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구웨이쥔, 베이징 접수한 장제스 피해 국외 탈출

중앙선데이 2015.11.01 00:21 451호 29면 지면보기

어떤 정권이 들어서건 외교는 구웨이쥔(왼쪽 다섯 번째)의 몫이었다. 구웨이쥔의 생일 잔치에 초청받은 쑹쯔원 형제들. 1946년 뉴욕. [사진 김명호]

상하이 시절의 황후이란. [사진 김명호]



황후이란(黃蕙蘭·황혜란)은 톄스쯔골목(鐵獅子胡同)의 저택에서 연일 파티를 열었다. 해만 지면, 베이징에 주재하는 각국의 외교관들이 몰려들었다. 정부는 구웨이쥔(顧維鈞·고유균)의 외교력을 무시하지 못했다. 다시 외교총장(장관)에 기용했다. 사직 9개월 만이었다.


사진과 함께하는 김명호의 중국 근현대 -450-

정국은 한 치 앞을 예측하기 힘들었다. 소련과 손잡은 남방의 혁명세력은 군사력을 배양하기 위해 군관학교를 설립하고, 북방의 군벌들은 수도 베이징을 넘봤다. 구웨이쥔의 집에도 폭탄이 터졌다.



1924년 10월, 베이징에 군사정변이 일어났다. 구웨이쥔은 톈진(天津)으로 몸을 피했다. 정변의 주역들은 쑨원(孫文·손문)을 베이징으로 초빙했다. 쑨원은 황후이란의 저택에서 세상을 떠났다.



구웨이쥔에게 톈진은 추억의 도시였다. 틈만 나면 전처 탕바오밍(唐寶明·당보명)과 거닐던 길을 산책하고, 함께 다니던 찻집 구석에 멍하니 앉아 시간을 보냈다. 고향이 군벌들의 전쟁터로 변하자 안절부절, 어쩔 줄을 몰랐다. 직접 내려가 탕바오밍의 시신을 구씨 종사(宗祠)에 안치하자 마음이 놓였다.



황후이란은 뭐가 뭔지, 정신이 하나도 없었다. 구웨이쥔에게 대놓고 투정했다. “중국이 이런 나라인 줄 몰랐다. 조용한 날이 단 하루도 없다. 무서워서 못 살겠다. 어떻게 된 사람들이, 얼굴에 표정이 없다. 머릿속에 뭐가 들어 있는지, 무슨 생각을 하는지 모르겠다. 세상에 특출난 사람은 없다. 남들이 그렇게 볼 뿐이다. 나도 평범한 사람이다. 어쩌다 보니 대부호의 딸로 태어났지만, 아버지의 부를 계승한다는 생각은 해본 적이 없다. 나를 그냥 한 명의 여자로 대해주기 바란다.”



하기 힘든 말도 했다. “우리는 공식적인 장소 외에 함께 외출한 적이 없다. 탕바오밍은 현명했던 여자라고 들었다. 나는 부모에게 많이 의지하는 편이다. 내게서 우리 부모의 흔적을 지워버려라. 아버지는 나를 너무 총애했다. 내가 커서 귀부인이 되기를 갈망했지만 후처가 되기는 바라지 않았다. 금전이 모든 것을 지배한다는 생각은 착각이다. 남녀간의 감정도 마찬가지다. 아버지를 실망시키고 싶지 않다. 나의 사치와 방종을 모른 체 해라. 나도 간섭하지 않겠다.”



구웨이쥔은 전쟁으로 폐허가 된 고향의 복구에 나섰다. 황후이란도 기부금을 쾌척했다. 그해 겨울 황중한(黃仲涵·황중함)이 싱가폴에서 세상을 떠났다. 딸 후이란에게 거액의 유산을 남겼다. 황후이란은 베이징에 인접한 톈진이 싫었다. 구웨이쥔이 상하이로 가겠다고 하자 짐을 꾸렸다. 상하이는 별천지였다.



두 사람 모두 이성(異性)들에게 인기가 있었다. 구웨이쥔은 유부녀를 좋아했다. 황후이란은 연하의 청년들과 자주 어울렸다. 검증할 방법이 없는 소문들이 나돌았다. “장쉐량(張學良·장학량)과는 한번 만나면 다섯 끼를 같이 먹는 사이다. 황후이란은 장쉐량을 홀려낸 쑹메이링(宋美齡·송미령)을 싫어했다. 쑹메이링의 언니 칭링(慶齡·경령)과는 가까웠다. 쑹칭링은 황후이란의 도움을 많이 받았다. 옷도 입으라는 것만 입었다.”



상하이 상류사회 여인들은 황후이란을 따라 하느라 분주했다. 황후이란이 안고 다니는 애완견 가격이 폭등하고, 금붕어를 키우기 시작하면 백화점은 프랑스에 신상품을 주문했다. 황후이란은 구웨이쥔과 탕바오밍 사이에 태어난 자녀들도 친자식처럼 돌봤다. 구웨이쥔이 내각총리에 임명된 후에도 상하이를 떠나지 않았다.



1927년 1월, 광저우(廣州)의 혁명정부가 우한(武漢)으로 천도했다. 혁명의 중심지로 변한 우한은 반(反) 영국 정서가 강했다. 반영(反英)운동이 발발하자 구웨이쥔은 정치력을 발휘했다. 영국조계(租界)를 회수하고 중국의 세무를 총괄하던 영국인을 파면했다. 1865년 벨기에와 맺은 불평등 조약도 일방적으로 폐기를 선언했다. 혁명세력은 외교관 출신 총리에게 갈채를 보냈다.



중국 최대의 공업도시에 혁명의 회오리가 몰아쳤지만, 다 그런 것은 아니었다. 무명의 호남청년 마오쩌둥(毛澤東·모택동)은 정반대의 길을 향했다. 혈혈단신, 터덜터덜 농촌 조사를 떠났다. 상황이 상황이다 보니 동북에서 정국을 주시하던 장쭤린(張作霖·장작림)은 병력을 남쪽으로 이동시켰다. 2개월 후인 1927년 6월, 베이징에 입성해 새 정권을 출범시켰다. 구웨이쥔에게는 총리직 유임을 요청했다. 이 현명한 외교관은 장쭤린 정권의 수명이 오래갈 거라고 보지 않았다. 베이징 교외에 칩거하며 자문에만 응했다. 수확도 있었다. 장쉐량과 돈독한 관계를 맺고, 쑹쯔원(宋子文·송자문) 형제와는 한 집안처럼 지냈다.



장쭤린은 베이징에서 1년도 버티지 못했다. 1928년 6월, 장제스(蔣介石·장개석)가 지휘하는 국민혁명군이 베이징에 입성했다. 베이징 정부의 요직을 거친 구웨이쥔에게 체포령을 내렸다. 베이징을 탈출한 구웨이쥔은 중국을 떠났다. 황후이란은 톈진에서 연락을 기다렸다. 제네바에 안착했다는 연락을 받자 바쁘게 움직였다.



구웨이쥔 부부는 파리에서 합류했다. 보고를 받은 장제스는 톄스쯔골목의 집을 몰수해 버렸다. ‘쑨원기념관’으로 이보다 적합한 장소가 없었다. <계속>



 



김명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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