울리는 아름다운 부부였다. 적어도 표면적으로는.



현대인들에겐 햄릿의 ‘죽느냐! 사느냐!’만큼이나 지겨운 질문이 된 ‘현실이냐! 이상이냐!’를 두고 이들 부부는 꿈을 택했다. 적어도 에이프릴은 자신의 욕망대로 살고자 했고, 그래서 남편에게 파리행을 제안한 것이다. 그녀는 ‘현실과 이상’의 문제가 아니라 그것을 ‘용기 있음’과 ‘용기 없음’의 문제로 생각했다. 대책 없이 무작정 파리로 이민 가겠다고 말하는 이들 부부를 걱정스레 바라보는 이웃들의 시선에서, 그녀가 가장 먼저 본 것은 ‘시기’와 ‘질투심’이었기 때문이다.



아내를 괴롭히는 건 지긋지긋한 현실균열이 생긴 건 남편 프랭크 때문이었다. 아내의 제안을 흔쾌히 받아들였던 그였다. 하지만 떠나겠다고 결심했고, 이미 떠나겠다고 선포한 마당에 마음 놓고 써댄 ‘보고서’가 높은 평가를 받게 되면서, 회사로부터 승진을 제안받게 된 것이다. 회사 측 제안은 매력적이었다. 게다가 에이프릴은 덜컥, 계획에 없던 아이까지 임신했다. 프랭크로선 파리행을 취소시킬 수 있는 좋은 구실이 생긴 것이다.



“우리가 교외로 이사 온 건 어쩌다 첫 애를 임신해서였어. 첫 아이가 실수라는 게 싫어서, 둘째를 낳았어! 언제까지 이런 식으로 살 거야? 프랭크, 정말로 아이를 원하긴 해? ……예전엔 서로에게 진실되게 살았잖아. 진실의 좋은 점이 뭔지 알아? 아무리 오래 거짓되게 살았어도 진실은 잊혀지지 않는다는 거야. 진실은 잊혀지지 않는다고! 사람들은 그저 거짓말을 좀 더 잘하게 되는 것뿐이야! 그러니 말해봐. 이 아이를 원해?”



이때부터 이들 부부의 오랜 갈등이 점점 수면 위로 부상하기 시작한다.



“정상적인 사람, 정상적인 엄마는 자기가 원하는 삶을 살겠다고 이딴 낙태기구 같은 건 사지 않아! 그딴 환상에 젖어 들어서 말이야! 지금 당신은 전혀 이성적이지를 못해. 당신을 바로 잡아줄 사람을 찾아 봐야겠어…. 에이프릴! 정신과에 가려면 돈이 필요해!”



영화는 ‘떠나려는 아내’와 ‘머무르려는 남편’의 갈등을 날카롭게 도려낸다. 아내의 논리는 ‘이곳’이 아닌 ‘저곳’이라야 새로 시작할 수 있다는 것이고, 남편의 논리는 ‘이곳’이 아닌 ‘저곳’ 역시 삶은 똑같다는 것이다. 그는 지금의 ‘안정된 삶’을 포기하기 위해 치러야 하는 대가에 대해 고집스레 설명한다. 하지만 지긋지긋한 현실 속에서 점점 자신을 잃어가던 아내는 남편에게 외친다. “제발! 혼자 내버려둬! 난 생각을 해야 된다고! 생각을!”



내가 더 나다워진다는 것에이프릴은 내게 영화 ‘디 아워스’의 주인공 로라를 연상시켰다. 전형적인 중산층이었던 로라는 만삭의 몸을 풀고 어린 아들을 놔둔 채 어디론가 사라진다. 소설 『불멸』의 주인공 아녜스 역시 어느 날 가족들에게서 자신의 존재를 지우기로 결심한다. 그들의 표면적 삶은 대체로 평화로워 보인다. 하지만 이들은 ‘죽지 않기 위해서’ 정확히 말해 ‘살기 위해서’ 자살 대신 떠남을 선택한다.



로라의 남겨진 아이는 훗날 위대한 시인이 된다. 그러나 어릴 적 받았던 상처는 고스란히 그의 영혼을 짓누르고 자살로 스스로의 삶을 마감하게 한다. 집에서 떠난 지 40여 년의 세월이 지난 후, 아들의 장례식 앞에 돌아와 독백하던 로라의 대사를 나는 분명히 기억한다.



“후회한다고 말한다면 마음은 편하겠지만, 그렇지 않아요. 그건 선택이 아니라 숙명이었으니까. 다 부질없는 짓이죠. 누구도 용서할 수 없는 일을 했어요. 하지만 난, 죽음 같은 현실보다 삶을 선택했을 뿐.”



죽음 같은 현실보다 삶을 택했다는 로라의 말은 정확히 에이프릴의 내면 풍경을 비춰준다. ‘레볼루셔너리 로드’의 에이프릴이 선택하는 ‘낙태’와 ‘죽음’은 무엇을 의미하는 걸까. 누구에게도 이해받지 못할 욕망. 그것은 바로 ‘내’가 더 ‘나다워지는 것’인지도 모른다. 이때의 ‘나’는 너는 물론이고 ‘나’ 조차도 모를 ‘나’이기 때문에 사람을 궁지에 몰아넣는다.



환부에 남아 있는 상처가 선명할수록 사람들은 그를 이해하기 위해 노력한다. 말기 암환자는 위로 받는다. 루게릭 병에 걸린 사람도, 교통사고로 몸이 다친 사람들도 누군가로부터 도움을 받는다. 하지만 이해 못할 충동에 시달리는 사람은? 가령 우울증이나 조울증 환자들이 그렇다. 마음의 병은 우리를 기어이 죽음에 이르게 하지만, 그것은 타인으로부터 쉽게 이해받지 못할 충동으로 사람을 끝까지 괴롭힌다.



“어느 날 아침. 눈을 뜨고 귀를 기울여보니 어디선가 멀리서 북소리가 들려왔다. 아득히 먼 곳에서, 아득히 먼 시간 속에서 그 북소리는 울려왔다. 아주 가냘프게, 그리고 그 소리를 듣고 있는 동안, 나는 왠지 긴 여행을 떠나야만 할 것 같은 생각이 들었다.”



하루키의 책 『먼 북소리』를 읽었을 때, 나는 멀리서 들려오는 이 선명한 북소리가 삶에 지친 어느 날, 내게도 들릴 수 있다는 걸 알아챘다. 그것이 어떤 충동에 의해 실현될지는 나도 몰랐다. 하지만 그런 시간이 온다면 분명 그때는 ‘내’가 더 이상 ‘나’로 작동하지 않는 시간일 것이다.



‘레볼루셔너리 로드’의 감독은 ‘아메리칸 뷰티’를 연출했던 샘 멘더스. 이 영화의 여주인공 케이트 윈슬렛은 자신의 남편이기도 한 샘 멘더스에게 이 영화의 감독을 제안했다. 그는 아내의 믿음대로 누구보다도 훌륭하게 영화를 연출했다. 디카프리오의 연기도 훌륭했지만 이 영화는 단연코 케이트 윈슬렛의 영화다. 불안에 짓눌린 눈빛과 히스테릭한 말투, 마음속에서 울려 퍼지는 ‘북소리’를 듣지 않기 위해 몸부림치면서 그녀가 우리 모두에게 던지는 질문은 그토록 가슴 찢어지는 것이었다.



가장 흥미로운 건 영화가 끝난 이후의 이야기다. 샘 맨더스와 케이트 윈슬렛은 이 영화를 찍은 얼마 후, 이혼했다. 삶이 우리를 어디로 데려갈지는 누구도 알 수 없는 것이다. ●



 



 



백영옥 ?광고쟁이, 서점직원, 기자를 거쳐 지금은 작가. 소설『스타일』『다이어트의 여왕』『아주 보통의 연애』 , 인터뷰집 『다른 남자』 ,산문집『마놀로 블라닉 신고 산책하기』등을 썼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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