본문 바로가기

[김진석의 걷다보면] 아스팔트 위에 핀 잡초들처럼

중앙일보 2015.10.27 00:01
제주올레 트레킹 4회
 
기사 이미지

2008년 6월 어느 날.
어른들이 하는 말씀 중에 ‘삭신이 쑤신다’는 말이 있다. 딱 내 몸이 그랬다. 정말 삭신이 쑤셨다. 몸 상태가 안 좋아지니 사람들의 작은 움직임과 소리조차 거슬렸다. 신경이 곤두섰다. 어서 시간이 지나고 포근한 내 침대에 누워 있기만을 바랐다.

‘내가 엄살일까? 아니야, 정말 몸이 힘든 거야.’

이런 식으로 나를 달래고 어르는데 내가 봐도 참 한심스러웠다.
 
기사 이미지
 
오늘은 올레길 11코스를 걷는다. 어제 걸었던 10코스와 비슷한 거리다. 초여름의 태양이 아침 공기도 삼켜 버린다.

일행의 모습이 어제와는 달리 조금 둔해 보인다. ‘저들도 좀 힘들구나’ 하며 작은 위안거리를 찾는다. 어제 끝났던 지점까지 최운국 사장이 바래다주었다. 그리고 어제와 마찬가지로 바람처럼 돌아갔다. 이틀째 보는 광경이지만 같이 돌아가고 싶은 마음이 간절하다.

 
기사 이미지
오늘은 일제 강점기 강제 노역으로 만든 알뜨르 비행장을 지나간다. 그리고 역사의 슬픔을 간직한 섯알오름 희생자비가 이어진다. 짧게는 반세기, 길게는 한 세기가 지났어도 그 엄숙한 분위기에 일행의 표정이 가라앉는다. 모두 조용히 걷는다. 제주의 아름다운 광경 뒤에 숨어 있는 역사와 상처는 우리에게 많은 이야기를 한다. 놀랍게도 길은 우리의 마음뿐 아니라 몸에도 그 이야기를 간직하게 해주었다.
 
뜨거운 열기를 뿜어대는 아스팔트에서 하얀 아지랑이가 올라온다. 그 틈새를 비집고 잡초가 자란다. 자연의 힘을 생각해본다. 우리의 삶도 생각해본다.


 
기사 이미지
제주도 서부를 한눈에 볼 수 있는 모슬봉에 올랐다. 비록 군사시설로 철조망이 처져 있지만 모슬봉에 올라 멀리 바라보니 바다 색깔이 참 곱다. 굽이굽이 난 길을 내가 바람처럼 걷고 있다! 원시시대 자연림이라고 할 수 있는 곶자왈로 들어선다. 습기가 강하지만 햇빛을 막아주는 나무가 고맙다. 곶자왈 한가운데서 잠시 걸음을 멈추고 앉아서 살갗에 닿는 바람을 느낀다.
 
이런 느낌과 감정, 처음이다.

길 위에 앉아 자연을 느낀다. 오랫동안 잊었던 감정이 핏줄을 타고 올라오는 느낌이다. 어떤 단어나 사진으로 이 느낌을 표현할 수 있을까?

그러고 보니 내 삶은 뒤돌아볼 겨를도 없이 지나가 버렸다. 무엇을 하며 살았고 무엇을 위해 살았는지 스스로에게 물어본다.

 
기사 이미지
길을 걷다 보니 자꾸 앞만 보게 된다. 화살표도 찾아야 하고 리본도 찾아야 한다. 그렇게 한참 걷다 보면 내가 걸어온 길이 희미하게 잊힌다.

천천히 뒤를 돌아본다. 내가 걸어온 길이 분명하지만 뒤돌아보는 풍경은 또 다르다. 걷는 것도 인생과 마찬가지라는 생각이 든다. 앞으로만 걷다 보면 걸어온 길이 얼마나 멋졌는지, 고통스러웠는지, 아름다웠는지 잊어버리게 된다.
 
길은 마늘밭 주변으로 길게 늘어져 있다. 할머니들이 커다란 모자를 쓰고 열심히 호미질이다. 무더운 날 땡볕 아래 일하는 할머니들을 뵈니 유유자적 한량처럼 길을 걸으면서 힘들다 투정하는 게 죄송스럽다. 외할머니의 모습이 언뜻 겹쳐진다.

 
기사 이미지
내 고향은 시골이다. 수박과 복분자로 유명한 고창이다. 어릴 때 서울로 올라왔지만 집안 형편이 어려워 방학 때면 시골로 내려가 외가에서 지내야 했다. 고등학생인 외삼촌 손을 잡고 한 살 터울 형과 내가 용산에서 출발하는 정읍행 야간 완행열차를 탔다. 돈이 없어 표는 한 장만 사고 검표원을 피해 서로 의자 밑으로 숨으면서 시골집으로 갔다.

기차는 새벽에 정읍에 도착했다. 우리는 첫 버스를 기다렸다. 고창 터미널에 도착하면 다시 버스를 타고 해리면 터미널까지 갔다. 그곳에서 외할머니댁까지 버스를 타거나 걸어서 갔다. 거의 24시간이 걸려 외할머니댁에 도착하면 시골집 좁다란 골목 어귀에서 외할머니가 환하게 웃는 얼굴로 파김치가 된 우리를 반겨주셨다.
 
일하는 할머니들을 뒤로하고 길을 계속 걷는다. 잠깐 멈춰 서서 할머니들에게 ‘고맙습니다’라고 말이라도 건네지 않은 게 자꾸 마음에 걸린다.
 
기사 이미지

끝나지 않을 것 같았는데 저 멀리 이 길의 끝자락이 보인다. 오늘도 무사히 끝냈다는 안도감과 함께 모락모락 고민이 피어난다. 책을 내는 건 둘째 치고라도 체력의 한계를 느끼고 있다. 무엇보다 안타까운 것은 사진 찍는 것조차 힘들어지는 거다. 걸으면서 사진을 찍는 것이 생각처럼 쉬운 일이 아니라는 것을 깨닫는다. 사진을 못 찍으면 내가 지금 이 길을 걷는 의미가 없지 않은가. 며칠 쉬고 서울로 올라갈까? 아니면 계획대로 계속 걸을 건가?





 
공유하기
광고 닫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