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삶에 찌든 까칠한 여배우, 사랑에 물들다

중앙일보 2015.10.28 16:26
[커버스토리│‘미안해 사랑해 고마워’ 지진희&성유리] 성유리 삶에 찌든 까칠한 여배우, 사랑에 물들다
사랑이 머무는 풍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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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미안해 사랑해 고마워’(10월 29일 개봉, 전윤수 감독)에는 인생의 여러 풍경이 펼쳐진다. 딸과 멀어진 아버지의 안타까움, 자신을 흠모해 온 남자의 짝사랑을 뒤늦게 알게 된 여자의 미련 그리고 오래전 오해로 뒤얽힌 관계를 풀기 위한 두 남자의 애틋함이 녹아 있다. 극 중 다른 에피소드에 출연해 서로 관계 없지만, 묵직한 감정을 선보인 두 배우를 만났다. 서른 살 늦깎이 배우로 시작해, 이제는 중국 등 해외 무대까지 보폭을 넓히고 있는 지진희와 무대를 빛낸 깜찍한 요정에서 어엿한 배우로 거듭나고 있는 성유리가 그 주인공이다.


걸그룹 ‘핑클’ 시절부터 청순한 이미지로 사랑 받아 온 배우 성유리(34)는 ‘미안해 사랑해 고마워’에서 눈에 띄게 변신한다. 까칠하고 도도한 스타 배우 서정 역을 맡아, 거침없는 돌직구를 날린다. 10년간 한솥밥을 먹어 온 매니저 태영(김성균)도 예외는 아니다. 막장 드라마의 단골 배우답게 외모 또한 화려하고 섹시하다. 까칠한 성격 이면에 순수하고 여린 내면을 지닌 서정은, 어느 날 자신을 향한 태영의 감정이 사랑이라는 걸 깨닫는다. ‘차형사’(2012, 신태라 감독) ‘누나’(2012, 이원식 감독) 이후 3년 만에 영화에 출연한 성유리는 “10년 넘게 연기했지만, 본격적인 멜로 연기는 이번이 처음”이라고 했다. 


-이 영화를 선택한 이유는. “어릴 땐 어두운 영화를 좋아했는데, 나이 들면서 마음이 따뜻해지는 힐링 영화에 마음이 끌리더라. 자신 때문에 동생이 죽었다는 죄의식에 빠져 사는 여인을 연기했던 ‘누나’를 찍으며 정서적으로 피폐해졌기에, 따뜻한 영화에 대한 갈망이 더욱 커진 것 같다.”

-멜로 연기가 처음이라는 게 의외다. “사랑이 주제인 작품은 이번이 처음이다. 시나리오에 태영이 매니저 같지 않은 미남형 얼굴이라 적혀 있어, 누구와 멜로 연기를 하게 될까 혼자 상상의 나래를 폈다. 상대 역으로 (김)성균 선배가 정해졌다는 소식을 듣고, 꽤 놀랐다(웃음).”

-김성균도 본격적인 멜로 연기는 이번이 처음인데. “맞다. 그래서 처음엔 걱정했는데, 촬영 첫날부터 성균 선배의 매력을 느꼈다. 선배가 무서운 역을 많이 해서 눈이 매서울 거라 생각했는데, 실제 보니 송아지 눈이었다. 감수성이 예민하고, 모성 본능을 자극하는 면이 있다. 서정이 매니저 태영을 구박하는 신에서 선배의 눈을 보면 화를 못 낼 것 같아, 눈을 거의 마주치지 않고 연기했다. 불꽃 같은 사랑이 아닌, 서서히 마음이 가는 사랑의 파트너로선 최적이었다.”

-서정이 매력적이라 느낀 이유는. “서정은 연기력은 출중한데 작품은 항상 성에 차지 않는다. 거기서 오는 짜증과 욕구 불만이 까칠함으로 표출된다. 게다가 혼자 가족의 생계를 책임지고, 회사의 유일한 배우여서 회사도 먹여 살린다. 서정이 왜 항상 화가 나 있고 짜증을 내는지 공감이 갔다. 그런 삶에 찌든 정서가 좋았다.”

-서정은 까칠하지만, 자기 주장이 강하다. “원래 표현을 잘 못하고 돌려 말하는 성격이어서 그런지, 자기 주장이 강하고 직설적인 캐릭터를 좋아한다. 일종의 대리 만족이다. 억누르지 않고, 모든 걸 표출하는 서정을 연기하며 속 시원했다.”

-극 중 드라마 제작의 역학 관계, 쪽대본 촬영, 매니저와의 갈등 등은 낯익은 풍경 아닌가. “무소불위의 권력을 휘두르는 드라마 작가를 보며, 혹시 그분 이야기가 아닌가 하는 생각이 들었다(웃음). 서정처럼 매니저에게 휴대폰을 내던지는 정도는 아니지만, 나도 매니저에게 화내고 짜증낼 때가 많다. 서정이 지하철에서 자신을 헐뜯는 여고생들의 대화를 듣게 되는 장면에선, 핑클 시절 또래 여고생들에 둘러싸여 폭언을 들었던 경험이 떠오르기도 했다.”

-태영은 서정에게 매니저 이상의 관계다. “태영은 오디션에서 여고생 서정을 처음 만나, 그때부터 매니저이자 보호자 역할을 했다. 서정에겐 키다리 아저씨 같은 존재다. 서정도 자신에 대한 태영의 감정을 모르진 않았을 거다. 태영이 자신에게 고백하지 않기를 바랐겠지. 그런 서정의 감정을 어느 선까지 표현해야 할지 고민을 많이 했다.”

-서정을 연기하며, 태영에 설레는 감정이 생긴 건 언제부터인가. “극 중 드라마의 결혼식 장면을 찍는데, 남자 배우가 늦게 와 태영이 대신 리허설을 한다. 태영이 ‘사랑해’란 대사를 하는데, 성균 선배가 갑자기 눈물을 흘렸다. 대본에 그런 지문은 없었다. 그때 태영의 진심이 느껴졌고, 설레는 감정을 갖게 됐다.”

-감독이 ‘성유리의 재발견’이라 한 건 어떤 의미일까. “난 섹시함과 어울리지 않는다고 생각해 왔는데 감독은 내 안에 분명히 섹시함이 있으며, 그걸 꼭 꺼내 보이고 싶다고 했다. 화려한 의상과 화장이 처음엔 어색했는데 나중에 보니까 나쁘지 않았다(웃음). 그간 억누르고 보여주기 꺼렸던 면모를 끄집어내 준 감독에게 감사하다. 안 예쁘고 망가진 성유리를 보여주려 했던 감독은 많았지만, 나의 여성성을 강조해 준 감독을 만난 건 처음이다.”

-섹시함을 표출하는 걸 왜 주저해 왔나. “핑클에서 청순함을 담당한 멤버로서, 섹시한 성유리는 대중이 원하지 않는다고 여겼다. 착하고 청순한 이미지에 옭아 매여 있었다고 할까.”

-살면서 의미 있는 고백을 한 적이 있나. “표현을 잘 하지 않는 성격이어서, 상대의 눈을 보며 마음을 털어놓진 못한다. SNS(소셜 네트워크 서비스)처럼 얼굴을 보지 않고도 고백할 수 있는 수단이 생겨서 정말 다행이다. SNS에 만든 부모님과의 단체방에선 하트도 날리고 살갑게 구는데, 실생활에선 무뚝뚝한 딸이다.”

-이젠 연기가 나의 길이라고 느껴지나. “연기할 때마다 어렵고 갈등을 겪지만, 멋진 영화를 보면 피가 끓는다. 얼마 전 ‘이민자’(9월 3일 개봉, 제임스 그레이 감독)에서 마리옹 코티아르의 연기를 보면서, 죽기 전에 나도 저런 연기를 해 보고 싶다고 생각했다. 그럴 때 내가 연기에서 벗어나지 못하겠다는 느낌을 받는다. 감독이 이번 영화 촬영에 들어가며 ‘이 영화에 참여한 모든 분들이 조금 더 나은 삶을 살게 될 거예요’라고 말했는데, 난 그 말을 내 연기의 폭이 더욱 넓어질 거라는 희망으로 받아들였다.”


글=정현목 기자 gojhm@joongang.co.kr, 사진=전소윤(STUDIO 70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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