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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통스럽지만 이 무대가 끝나지 않기를”

중앙선데이 2015.10.25 00:24 450호 28면 지면보기
늦은 밤, 작은 포장마차에 사람들이 모여든다. 만년 고시생, 지하철 잡상인, 짝사랑중인 톨게이트 아가씨 등 저마다 사연 있는 이들이 서로의 외로움을 나눈다. 홍대 앞 100석 남짓한 소극장에 들어선 포장마차 ‘시유어겐’(31일까지 더 스텀프 극장)이다. 객석에 들어선 순간 이미 구수한 어묵 국물 냄새에 무장해제된 관객들은 사람 좋아 보이는 주인장이 계란말이를 부치고 닭똥집을 볶는 사이 무대 위 취객들과 어느새 하나가 된다.



그런데 낯선 연극배우들 속에 유독 튀는 ‘손님’이 있다. KBS 간판 아나운서로 활약하다 프리랜서로 전향한 방송인 김경란(38)이다. 오지랖 넓은 골드미스 야구캐스터 ‘미진’역을 맡아 노래에 춤까지 추며 첫 연극 무대에 도전 중인 것. 화려한 방송 세트와는 비교할 수 없이 작은 무대에 그는 왜 선 걸까.


연극 무대 데뷔한 방송인 김경란

첫 공연 전 습관적으로 마이크 찾아“제가 제대로 걷지도 못하더라고요, 바보처럼.”



첫 공연 5분 전에 마이크를 찾았다. 방송인에게 ‘한몸’과 같은 마이크와 대본 없이 ‘나 홀로 서는 무대’란 걸 실감하자 확 주눅이 들었다. 막연히 꿈꿔온 연극무대가 지닌 무게는 상상 이상으로 압도적이었다.



“고등학교 때부터 연극에 관심이 많았어요. 대학로 소극장 찾아다니면서 죽기 전에 연극 무대에 설 수 있을까 꿈만 꿨었죠. 배우들의 내공과 몰입이 대단해 보여서 열망하면서도 진짜 하는 건 힘들 거라고 생각했는데 느닷없이 기회가 찾아 왔네요.”



연극 ‘시유어겐’은 2000년부터 5년간 매해 겨울 대학로를 덥히던 따뜻한 무대다. 법전에만 의존한 경직된 판결로 한 가정을 망친 전직판사가 포장마차를 꾸려가며 진짜 삶의 모습들과 만나는 이야기다. 초록우산어린이재단(회장 이제훈) 30주년을 맞아 후원회장인 배우 최불암이 예술감독을 맡아 10년 만에 부활시킨 무대다. 후원자들에게 감사의 뜻을 전하고 소외된 청소년들에게 수익금을 기부하는 프로젝트에 재단 홍보대사인 김씨가 무보수로 출연한 것이다.



“작년에도 최불암, 이홍렬 선생님과 ‘스크루지’란 공연을 딱 한번 했어요. 1회 공연이고 과거의 유령 역할이라 잠시 나왔다 들어가면 됐거든요. 이번에도 작은 역할이라고 해서 부담 없이 오케이 했는데, 와서 보니까 퇴장을 안 하더라고요(웃음). 한 달 연습하는 내내 배우들이 더 대단해 보이고, 과연 할 수 있을까 의문이었죠. 지금도 고통과 행복을 오가는 양가감정이 있네요.”



무대에서 잔뼈가 굵은 연극배우들 사이에 굴러들어온 ?차도녀? 스타일의 방송인이라니 영 안 어울리는 그림이었을 성 싶지만, “다음에 다른 사람들과 잘할 수 있을까 싶을 정도로 완벽한 드림팀”이라며 팀웍을 자랑한다. 멤버들과 헤어지기 싫어 마지막 공연이 다가오는 게 두렵다고.



“젊은 친구들도 다 연기 전공자들이니 제가 제일 막내라 생각했어요. 사람들 앞에 선다는 것 외에는 전혀 반대인 작업이더라고요. 그들의 조언 하나하나가 소중했죠. ‘너를 보여줘’라는 말을 처음엔 알아듣지 못했어요. 어떤 옷을 덧입어야 할까 고민하다 어느 순간 와르르 무너졌죠. 나를 아예 무너뜨리고 가루가 되란 얘기더군요.”



그가 연기하는 미진은 극중에서도 튀는 캐릭터다. 사회적 소외자에 가까운 나머지 인물들과 달리 잘나가는 전문직에 포장마차에서도 산미구엘 맥주를 찾고 계란말이에 브로콜리를 넣어달라는 ‘된장녀’다.



“저 안에는 100퍼센트 외로움이 있다고 느꼈어요. 누구나 아무리 바빠도 채워지지 않는 공허함이 있잖아요. 하루의 끝에 배라도 채우려 포장마차에 오지만 거기서도 한발만 걸치고 자신을 놓지 못하는…그렇게 릴렉스하지 못하고 사는 모습에 공감이 되더라고요.”



아이티에서 만난 아이들이 삶의 터닝포인트‘릴렉스하지 못하는 삶’은 어쩌면 조직 내에서 그 자신의 삶이었는지도 모른다. 안전한 울타리를 포기하고 불안정하지만 스스로 뭔가 만들어가는 삶을 열망하게 된 건 2010년 방송 진행차 따라간 아이티에서다.



“거기서 만난 광경과 아이들 모습이 제 가치관과 방향성을 바꾼 시작점이 됐어요. 자연재해로 완전히 망가진 곳에서도 아이들의 웃음에는 가능성이 보였어요. 저 아이들이 계속 웃을 수 있다면 이 땅이회복될지도 모른다는 희망에 가슴이 뛰더군요. 무엇이 가치 있는 삶일까, 인생에 대한 고민이 시작된 거죠.”



그 후 초록우산어린이재단과 인연을 맺고 적극 봉사에 나섰지만 조직 내에 있다 보니 한계가 있었다. 아프리카에 가고 싶었지만 4박5일이 고작인 휴가로는 어림도 없었다. “캄보디아, 스리랑카 등 아시아 쪽만 짧게 다니다 보니 더 펼쳐보고 싶고, 유한한 시간을 더 가치있게 쓰고 싶었어요. 울타리를 벗어나야 가능한 일이었죠.”



퇴사를 하자마자 재능 기부자들을 모아 남수단으로 날아갔다. 사진작가와 PD, 작가 등으로 ‘나눔조합’이란 팀을 꾸려 남수단의 실상을 알리는 한편, 스쿨키트를 만드는 등 교육지원에도 발벗고 나서고 있다. “그곳 부모들이 굶어가며 학교에 회비를 내는 모습에 감동했어요. 아이들이 교육을 받고 행복한 모습을 영상에 담으려 운동회를 열어줬는데, 태어나서 처음 해본 운동회라더군요. 홍팀· 백팀 나눠서 게임하고, 응원을 하는 기쁨까지 알려주게 됐죠.”



9월 11일 시작해 한 달 넘게 달려온 무대가 거의 막바지에 이른 지금, 그나마 다행이라 생각했던 더블 캐스팅이 원망스러울 만큼 아쉽다는 그는 앞으로도 기회가 올 때마다 연극 무대를 놓치지 않겠다는 포부다.



“그 누구보다 아나운서다운 이미지를 구축해 왔다고 생각해요. 찔러도 피 한 방울 안 나올 것 같단 소리도 많이 들었죠. 진짜 애써 잡아온 모습이지만 그 모습으로 끝나고 싶지 않아요. 이제 정을 나누고 마음을 나누는 삶을 더 원해요. 자연스런 제 모습 그대로 살고 싶어요.” ●



 



 



글 유주현 객원기자 yjjoo@joongang.co.kr ?사진 전호성 객원기자·초록우산어린이재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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