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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선은행-중국연합은행 통화스왑으로 전비 조달한 일본

중앙선데이 2015.10.25 01:54 450호 22면 지면보기

IMF 설립 후 최초로 발생한 달러화 위기 문제를 논의하기 위해 경제계 원로들을 만나는 케네디 대통령(오른쪽에서 네번째, 1962년 6월 11일). 이 자리에서 루사(Roosa) 재무부 차관보(오른쪽 끝)가 외환보유액 확충을 위해 금융시장에서 외화표시 국채를 발행하는 계획을 설명하자, 뉴욕 연준 총재 출신의 스프라울(Sproul, 케네디 오른쪽)은 시장을 통해서는 해결하기 힘든 상황이라고 충고했다. 결국 국채발행 실패 후 연준이 주도한 중앙은행 간 통화스왑을 통해 위기를 탈출했다.



중앙은행이 공급하는 화폐가 실물경제로 잘 흘러가야 한다는 데 대해 반대할 사람은 없다. 그래서 한때는 국채를 포함한 일체의 유가증권이나 융통어음의 매입(공개시장조작)까지 금기시되었다. 화폐공급과 실물경제가 강력하게 연결되려면, 생산과 유통과정에서 발행된 어음만 중앙은행이 할인해야 한다고 믿었기 때문이다. 이를 진성어음주의(real bills doctrine)라고 한다.


[중앙은행 오디세이] -20- 중일전쟁에 동원된 중앙은행

진성어음주의는 대공황을 계기로 퇴조하다가 21세기 들어 완전히 무너졌다. 글로벌 금융위기 때 각광받은 ‘중앙은행 간 통화스왑(currency swap)’이 한 예다. 중앙은행들끼리 각자의 화폐를 약속된 환율로 교환하는 통화스왑은, 실물경제와 상관없이 화폐를 공급하는 장치다. 그 과정은 이렇다.



중앙은행끼리 통화스왑계약을 체결하면, 일단 서로에게 예금한 것으로 기록한다. 그래서 외화자산과 국내부채가 동시에 늘어난다. 2008년 10월 체결된 한미 통화스왑계약을 통해 미국 연방준비제도( Fed) 앞 한국은행의 외화예금(외화자산)이 늘어난 만큼 한국은행 앞 Fed의 원화예금(국내부채)도 늘어났다. Fed는 원화예금을 인출하지 않았으나, 한국은행은 외화예금을 인출하여 국내 금융기관 지원에 활용했다. 이 결과 Fed는 미국의 실물경제 동향과 무관하게 달러화 발행이 늘어나는 것을 경험했다.



조선은행-만주은행간 세계 최초 통화스왑당시 한국은 수혜국이었고, 미국은 지원국이었다. 1962년 달러화 위기 때는 미국이 수혜국이었다. 당시 40대에 불과했던 케네디 대통령의 취임과 쿠바 미사일 위기 등으로 달러화 가치에 대한 의문이 커지면서 금 태환 요구가 급증했다. Fed가 8개 유럽국가와 캐나다의 중앙은행들에 도움을 호소했다. 9개국 중앙은행들이 Fed를 돕기 위해 시작한 것이 오늘날의 중앙은행 간 통화스왑이다.



굳이 따지자면 세계 최초의 중앙은행 간 통화스왑은 1935년 12월 조선은행과 만주중앙은행이 맺은 ‘예금협정’이다. 만주국에서는 국폐(만주중앙은행권)와 조선은행권이 함께 유통되었으나 1935년 11월 4일 관리통화제도가 실시되면서 조선은행권의 퇴출이 결정되었다. 이때 식민지 두 중앙은행은 ‘예금협정’을 맺고, 만주중앙은행은 조선은행권 회수액만큼 조선은행 앞 예금이 늘어난 것으로 기록했다(1대1 교환). 반대로 조선은행은 만주중앙은행의 예금액만큼 화폐발행액을 줄였다. 거래의 목적은 오늘날 통화스왑과 크게 달랐으나, 계약을 통해 두 중앙은행의 자산과 부채가 연동해서 움직였다는 점에서는 다르지 않았다. 실물경제 동향과 무관하게.



만주국이 갑자기 관리통화제도로 전환한 것은 바로 전날 장제스(蔣介石)의 국민정부가 똑같은 조치를 취했기 때문이었다. 국민정부에서는, 국제 은 값 상승과 국내 은의 유출로 인해 심각한 신용감소와 파산이 진행되고 있었다(은 공황). 부득불 은본위제도를 포기하고 관리통화제도를 선언했지만, 그 조치의 성공은 장담하기 어려웠다.



장제스 정부는 법폐(法幣) 즉, 4개 발권은행(중앙, 중국, 교통, 농민은행)들이 발행하는 은행권의 대외 신인도 유지에 필사적으로 매달렸다. 미국에 정부보유 은을 팔아 9400만 달러를 확보(은 매입 협정)한 다음, 이를 바탕으로 무제한 외화매입조작을 통해 ‘1위안당 1실링 2펜스’의 환율을 유지했다.



‘통화는 일단 뿌리면 세력이 붙는다’고 믿었던 일본 군부는 중국의 외환보유액 확충 노력 따위는 우습게 알았다. 일본 정부 역시 중국의 관리통화제도가 실패하리라 확신했다. 중국은 금본위제도 도입도 여러 번 실패했기 때문이다. 다카하시 고레이요(高橋是淸) 대장상은 장쭤빈(蔣作賓) 주일 중국대사가 화폐개혁을 위한 차관제공 의사를 묻자 “상업은행들이 갖고 있는 발권력부터 회수해야 성공하며, 그것이 실행되면 일본도 원조하겠다”며 점잖게 거절했다(별것도 아닌 이 발언은, 중대한 국가기밀을 누설하는 이적행위로 간주돼 이듬해 발생한 2·26쿠데타 때 다카하시는 청년 장교들에게 피살되었다).



일본, 화북지역에 괴뢰 정부 수립그러나 중국의 화폐개혁은 성공했고, 그럼으로써 중국의 항전력(抗戰力)은 크게 증진했다. 장제스는 “1935년의 화폐제도 개혁이 법폐 제도를 확립하여 파쇄(破碎)된 국민경제를 하나로 통합하게 하였을 뿐만 아니라 중국정부의 실제 통일을 촉진하고 중국으로 하여금 점차 현대국가의 길로 나아가게 했다”고 기록했다(?항전과 건국)?).



반대로 황하강 이남의 화북(華北) 지역까지 차지하려던 일본의 계획은 차질을 빚었다. 그러자 일본은 상황 반전을 노리고 노구교(盧構橋) 사건과 난징대학살을 터뜨렸다. 이후 8년간 계속될 중일전쟁의 서막이었다.



1937년 7월 중일전쟁이 시작되자 일본은 그해 9월 ‘임시군사비특별회계법’을 제정하고 국가재정을 전시비상체제로 전환했다. 전쟁이 끝날 때까지 회계기간이 무제한 연장되고 결산은 중단되었다. 예산심의를 통한 의회의 견제기능도 사라졌다.



특별회계법에서는 전비를 국채와 차입금으로 조달하는 것을 원칙으로 했다. 그 원칙에 따라 대장성은 일단 조선은행권을 차입하여 현지 주둔군에 지급했다. 조선은행권은 중국인들에게도 어느 정도 신용을 얻고 있었기 때문이다. 그러나 곧 벽에 부딪혔다. 중일전쟁이 시작되자마자 국민정부는 모라토리엄(지급 유예)을 선언하고 외국 돈과의 교환과 은행의 예금지급을 정지시켰다. 나아가 법폐를 황하강 이남으로 이송했다. 화북에서 돈의 씨를 말리려는 의도였다. 일본군은 콧방귀를 뀌고 “통화는 일단 뿌리면 세력이 붙는다”며 조선은행권을 보급하려고 했다. 그러나 유통이 강제된 것도 아니고, 외국통화와 자유롭게 교환되지도 않았기 때문에 중국인들에게 통하지 않았다. 모라토리엄 선언 이후 법폐의 가치는 폭락했으나, 조선은행권은 그보다 훨씬 낮게 취급되었다.일본군은 조선은행권을 액면가보다 훨씬 낮춰 법폐로 바꾼 뒤 현지에서 물건을 조달했다. 법폐를 몰아내기 위해 시작한 전쟁에서 법폐에 절대적으로 의존하는 모습은 분명 역설이었다. 일본군은 “전쟁에서 이기고 통화전(通貨戰)에서 졌다”고 입맛을 다셨다.



1937년 12월 일본은 점령지인 화북 지역에 ‘중화민국 임시정부’라는 괴뢰정부를 수립했다. “통화는 심리적 작용이 강해 중국의 민심을 안정시키는 것이 최우선”이라는 결론을 내리고 오로지 ‘화북의 금융독립’ 즉, 강제 통용력을 갖는 화폐발행을 목적으로 세운 정부였다. 국가수반에 해당하는 행정위원장에는 중국은행 총재를 지낸 왕커민(王克敏)이 임명되었다. 석 달 뒤 1938년 3월에는 이 정부의 중앙은행인 ‘중국연합준비은행’을 설립하고 법폐를 대체하는 은행권(연은권)을 발행토록 했다. 2500만 엔의 자본금 중 정부 몫인 50%의 출자금은 주로 조선은행 차입금으로 조달되었다.



그러나 이 은행이 가진 대외준비자산이 턱없이 부족하여 아무도 화폐교환에 응하지 않았다. 육군대신 이타가키 세이시로(板垣征四郞)가 이런 보고를 하자 천황은 “당신만큼 머리가 나쁜 사람은 없어!” 하며 버럭 소리를 질렀다. 이타가키는 수년 전 독단적으로 만주사변을 일으킨 주모자였는데, 그가 또 한 번 밀어붙인 계획이 성과를 거두지 못하자 그동안의 분노가 폭발한 것이다.



힘들게 세운 중국연합준비은행이 아무 역할을 하지 못하자 일본은 꾀를 내었다. 조선은행권의 명성을 이용하여 이를 연은권의 발행 근거 즉, 발행준비자산으로 삼은 것이다. 이를 위해 1938년 6월 중앙은행 간 통화스왑 즉, 조선은행과 중국연합준비은행 간 ‘상호예치 협정’이 체결되었다. ‘조-만 예금협정(1935년)’에서는 만주 국폐 발행액만큼 조선은행의 화폐발행액이 줄었다. 하지만 이번에는 연은권 발행이 늘어나는 만큼 조선은행의 외화자산이 늘어났다. 그 과정은 이렇다.



일본, 군비 지출 탓 화폐제도 붕괴중국연합준비은행은 현지 일본군에 연은권(국내부채)을 지급한 만큼 그 대가로 조선은행 앞 예금(외화자산)이 늘어나는 것으로 기록했다. 조선은행의 부담(국내부채)이 늘어나지만, 조선은행은 거기에 맞춰 일본 정부로부터 엔화(외화자산)를 받았다. 그러므로 아무 불만 없이 그 돈을 일본 국채에 투자했다.



이런 메커니즘을 통해 일본 정부는 엔화를 한 푼도 국외로 유출하지 않고 현지에서 군비를 지출했다. 일본의 군사비 부담이 고스란히 점령지의 화폐(연은권) 증발로 이전된 것이다. 그것이 일본의 노림수였다.



그러나 실물경제와 관계없이 군비지출을 위해서만 발행되는 연은권은 군표(軍票)와 다름없었다. 그것은, 동북아에서 일본이 그토록 독식하고 싶었던 화폐제도의 퇴보이자 자멸(自滅)이었다. 이것이 다음 이야기의 주제다.



 



 



차현진 한국은행 인재개발원장?hyeonjin.cha@bok.or.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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