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너무 인간적이라 불편한 히믈러의 초상

중앙일보 2015.10.28 10:02
[홍석재의 심야 덕질] 너무 인간적이라 불편한 히믈러의 초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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다큐멘터리 '숭고한 나치'

올해 열린 제7회 DMZ국제다큐영화제에서 볼 작품을 고를 요량으로 카탈로그를 뒤적이던 나는 ‘숭고한 나치’(2014, 바네사 라파 감독)라는 제목에 꽂혔다. 시놉시스를 읽어보니 새롭게 발견된 하인리히 히믈러(1900~45)에 대한 사진과 일기 그리고 편지 등 자료를 모아 만든 다큐멘터리였다. 히믈러는 제2차 세계대전 당시, ‘최종 해결책’이란 이름으로 자행된 홀로코스트의 집행자로 악명 높다. 독일 최초의 유대인 수용소인 다하우 수용소를 비롯, 아우슈비츠 등의 수용소들을 모두 관리·감독하고, 가스를 이용해 유대인을 대량 학살하는 세부 계획을 세우고 실행한 인물이 바로 히믈러다. 90분 분량의 다큐는 놀랍도록 재미있고 내용이 풍부했다. 배우들이 히믈러와 그 주변 인물들이 주고받은 편지와 일기를 보이스 오버(Voice Over·배우나 해설자들이 화면에 보이지 않는 상태로 목소리만 들리는 것)로 읽는 가운데, 당시 상황이 찍힌 아카이브 영상을 보여주는 방식만으로 진행된다. 이런 영상 자료가 있었단 사실에 놀랄 정도로 풍부한 이야기를 접할 수 있었다. 제1차 세계대전 패전 이후, 독일의 시대상과 당시 사람들의 풍속을 코앞에서 보는 기분이었다. 자료를 찾고 모으는 데 7년이 걸렸다니, 감독의 엄청난 수고를 짐작해 볼 뿐이다.

다큐 속에선 히믈러의 온갖 사생활이 다 들춰진다. 10대 시절 ‘중2병’ 돋는 이야기를 적어 놓은 일기와 20대 시절 아내와 주고받은, 밀어로 가득한 연애 편지도 있다. 아이를 낳은 뒤, 아내와의 사이에 오간 편지가 무미건조해진다 싶더니, 나중엔 내연녀와의 뜨거운 불륜 편지도 등장한다. 각 역할을 맡은 배우들이 대사를 주고받듯 읽어나가는 편지를 듣고 있으니, 왠지 19세기 서간체 소설을 보는 기분이 들었다. 그렇게 배우들의 목소리로 재연된 편지와 일기를 따라가다 보면, 지극히 보통이고 평범한 인간의 초상화를 짜맞추게 된다. 직장에서 성공하고 싶고, 가족에게 좋은 선물을 해주려 하고, 딸의 생일에 못 가서 미안해 하는 히믈러를 알게 된다. 이 부분이 우리를 묘한 혼란에 빠뜨린다. 600만 명의 대량 학살을 고안한 악마의 화신 역시, 나와 다를 것 없는 보통 인간이라는 사실을 직시하게 되는 것이다. 우리가 히믈러에게서 발견하는 건 일상적이고 사소해서 친근하기까지 한 감정과 욕망이다. 내가 그의 생각과 감정을 쉽게 따라갈 수 있고, 몇몇 순간에 공감하기까지 한다는 사실에 문득 불편해졌다. 그가 괴물이라서 그렇게 끔찍한 홀로코스트를 집행한 게 아니라, 인간이기 때문이라는 걸 깨닫게 된다.

다큐를 보면서 그 시대 사람들은 편지를 정말 열심히 썼다는 인상을 받았다. 지금 이 시대 사람들이 카카오톡에 중독되었듯, 그 시대 사람들에게는 전보 혹은 우편이 카카오톡의 역할을 한 것 같다. 히믈러의 편지만 봐도 대개 내용은 잡담이라 할 만하다. 그런 잡담에서 오히려 한 인간의 내면을 재구성할 힌트를 더 많이 얻게 된다. 문명의 발달로 잡담을 전달하는 매체가 편지에서 카카오톡으로 바뀌면서, 동시(同時)적이고 더없이 간편해졌지만 글의 밀도나 형식의 미(美)가 사라진 건 아닐까 하는 생각도 들었다. 히믈러의 편지는 하나 하나가 텍스트로 읽힐 여지가 있었는데 카카오톡은 어떨까?

이런 이야기를 하는 건 지금으로부터 50년 뒤, 이 시절을 다루는 다큐멘터리가 카카오톡 아카이브만으로 만들어질지도 몰라서다. 편지보다 더 파편적이고 무의미한 잡담 투성이인 카카오톡 데이터에서 충분한 의미를 찾아낼 수 있을까. 그런 방식으로 포착한 이 시대의 시대성은 무엇이고, 어떤 형태일까.

‘숭고한 나치’가 서늘했던 건 아카이브 이외에 어떤 외부의 코멘트도 가져오지 않은 방식으로 히믈러에 대한 초상을 그려냈다는 것이다. 감독이 궁금해 찾아보니 유대인이었다. 놀랍지 않을 수 없다. 어떻게 그토록 침착하고 냉정하게 그려낼 수 있었을까. 우리나라로 치면 친일파 이완용에 대한 다큐멘터리를 만들었는데, 어떤 코멘트도 덧붙이지 않은 채 그의 편지와 일기 등만 가지고 다큐를 만든 것이다. 우리나라에서 이것이 가능할까? 만약 그런 다큐가 만들어진다면 관객은 어떻게 받아들일까. 이렇게 적다 보니 몹시 궁금해진다. 매국노 이완용에게도 당연히 인간으로서의 삶이 있었을 것이다. 좋은 예술은 끔찍한 악인과 추악한 영웅에게서 인간의 흥미로운 면모를 발견해낸다. 누군가가 이완용에 대한 아카이브만 가지고 다큐를 만든다면, 나는 첫 번째 관객이 될 용의가 있다.


글=홍석재 영화감독. '소셜포비아'(2015) 연출. 타고나길 심심한 인생인지라 덕질로 한풀이 중.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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