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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NEW tech NEW trend] 엔진, 소음 빼고 화음

중앙일보 2015.10.22 19:2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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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난 19일 경기도 화성시 현대자동차 남양연구소의 고속주행로. 

현대차 ‘뉴 벨로스터’의 가속 페달을 밟으니 배기량(1591cc)에 걸맞지 않게 '으르렁~~'하는 거친 엔진음이 차 안을 가득 채웠다. 블루투스로 연결된 전화를 받으려 가속페달 반응도를 낮추니 표효하던 벨로스터는 순식간에 온순한 양으로 변했다. 지난 1월 6년 만에 부분변경(페이스리프트) 모델로 돌아온 이 차는 운전자가 듣고 싶은대로 엔진 소리를 바꾸는 곡예를 부린다. 이런 능력을 가진 차는 세계에서 유일무이하다.

곡예사는 뉴 벨로스터에 달린 ‘엔진 사운드 이퀄라이저’다. 주행모드별(다이나믹ㆍ스포티ㆍ익스트림) 엔진음을 설정하고 고ㆍ중ㆍ저 음역대별 음색을 미세하게 조절 가능하다. 익스트림 모드에선 12기통 레이싱카 엔진 사운드를 들으며 달릴 수 있다. 직접 만든 엔진음은 6개까지 저장해 두고 때와 장소에 맞춰 골라 이용하면 된다. 자신이 만든 엔진음 모드를 다른 이용자와 공유하는 서비스도 기술 개발을 마친 단계다.
 
 
 
현대차 관계자는 “고객 반응을 살펴 2년 안에 출시될 고성능차 N카에도 탑재하는 방안을 검토하고 있다”고 말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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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심리학ㆍ화성학 끌어들인 엔진 사운드
소음이 아닌 예술로 엔진음에 접근하는 ‘엔진 사운드 디자인’ 시장에 물이 오르고 있다. 이탈리아 슈퍼카 브랜드 마세라티에선 엔진 사운드를 디자인하는 엔지니어가 피아니스트ㆍ작곡가인 자문위원들과 악보를 그려가며 엔진음을 '작곡'한다.
 
파브리지오 카졸리 마세라티 아시아 총괄은 “전기차ㆍ하이브리드카처럼 엔진 사운드를 ‘빼앗긴’ 차들을 보면 안타까울 정도”라며 엔진음에 대한 애착을 보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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마세라티는 지난 2012년 ‘엔진음 쾌적화 프로젝트’로 생체 실험을 하기도 했다. 엔진 소리를 들려준 뒤 청중의 심박수ㆍ혈류량 등을 재며 듣기 좋은 소리를 찾아내기 위해서였다.
 
윤수미 마세라티 마케팅 총괄 이사는 “콰트로포르테의 배기음은 명품 바이올린 스트라디바리우스가 뇌파를 자극할 때와 같은 영향을 준다는 게 실험 결과였다”고 말했다.
 
 

 
재규어 스포츠카 'F타입' 특유의 거칠고 날선 엔진음은 액티브 배기 시스템이 만든다. 시스템을 켜면 머플러 중 더 큰 소리를 내는 부분에서 더 높은 주파수를 뽑아낸다. 배기가스도 직선으로 통과시켜 가스가 보다 자유롭게 흐르게 했다. 음색은 사람들이 선호하는 중저음 테너 C키로 튜닝했다. 설계 때 배기계 파이프 길이와 직경, 머플러 위치를 다양하게 시도해 멈출 때나 기어를 내릴 때도 특유의 사운드를 즐길 수 있게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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페라리는 최근 출시한 488GTB의 V8 터보 엔진 사운드를 개발하면서 화성학을 끌어 왔다. 또렷한 엔진 사운드를 즐길 수 있게 더 긴 파이프로 배기 헤더를 만들었다.
페라리의 엄진환 전무는 “출력이 높아지면 그에 발맞춰 V8 엔진 사운드트랙 소리가 또렷해진다”며 “최고 속도 330km/h의 역동성을 오감으로 느끼도록 깊이 있는 연구를 거쳤다”고 밝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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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차 안에서 즐기는 엔진음
도로 주행 소음 규제는 강화되는 추세다. 유엔 유럽경제위원회(UNECE)는 현행 74db인 소음 규제를 2016년에 72db, 2024년에는 68db로 강화할 계획이다. 환경부 교통환경과 관계자는 “우리나라 주행 소음 규제는 국제연합(UN)에서 정하는 국제 표준 기준에 따라 정해진다”며 “유럽 규제가 강화되면 영향을 받는다”고 말했다.  엔진음 튜닝으로 정기검사에서 불합격 시 기준에 맞춰 수리해 재검 받아야 하는 국내법(대기환경보전법 제70조)도 있다.
 
그래서 전문가들은 외부 배기계 엔진음 디자인에는 한계가 있다고 입을 모은다. 앞으로는 차 안에서 듣는 엔진음에 관심이 쏠리게 된단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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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숙성’과 동의어로 불려온 렉서스도 엔진 사운드 디자인을 고민해왔다. 렉서스 레이싱 쿠페(RC F)는 V8 5000cc 자연흡기엔진이 장착돼 467마력을 자랑하는 차다. 바퀴가 한번 구르면 매서운 배기음이 울려 퍼질 법도 한데 외부에선 여느 렉서스처럼 정숙하다. 맹렬한 8기통 엔진 사운드와 비명처럼 터져 나오는 브레이크 소리 모두 차 안에서만 들을 수 있게 만들었기 때문이다. ‘액티브 사운드 컨트롤’이 작동하면서다.
 
렉서스의 야구치 유키히코 수석 엔지니어는 “RC F는 한밤 중 주행에도 이웃에게 피해를 주지 않으면서 차 안에선 배기음을 즐기며 질주할 수 있는 차”라고 설명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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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숙성과 역동성을 동시에 잡는 기술도 나오고 있다. 인피니티 Q50에는 엔진 사운드에 정 반대 영향을 미치는 두 시스템이 손을 맞잡고 엔진음을 빚어낸다. 액티브 노이즈 컨트롤(ANC)과 액티브 사운드 크리에이터(ASC) 시스템의 협업이다. ANC는 차 안으로 들어오는 엔진 소음을 내부 설치된 마이크가 알아채고 스피커를 통해 음파를 내보내 소음을 깎아낸다. 반면 ASC는 엔진 속도와 주행 모드에 따라 엔진 사운드의 크기와 역동성을 조절해 운전에 재미를 더한다. 이 때 엔진음은 고품질 보스 스피커를 통해 흘러나와 ‘감상’의 대상으로 격상된다.

# ‘소탕의 대상’이 ‘소구의 도구’로
약한 인간의 다리를 대신해 바퀴가 발을 구르듯 엔진은 인간 심장의 연장선상에 있다. 전문가들은 ‘정숙성=고급차’란 공식과 나란히 브랜드별 엔진 사운드 경쟁도 계속될 것으로 내다본다. 고광호 아주자동차대학(자동차학부) 교수는 “충성도 높은 소비자에게 엔진 사운드는 브랜드 로고와 같다”며 “실내향에도 브랜드 정체성을 불어넣고 있는 벤틀리 등에서 볼 수 있듯 이젠 자동차 디자인의 반경이 오감으로 퍼지고 있다”고 말했다.
 
엔진음은 자동차와 운전자 간의 쌍방향 소통에서 빼놓을 수 없는 피드백 요소이기도 하다. 배명진 숭실대학교(소리공학연구소)교수는 “속도나 도로 조건 변화를 심리적으로 받아들이는 데에 소리 주파수 변화가 필요하다”며 “엑셀을 밟는 등 운전자 행위에 대해 차가 소리로 즉각 반응할 때 운전자는 쾌감과 정복감을 맛본다”고 말했다.
 
임지수 기자 yim.jisoo@joongang.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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