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도리언 그레이가 발효 대신 ‘부패’한 까닭은

중앙선데이 2015.10.25 00:42 450호 14면 지면보기

이반 알브라이트의 ‘도리언 그레이의 초상화’(1943).



인생은 짧고 예술은 길다. 이 흔한 문장에는 깊은 탄식이 담겨있다. 그림 속 인물들은 오래전 세상을 떠났지만, 그림들은 미술관에서 영원의 삶을 살고 있다. 완벽한 꽃미남 도리언 그레이도 자신의 초상화를 보면서 질투심을 느꼈다.


[이진숙의 접속! 미술과 문학] -22- 『도리언 그레이의 초상화』: 오스카 와일드 vs 이반 알브라이트

자신은 조금씩 늙어가면서 아름다움을 잃어가지만, 초상화는 그려진 순간의 젊음과 아름다움을 영원히 간직할 테니 말이다. 영원히 젊고 영원히 아름답고 싶은 헛된-모두가 꿈꾸지만 아무도 이룬 적이 없다는 의미에서 철저히 헛된-꿈에서 오스카 와일드의 소설 『도리언 그레이의 초상화』(1891)는 시작된다.



예술이 가진 ‘영생의 미’를 질투한 도리언 그레이는 예술과 인생을 바꿔버린다. 18년간 그의 초상화는 세월과 때묻음, 모든 타락과 악행의 대가를 치르며 늙고 타락해갔지만, 도리언 그레이는 영원한 젊음을 간직한 예술이 되어갔다. 도리언 그레이라는 예술 기획을 주도한 사람은 헨리 워튼 경. 그는 그레이의 아름다움에 한눈에 매혹되어, 살아있는 예술품으로 만들고자 했다.



그런데 그가 원하는 것은 진선미(眞善美)의 일체를 목적으로 하는 고전주의적인 예술이 아니었다. 그는 도덕적인 굴레에 갇혀있던 본능과 감각의 자유로움을 일깨우는 새로운 예술을 원했다. 해서 도리언 그레이는 인간적 감각의 극치를 맛보는 데 기꺼이 자신을 던졌다. 수없이 많은 사랑을 했고, 술과 아편에 빠져들었다. 억압되어 있던 본능을 일깨워 그것을 주축으로 하는 새로운 예술을 해야 한다는 오스카 와일드의 주장은, 본능을 인간의 중요한 일부로 본 프로이트의 이론 이전에 등장한 것으로 매우 파격적인 것이었다. 예술적 삶을 위해 부도덕과 방종을 마다하지 않고, 살인까지 하는 파격적인 내용 때문에 소설은 발표 당시 혹독한 비난을 받았다.



인간의 육체란 얼마나 덧없고 허약한 것인가자신의 비밀을 알게 된 초상화가를 죽인 도리언은 그 죄를 잊고 싶어 아편굴을 찾아 간다. 과거의 죄를 “새로운 죄악의 광기로 지워버리는 것”은 임시 방편이었을뿐, 결국 그는 두려움에 떨며 다시 초상화 앞에 섰다. 과연 초상화는 이전보다 더 추악하게 변해 있었다.



미국 화가 이반 알브라이트(1897~1983)는 소설의 이 대목에 등장하는 도리언 그레이의 추악한 초상화를 그렸다. 1943년 알버트 르윈 감독이 소설을 영화화할 때 사용하기 위해서 주문한 그림이었다. 마술적 리얼리즘 화풍으로 인간의 몰락과 죽음을 그려왔던 알브라이트는 도리언 그레이의 타락한 초상화를 그리기에 가장 적합한 화가였다. 그림 속에서는 모든 것이 부패하고 있다. 깊게 주름진 피부, 공포로 휘둥그레진 눈, 증오로 일그러진 입술. 군데 군데 벌레가 먹어가는 낡은 의상. 카펫·벽지·탁자 등 집안의 모든 화려한 장식물도 예외없이 낡아가고, 파라오의 영생을 꿈꾸며 무덤을 지키던 이집트 고양이를 연상시키는 장식품도 부패를 모면하지 못하고 있다. 거기다가 살인을 저지른 손에 점점이 묻어있던 핏방울들은 이전보다 더 선명해져서 카펫을 붉게 물들이는 것처럼 보인다. 오스카 와일드가 묘사하고 있는 초상화가 소설 속에서 튀어나와 실제 그림이 된 것만 같다.



알브라이트는 고전 거장들의 작품에 담겨있는, 영원한 아름다움을 동경하고 모범으로 삼는 아카데미즘 기법을 기본으로 한다. 그런 그림 속에서 인물들은 조각처럼 단단하고 아름다운 육체를 가진 존재들로 묘사된다. 도리언 그레이의 원래의 초상화도 이런 방식으로 그려졌을 것이다.



고전 거장들처럼 알브라이트도 모델을 놓고 그렸다. 여기에 아주 가느다란 붓으로 만족할 때까지 디테일을 더하고 또 더 해서 숨막힐 듯 밀도 높은 그림을 완성한다. 그런데 이렇게 탄생한 그림에는 영원한 아름다움에 도달하지 못하고 거꾸로 피할 수 없는 몰락·죽음·부패라는 ‘시간의 복수’만이 담기고 만다.



죽음과 쇠락의 잔혹한 과정이 독특한 환상과 섞이면서 탄생한 작품들은 단순한 엽기적 취향의 발현이 아니다. 젊은 시절 알브라이트가 보고 체험한 인간사가 그러했다. 그는 1차 대전(1914~18)에 참전했다. 전쟁터에서 부상당해 무너져 내리는 환자의 육체에 대한 보고서를 작성하고 그림을 곁들이는 일을 했던 그가 고전적 단단함을 가진 인물을 그릴 수 없는 것은 당연한 일이다. 고전적인 완벽함을 갈망할수록 인간의 육체라는 것이 얼마나 허약하고 으스러지기 쉬운 것인가는 더 명확하게 느껴졌으리라. 그의 그림들이 삶의 덧없음과 죽음의 필연성을 담은 바니타스 회화로 넘어가게 되는 것은 그래서 당연하다.



마지막 순간 도리언 그레이는 ‘영원한 아름다움’에 대한 헛된 욕망이 자신을 파멸시켰다는 것을 깨닫는다. 자신의 육체는 여전히 아름다웠지만, 영혼은 초상화 속 인물처럼 ‘살아있는 시체’가 되었을 뿐이라는 것을 자각한 그는 초상화에 난도질을 한다. 다음날 사람들이 발견한 것은 아름다운 초상화 앞에 쓰러져 있는 흉악한 외모를 가진 중년 남자의 시체였다.



타인에 대한 이해가 없다면 성숙도 없다유미주의자인 오스카 오일드가 그 모든 부도덕과 방종 속에서도 새로운 아름다움을 찾아내려고 했듯, 알브라이트도 아름다움을 포기할 수 없었다. 모든 것이 부패해 가고 악취를 풍기는 와중에도 그림의 색채만은 놀라울 정도로 찬란하다. 그것은 부패하는 사물 특유의 칙칙한 색이 아니라, 도리언 그레이가 누렸을 본능적인 쾌락의 색을 닮았다. 붉은색, 분홍색, 민트색, 보라색, 노랑색들은 그 자체로 아름다운 색채이지만, 사물의 형태로부터 분리되어 묘한 광택감을 가진 색으로 변질되면서 다른 효과를 낸다. 보들레르는 시체를 썩게 하는 구더기들이 햇빛에 반사되어 오색찬란하게 보이는 순간을 묘사한 바 있다. 알브라이트의 색은 섬뜩한 부패의 아름다움을 드러내는 색이 되었다.



알브라이트가 그려낸 것은 성숙 없는 부패의 장면이다. 도리언 그레이는 순수한 관능의 감각을 일깨우기 위한 예술적인 실험을 하다가 끔찍한 결과에 도달했다. 그의 시도가 문화사적으로 결코 의미 없는 것은 아니겠지만, 그는 나쁜 결론에 도달했다. 순수한 관능과 감각의 문제를 젊음, 영원한 아름다움과 동일시했기 때문이다. 다소 늦고 빠름만이 있을 뿐, 어느 누구도 늙어 죽는 과정을 피할 수 없다. 시간은 주름을 만들고, 흰머리를 만든다. 그러나 이런 물리적인 외모의 변화가 시간이 가져다주는 유일한 것이 아니다. 우리 내면에서도 변화가 일어나기 마련이다.



도리언 그레이는 시간의 힘을 이해하지 못했다. 감각과 본능이 부정할 수 없는 인간의 본질이라면, 그 감각과 본능도 시간의 지배를 받아야 한다. 어린아이 때의 순진하고 순수한 기쁨도 손상되고, 젊은 시절의 역동적인 본능도 언젠가는 변질된다. 그 빛나는 것들이 손상된 대가로 우리에게 주어지는 것은 성숙이다. 맛 좋은 포도주는 포도가 저의 싱싱하던 모양을 잃고 나서야 비로소 얻어지는 법이다.



발효와 부패는 한끝 차이라고 했던가. 젊은 시절의 방종과 어리석음에 대한 성찰과 반성, 그를 기반으로 한 타인에 대한 이해와 관용은 인간적 성숙으로 나가는 기본이다. 그러나 도리언 그레이는 자신을 사랑해 자살한 여인에 대해서도, 자신이 아편굴로 유혹해 타락시킨 젊은이들에 대해서도, 심지어 자신이 살해한 사람에 대해서도 아무 연민이나 동정심, 죄책감을 느끼지 못했다. 방부제 미모처럼 그의 마음에도 냉혹한 방부제가 뿌려져 있었던 모양이다. 자신에 대한 성찰과 타인에 대한 연민이 없었던 도리언 그레이에게 성숙이라는 것은 존재할 수 없었다. 그는 발효로 깊어질 수는 없고, 흉측하게 부패할 수 있었을 뿐이다. ●



 



 



이진숙 ?문학과 미술을 종횡무진 가로지르며 각 시대의 문화사 속 인간을 탐구하는 데 관심이 있다. 『위대한 미술책』『미술의 빅뱅』을 썼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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